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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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가 되어서야 씻고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각자의 일을 했다. 차은수는 거실에 깔린 러그 위에서 휴식을 취하며 차은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심태성은 저택 앞 공터에서 단련하는 시간을 가졌다.
황금색에 가까운 햇살이 주홍빛으로 바뀌어 갈 무렵이었다.
문득 심태성의 기감에 문밖으로 나오는 차은수의 기척이 잡혔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자박자박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연락이 안 되네요…….”
차은수가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형이랑요.”
“괜찮을 겁니다.”
몸을 일으킨 심태성이 차은수를 안심시키기 위해 덤덤히 응수했다. 사실 실제로도 아무렇지 않았다. 차은혁이 어떤 임무를 나갔든, 어떤 위험에 처했든 심태성에게는 하등 상관이 없었으니까.
아니, 만약 그가 잘못된다면 오히려…….
심태성은 깊게 생각하지 않기 위해 차은수의 표정에 집중했다.
“……그래야 할 텐데.”
하얀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손등을 입가에 가져다 대면서 시선을 내리깐다. 심태성이 그 손을 감싸 쥐고 내렸다.
“잠깐 걷지 않으시겠습니까.”
눈을 깜빡거리던 차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로 산책을 시작했다. 심태성이 자연스럽게 보폭을 맞추어,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넓은 호숫가를 거닐었다. 숲길과 저택의 사이에 위치한 호수는 차은수가 분가해 나온 이 저택에서 가장 선호하는 곳이었다. 얼어붙지 않은 수면은 무척 맑고 잔잔해,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가다듬어졌다.
심태성은 익숙한 색채로 물든 차은수의 모습을 돌아보며 말문을 뗐다.
“도련님.”
“네?”
“강한 에스퍼일수록, 신체의 강도도 내구성도 높습니다.”
자신의 경우에는 지금 쥐고 있는 부드러운 손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으스러뜨릴 수 있었다. 성관계를 할 때도 그렇다. 아무리 욕망에 휩싸여도, 본능에 가까운 주의에 따라 악력을 조절했기에 차은수가 이렇듯 멀쩡히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이 가느다란 몸은 이미 파열되고도 남았을 터다.
“팀장님이라면 심해에서도 맨몸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겁니다.”
사실을 기반으로 한 위로에 차은수의 낯빛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그러나 곧 입을 감쳐물었다.
“그래도 같은 에스퍼들과 싸운다면…….”
어떠한 상황을 가정하는 모습에서 초조함이 흐른다.
테러를 통해 직접 에스퍼 범죄자를 겪어 보았으니……. 차은혁이 그들을 상대하러 가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과연 무사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심태성은 돌연, 모친과 누나가 해외로 장기간 떠난다는 소식을 전하며 안심한 기색을 보였던 차은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목숨을 보전하라고 해 왔던 부탁도.
이래서는 마치 큰 싸움에 대비하는 태도 같아 보이지 않는가.
“……도련님.”
심태성이 걸음을 멈추자 차은수도 따라서 멈추어 섰다. 그들은 몸을 돌려 서로를 마주 보았다.
사내가 차은수의 불안이 가라앉을 만한 다른 말을 고르던 찰나였다.
쐐애애액!
파공음과 함께 정확히 둘 사이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검고 날카로운 비수 같은 그것이 차은수의 손목에 박히기 전, 심태성이 그를 뒤로 밀었다. 감싸기에는 이미 늦어 이러는 편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대처였다. 깜짝 놀란 차은수가 균형을 잃고 휘청였다. 그 몸을 곧바로 잡으려던 심태성의 행동이 타인에 의해 막혔다.
“……!”
자신과 차은수 사이에 끼어든 인물은, 안색이 창백한 낯선 남자였다.
심태성은 그를 상대하기보다 곧바로 차은수의 곁으로 이동하기 위해 능력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또 다른 이가 청년의 목에 날붙이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덜컹거리며 저택의 영역 안에 들어온 차량이 거칠게 멈추어 섰다. 어두운 계열의 복장을 한 적들이 그 안에서 우르르 빠져나왔다. 그들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주위를 빙 둘러 포진했다.
“심태성 씨?”
심태성과 대면하고 있던 주청경이 입을 열었다.
“두 번째로 만나는군요.”
“…….”
“혹시 알아보시겠습니까? 우리, 호텔에서 처음 대면했는데.”
미소를 짓는다.
이어 차은수가 붙잡힌 뒤쪽을 흘끗했다.
“그때 상당히 열받았습니다, 저.”
그가 다소 극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예정이에요. 차은수 씨가 어떤 상태로 끌려갈지.”
주청경은 당연히 귀한 가이드를 해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데리고 가서 제 입맛대로 굴리려면 어느 정도 겁을 심어 줄 필요는 있다고 여겼다. 그는 시선은 차은수에게 향한 채로, 협박성 발언은 심태성에게 내던졌다.
물론 피를 보지 않고 끝낼 수 있다면 그러는 편이 가장 양쪽에 손해가 없을 터다.
“혹시 얌전히 물러날 생각, 있으신가요?”
그렇기에 자못 점잔을 빼며 물었다. 그러자 우습게도 질문을 들은 차은수의 연갈색 눈동자에 안도감이 서렸다.
심태성이 교전을 택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다치지 않을 거라고 여겼기 때문에?
……아니.
주청경은 차은수와 심태성 간의 교류를 면밀하게 살핀 적이 없었으나, 그들이 제법 끈끈해 보인다는 점을 눈치챘다.
지금 저 가이드는 제 경호원이 반드시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심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본인은 납치될 텐데 말이다.
하지만 차은수의 낯빛은, 그의 시선과 심태성의 눈길이 맞부딪힌 순간 파리하게 질렸다.
