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눈을 뜬 뒤에는 심태성이 말했던 결정권을 입에 담았다.
“……준호 같은 사람들을 살리고 싶어요.”
불행했던 시간 속에서 과거의 인연을 살린 행위가 나 자신에게도 생기를 불어넣었음을 암시하는 눈빛을 띤다. 모두의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설움과 원망을 터뜨릴 수 있었던 것도 그 일로 인해 자존감을 조금이나마 회복했기 때문이라는 듯이.
소수라도 좋으니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도움을 주고 싶다고.
내가 서준호를 치료한 광경을 의사가 목격했으니, 분명 병원 측에서 신고를 하지 않았을까. 아마 그 신고를 받은 정부 기관 같은 곳에서 나를 만나게 해 달라고 조르고 있겠지.
다른 집단이었다면 S급들이 논의하고 있을 것도 없이 이미 박살을 냈을 테니까.
“가끔이라도……. 그거면 돼요.”
나는 이런 식으로 타협하게 되는 현실이 괴로우면서도, 이 자리의 모든 에스퍼가 나를 절대 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한 와중에 심태성은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겠다는 듯 시선을 맞춰 왔다. 척 보기에도 마음고생이 심했던 얼굴이다. 본인이 나를 서준호에게 데려다주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라고 생각했겠지. 그 후회는 나를 구속했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던 기존의 죄책감을 더욱 불려서, 내 의사를 따르겠다는 결심에 이른 듯했다.
하지만 그조차 나를 완전히 해방시키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차은수.”
형이 허락할 수 없다는 어조로, 하지만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설마 이마저 들어주지 않을 심산이냐는 표정으로 형을 쳐다보았다. 콜록콜록, 부작용이 끝나 멀쩡한데도 부러 마른기침을 터뜨리면서. 그러자 형은 나를 부른 것이 무색하게도 침묵의 늪으로 함락되었다.
아니. 형뿐만이 아니라 다른 반대파들마저 말이 없었다. 주청경은 팔짱을 낀 채 생각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장희강은 눈을 내리뜬 채 상념에 빠져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저 둘에게만큼은…… 내가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별 쇼크를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냥 내 존재가 사라졌다는 상황 자체에 분노했을 뿐일 수도 있다고.
하지만 완전히 그렇지만도 않았다. 나를 대하는 태도 자체가 바뀌었으니까.
자신들의 뜻에 반발하는 내게 평소의 쓰레기급 발언을 하지 않는다. 꽁꽁 감춰 두려던 약해 빠진 가이드가 양보를 바라는데도 일말의 조롱조차 없었다. 나를 쫓는 눈빛은 고요하게 침잠해 있었고, 마치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도우려는 것처럼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이건 진짜 놀라운데.
확대 해석일 수도 있지만, 내 눈치를 살피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본인들의 드높은 자존심에 속으로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겠지만 말이다.
***
차은수의 몸은 차은수의 것만이 아니었다. 장희강은 자신이 아닌 누구도 차은수에게 상해를 입히는 꼴은 절대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설령 차은수 본인일지라도.
그런데 자해에 가까운 능력을 쓰고 다닐 수 있게 해 달란다. 제 처지를 받아들일 테니 숨 쉴 구멍은 달라는 듯이.
당연히 안 될 일이었다.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 주었다.
장희강은 유리창 밖으로 벤치에 앉아 있는 차은수를 보았다. 혈색은 많이 나아졌지만, 숨넘어갈 듯이 울다가 코피를 쏟아 내며 쓰러지던 모습이 자꾸만 회상되었다.
고작 코피와 실신이다. 훨씬 더 끔찍한 모습으로 다치거나 죽는 이들을 무감하게 봐 왔던 자신에게는, 인상적일 이유가 전혀 없는 기억이었다. 차은수가 그 스러져 가던 목숨들과 똑같이 무의미한 존재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때를 떠올리며 동요하게 되는 것은…….
‘도련님의 의지로 돌아가셨던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묘하게 갑갑했다. 누군가 심장을 멋대로 주무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스스로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없는 경험은 차은수에 한해서 늘 심해졌다.
그런 불안정한 감정이 차은수의 말을 듣게 했다. 여태껏 그래 왔듯이 자신의 말을 듣도록 강제하는 것이 아닌, 차은수의 애원을 받아들이게끔.
스스로 떠나지 않고자 했던 것이라면 조금쯤은 풀어 주어도 되지 않겠나.
장희강은 심태성이 차은수에게 다가가는 장면을 주시했다. 고개를 들어 심태성을 쳐다본 차은수의 낯이 희미하게 풀린다. 처연하던 분위기가 심태성이나 차은혁 앞에서는 명료하게 달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불쾌감을 억누르는 훈련이 되었다. 질투를 넘어선 광포한 독점욕이 온몸을 휘감았다.
……똑같이 저를 억류한 이들임에도 태도가 다른 것은 분명 원래의 관계가 영향을 미친 탓일 테다.
자신에게는 보여 줄 일 없을 저 얼굴이, 문득 참기 힘들 만큼 탐이 났다.
장희강의 단단한 손이 차은수가 보이는 방향을 틀어쥐었다.
***
“안녕하십니까.”
예민한 인상의 공무원이 이름과 소속을 밝히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나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귀한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탁상에 잘 보이게끔 펼치고 펜을 내민다.
“내용이 길지만 요약해 드리자면 간단합니다. 저희가 지정해 드린 대상을 치료해 주시는 것과, 해독이 필요한 구역을…….”
정중히 설명을 이으면서 오로지 내 얼굴만 바라본다. 대화 상대가 나니까 당연하기는 하지만, 내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물을 보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 같기도 했다. 흘끔 돌아보니 형은 올곧은 자세로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누구 하나 죽일 듯이 살벌하게 번들거렸다. 아무래도 계약서를 찢어 버리고 싶은 것 같았다. 장희강이나 주청경이었다면…… 계약서만 찢고 싶어 하진 않았겠지.
그래도 참는 게 어디냐. 심태성을 아군으로 둔 채 어렵게 설득한 보람이 있었다. 심태성도 실은 내가 되도록 능력을 쓰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았지만.
나는 블루를 족쳐 알아낸 내용을 토대로, 치료 상대의 상태에 따라 내가 겪는 부작용의 강도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서준호의 경우는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기에 그토록 강한 부작용을 겪었던 것이라고. 그러니 크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능력을 쓰고 다니기로 합의를 마쳤다. 이는 S급들이 내건 첫 번째 조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뵈었을 때는 무척 걱정스러웠는데,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역시 에스퍼이시라 회복력이 좋으신가 보군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번째 조건은 에스퍼로 신분을 속일 것. 형이 보고 있으니 거짓말에 능란해 보이지 않도록,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해 보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부작용이 끝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진 데다가, 과보호 아래에서 삼시 세끼 산해진미만 먹고 영양제 챙기고 규칙적으로 잠들었는데 혈색이 안 좋으면 이상하지.
내가 코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이후 S급들은, 심지어 장희강과 주청경조차 나를 극진히 돌보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둘도 원래부터 나를 신체적으로는 지나치게 케어하는 편이기는 했다.
“아. 그리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금전적인 사항을 포함해 계약과 관련된 용무가 끝났기 때문인지, 자꾸만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내심 시큰둥했던 나는 이어지는 말에 멈칫했다.
“서준호 씨와는 무슨 관계이신지 여쭈어 봐도 괜찮으십니까?”
“……서준호, 씨요.”
“예.”
하긴. 내가 왜 서준호를 살렸나 정부 관계자들도 의문이 들기는 했을 거다. 분명히 따로 조사를 해 봤을 텐데 접점이 전혀 없다는 결과가 나와서 이상했겠지.