입을 꾹 다문 심태성이 무슨 결정을 내릴지 빤히 보였던 것일까.
“안 돼……!”
흉기에 베일 수 있는데도 격하게 몸부림을 친다. 주청경이 그 반응을 흥미롭게 살폈다.
유감스럽게도 차은수를 붙든 인물 역시 에스퍼인지라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절망으로 물드는 청년을 감상하던 주청경이 눈을 돌려 다시 앞을 보았다.
거구의 육체가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주청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딱 봐도 회유고 뭐고 안 통할 것 같긴 했다니까.”
중얼거림이 끝난 동시에 그의 뒤에서 심태성이 나타났다.
콰아아아앙!
주먹과 주먹이 부딪혀 발생했다기에는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두 에스퍼가 근접한 거리에서 살기가 깔린 눈빛을 주고받았다.
“재미없네요. 뭐……. 가이드를 망가뜨릴 생각은 원래부터 없었습니다. 호텔에서도 제 딴에는 정중히 데려가려고 했는걸요.”
“…….”
“그걸 당신이 망쳤죠.”
심기를 불편하게 들쑤시는 도발이, 심태성의 공격이 더욱 적극적으로 이어지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위치에서 나타나 몰아치는 체술에도 주청경은 그 대부분을 막아 냈다.
그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은 아니었으나, 심태성은 자신이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우습게도 원인은 가이딩이었다.
차은수와 함께 지내면서 가이딩을 차고 넘치게 받아 파장의 컨디션은 완벽하지만, 그 탓에 감각까지도 무뎌지고 만 것이다.
본디 이것이 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차치하고서 말이었다.
가이딩이 부족한 에스퍼 특유의 고통스러우리만치 과민한 오감은 전투 센스를 상향시킨다. 주청경은 흡사 앞을 내다보는 존재처럼 기민하게 공격에 대응하며, 심태성과 끊임없이 합을 주고받았다.
“경호원님……!”
차은수는 S급들이 벌이는 육탄전을 본인의 동체 시력으로 따라잡을 수 없었지만, 심태성의 몸에 상처가 느는 것만큼은 알아차렸다.
“그만……. 그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하다는 듯 눈시울을 붉힌 그가, 저를 옥죄고 있는 에스퍼의 손을 꽈악 잡았다. 가이딩으로 구슬려 볼 심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가운 가죽 장갑의 감촉만 느껴질 뿐, 피부 간의 접촉이 방해되어 가이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콰드득, 콰득.
그사이 심태성의 팔을 잡아챈 주청경이 그것을 잔혹하게 꺾어 버렸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아.”
승기를 잡은 에스퍼가…… 그것도 도덕의식은 물론이고 인간성이 뒤틀린 에스퍼가 다른 에스퍼를 얼마나 무참하게 짓밟으려 드는지, 차은수는 그 모든 상황을 목도했다.
“제발…….”
그의 낯이 충격과 두려움에 잔뜩 일그러졌다.
“제발, 그만……. 멈춰 주세요…….”
금방이라도 꺼질 듯 가냘파진 목소리가 흐느꼈다.
심태성의 목을 쥐어 올리던 주청경이 동작을 멈추었다. 안전거리가 확보된 가이드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찬다.
“저런.”
숨을 헐떡이던 주청경이 얼굴에 튄 피를 닦았다.
“뭐가 그렇게 서럽습니까?”
무언의 신호에 부하가 차은수를 풀어 주었다. 청년은 힘이 풀려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주저앉지 않았다. 그리고 참상이 일어난 곳으로 다가왔다.
심태성의 의식이 끊긴 것을 확인한 주청경이 그를 바닥에 내던졌다. 차은수가 황급히 무릎을 꿇고, 쓰러진 심태성의 육신을 보듬어 안았다.
주청경은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꽤 각별해 보이네.”
“흐읍, 흑.”
“오래되지 않은 관계로 아는데……. 가이딩하다가 정이라도 들었나?”
차은수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주청경을 올려다보았다.
“원하시는 대로, 뭐든 할게요. 그러니까……. 흐으, 그러니까 제 친구도……. 경호원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부, 부탁드려요.”
주청경은 자신을 알아본 가이드에 즐거운 감정이 들었다. 첫 만남 당시에도 스치듯이 느꼈지만 퍽 영특했다.
본신으로 와도 눈치채다니, 제법 운명적인 한 쌍이 아닐까.
한쪽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췄다. 가이드의 축축한 눈동자가 어둑해지는 시간 속에서도 광채를 발한다. 차은수는 외향적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그의 취향이었다.
“저도 죽이기는 싫습니다. 심태성 씨는 상당히 귀한 능력을 가졌기도 하고…….”
“……흐윽.”
“적이어도 일단 기회를 주는 편이거든요, 저는.”
애초에 이미 평화롭게 끝낼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까.
그가 눈꺼풀이 굳게 닫힌 심태성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주인을 지키려는 개처럼 이리도 절박하게 굴었는데, 차은수를 수중에 넣으면 분명 제 발로 찾아오려고 할 테지. 어쩌면 그때는 회유가 가능할지도 몰랐다.
이 또한 과거 장희강의 방식이기도 했다.
“자, 그럼.”
주청경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제 입가를 검지 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인사 한번 해 줄래요?”
“…….”
차은수의 눈이 흔들렸다.
싫더라도 버티는 것은 이 상황에서 아무 의미가 없으리란 것을 알 터였다.
주청경은 유약하되 눈치 빠른 가이드의 낯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떨던 차은수가 조심스럽게 심태성을 내려 두었다. 이내 질끈 눈을 감은 그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촉촉한 입술이 주청경의 입술에 닿아 왔다.

জীয়াই থাকি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