즉, 이 질문을 나한테만 던진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서준호 씨는 차은수 님을 모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역시……. 그렇겠지, 뭐. 잠시 말을 고르느라 입을 다물었다.
그때 형이 나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방송에서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찾아간 겁니다.”
“……그러셨습니까?”
진실이다. 애초에 둘러댈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충동적으로 그만……. 무턱대고 행동했네요.”
부상자들이 한둘은 아니나 뉴스에서 실명까지 거론되는 경우가 드물기는 했다. 하지만 타인을 고치기 위해 병원에 잠입까지 했다니. 객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좀 어려울 것 같았다.
역시나 공무원은 납득하지 못한 듯, 좀 더 파고들고 싶은 눈치였다. 결과적으론 내가 자신의 의혹을 눈치채고 기분이 상할까 저어되는지 말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질의를 통해 서준호 씨가 본인이 회복된 일과 차은수 님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더군요. 연락처를 요구하기에 기밀이라 알려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혹시 차은수 님께서 원하신다면,”
“아뇨.”
나는 말끝을 단칼에 잘랐다.
“괜찮아요.”
봐서 뭐 하냐.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감사 인사나 전할지 모를 서준호를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죽어 가던 녀석을 살린 것으로 족했다.
“뜻이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공무원은 서준호를 비롯해 병원 관계자들의 입막음을 철저히 했으며, 앞으로도 내 정체가 베일에 싸여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장담했다. 서준호가 희귀 케이스로 멀쩡해졌다는 소문이 이미 세간에 파다한 상황이라서 제법 신뢰가 가는 말이었다. 어차피 활동할 때마다 지금처럼 S급들이 동행할 예정이라 내 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갈 확률은 극히 낮겠지만.
“그럼 살펴 가십시오. 협회장님께서도 들어가십시오.”
공무원이 드디어 형 쪽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남이 형을 부르는 호칭은 퍽 낯설었지만, 이상하지는 않았다.
얼마 전 형은 내게 자신과 다른 S급들이 에스퍼 협회장이라는 정보를 전했다. 당시 나는 염탐 계열 치트키나 다름없는 제3의 눈을 통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짐짓 놀란 기색을 비쳤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수상쩍단 말이지. 시스템은 세계가 융합되면서 달라질 게 달라졌다고 했었지만, 이는 영 조작의 냄새가 나는 부분이었다.
극진한 배웅 속에서 건물을 빠져나왔다. 형을 무서워하면서도 우리 둘이 무슨 관계인지 묻고 싶은 눈치였던 공무원은 끝내 그 궁금증 역시 속 시원히 해결하지 못했다.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자 형이 출발했다. 차내로 쏟아지는 햇살이 몸을 따끈하게 데웠다.
나는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주변 사물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청명한 하늘은 계속해서 시야를 채웠다.
정적이 흐르는 차내의 분위기가 무겁지만은 않았다. 근래에 형을 포함한 넷은 한 발짝 물러서 주고, 나는 더 이상 마음고생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형의 마음이 조금 놓인 것 같았다.
문득 끼리끼리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손아귀에 넣은 채 쥐고 있으려는 이들과 그 상황을 즐기는 나. 어느 쪽이 더 뻔뻔한지는 사실상 모를 일이었다.
인적 없는 도로를 달리다 보니 요새처럼 세워진 안전 가옥이 눈에 들어왔다. 속도를 늦추다가 그 앞에서 멈춘 형은 나를 돌아보았다.
“들어갈까.”
고개를 끄덕이고서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곁으로 다가온 형이 손을 내밀었다.
말없이 그 손을 맞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앞으로 다섯 명이 함께 살아갈 집이 가까워져 갔다.
어차피 S급들이나 나나 서로를 놓을 수 없는 관계다. 그들은 나를 원했고, 나 또한 내 생존과 즐거움을 위해 그들을 원했다.
그러니까 뭐가 문제야.
즐기면 되는 거지.
스스로가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문 너머로 걸어 들어갔다.
만렙 가이드로 살아남기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