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이라도 내듯 나를 마음껏 범해 놓고는 자기 처지를 생각해 달란다.
뻔뻔한 것을 넘어서 기이한 태도였다.
물론 뭘 노리는지는 알 것 같다. 본인에 대한 부정적이지 않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겠지. 약간의 동정심이라도 말이다.
주청경이 내 감정마저 원하는 건 가이딩이 이루어질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저 남남이었던 심태성을 통해 이미 증명된 사실이기에, 나로서는 처음부터 예상하던 바였다.
“안정적이에요.”
창가에 서 있던 내 몸을 뒤에서 끌어안은 주청경이 중얼거렸다. 밤낮없이 미친 듯한 섹스를 치른 이후 내게 쉴 틈이라도 주듯, 최근에는 지금 같은 포옹 정도에서 멈추는 그였다.
“시끄러운 것도, 온몸을 찌르는 고통도 없고.”
“…….”
“과장을 좀 보태서 바보가 된 기분입니다.”
……혹시 그게 심태성의 패인일까.
가이딩으로 상태가 안정되자 기감이 흐려져서…….
하지만 능력을 새로운 방향으로 개방했던 심태성의 모습을 되새겨 보면, 만일 다시 전투를 벌이게 될 시에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듯싶었다.
신체 접촉이라는 제약이 사라진 순간 이동이라니. 원래 사기적이던 스킬이 더 사기적으로 업그레이드된 셈 아닌가.
일시적으로 발생한 힘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아침에 확인해 본 결과 심태성은 내 흔적을 쫓으면서 그 능력을 연마하고 있었다. 얼마나 스스로를 몰아붙이는지 부쩍 수척해진 모습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은수 씨.”
나긋한 부름이 상념을 방해했다. 황폐한 창밖을 바라보던 내가 고개를 돌리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주청경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와는 다르게 가이드를 손아귀에 거머쥔 에스퍼의 낯에서는 윤이 났다.
“걱정 마세요. 평생 이곳에 갇혀 살지는 않을 겁니다.”
“……!”
어깨를 흠칫했다.
내가 죽은 에스퍼에게 건넸던 말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기억을 읽은 건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당신이 원하는 곳 어디서든 살 수 있게 될 테니.”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되리라 여기는 어조였다.
주청경의 작전은 앞으로 무언가 추가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실행했으니까. 그는 형과 장희강이 공멸하거나, 장희강 측이 패배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정부를 장악할 예정이겠지.
새삼 소름이 돋는다. 국가 하나를 지배하려는 의지를 갖는다는 것이.
머릿속에 세워 두었을 계획의 성공을 위한 계획, 과연 그것은 어떤 식일까.
“내 곁이기만 하면 됩니다.”
주청경이 고개를 숙여 가볍게 코끝을 맞대어 왔다.
“그냥 내 곁에서, 내가 하는 일들을 지켜보면 돼요.”
“……누군가 죽는 건.”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피 흘리는 건 싫어요.”
“…….”
“당신 뜻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해치겠죠.”
“무가치한 이들이라면.”
짧은 대꾸가 돌아온다. 일반인들을 뜻하는 것이었다. 테러 당시에도 직접적으로 주청경의 사상을 듣기는 했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에스퍼나 가이드,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라 해도 똑같은 사람이에요.”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왜 사람의 가치를……. 에스퍼의 능력이나 가이딩으로 정하는 건가요?”
그렇잖아. 비과학적인 특별한 힘이 없다고 해서 일반인들이 굴종할 의무는 없다. 똑같은 지성체로서 그들 개개인이 있기에 사회가 돌아가는 거니까. 만약 아니라면 열심히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전생의 내가 억울하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쌓아 온 인연이 있고 생각해 둔 미래가 있을 터다. 하지만 장희강이건 주청경이건 이 미친 에스퍼 우월주의자들은 그들을 멸시하고, 아무렇지 않게 그들의 피를 보면서 민주주의를 전제주의로 바꿀 심산이었다.
“내가 에스퍼로 발현한 순간은…….”
문득, 주청경이 허공을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건 무슨.”
“엉망인 시절이었죠. 도박에 빠졌던 어머니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고, 아버지는 그날부터 나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
“폭력을 어떻게 써야 상대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길 수 있는지, 장애를 얻지 않은 게 기적일 정도로 맞으면서 깨닫게 됐죠.”
불행한 과거가 조용조용 흘러나온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하루는 식칼을 들고 달려드는데……. 오늘은 정말 죽는 건가 싶었습니다.”
내 몸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당시엔 죽기 싫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개같은 삶이었어도, 살고 싶다고.”
“…….”
“그러던 어느 순간 바닥에 쓰러진 내 모습이 보이더군요. 아버지의 시야였어요. 내가 몸을 앗았던 거죠.”
주청경은 점차 나빠지는 내 안색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를 죽이려던 칼로 스스로를 찔러 죽는 기분이 어떤지.”
“……!”
“그걸 못 느껴서 아쉬웠네요.”
시발.
섬뜩함에 손이 떨렸다.
자기 수하를 잔혹하게 죽일 때부터 생각했지만……. 빙의한 몸이더라도 고통은 고스란히 느껴질 텐데, 어떻게 빙의 대상의 목숨이 끊길 정도의 자상을 스스로 낼 수 있는 것일까.
그 정도 고통은 가이딩 부족으로 겪는 증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걸까.
……가만.
‘역시 이 상태로는 모르겠네.’
빙의했을 때 가이딩은 안 느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습니다. 에스퍼의 힘 아래 무력하게 휩쓸리는 존재가, 이치에 맞지 않게 살아왔다는 걸.”
주청경이 조소했다.
“한 집안의 왕처럼 굴던 이가 실은 지배를 받아야 할 약자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놀란 눈으로 주청경을 쳐다보았다. 적색에 가까운 흑안 역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그런…….”
이내 나는 주청경의 잔인함에 또 한 번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듯, 여러 감정이 뒤죽박죽된 표정을 지었다. 끔찍한 과거를 털어놓은 상대를 향해 어쩔 수 없는 동정이 피어난 듯한 기색.
그에게 그런 식의 상처가 있을 줄은 몰랐다는 양 말이다.
상대로부터 무슨 짓을 당했는지 헤아려 보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무른 태도였다.
그래 봤자 현재 그가 무도한 사건들을 벌인 무장 세력의 수장이라는 진실은 변하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
아무리 그런 시절을 겪었어도, 그것이 네가 벌여 왔고 벌이려는 일들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못한다고. 모든 사람이 너 같은 상황에서 너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난 부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아픈 기억을 지닌 그가 혹여 상처를 받지 않을까, 미련하게도 망설이는 것이었다.
그에 주청경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압니다. 은수 씨는 절대 동감하지 못하겠죠.”
“…….”
“하지만 저는.”
작은 얼굴과 다르게 커다란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쥐었다.
“만약 은수 씨의 발현이 훨씬 일렀고, 그때 만났더라면……. 아마 지금과는 다른 길에 서 있었을 것 같습니다.”
흘러내린 머리칼이 음영을 드리운 낯으로 쓸쓸하게 웃는다.
“아니. 분명히.”
자기 얼굴을 매우 잘 써먹을 줄 아는 케이스였다.
주청경을 올려다보던 나는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동요하는 기색을 들키고 싶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
“…….”
내 반응을 한참 응시하던 주청경이, 느리게 고개를 내렸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아 왔다.
나는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피하려 들었다. 하지만 내 얼굴을 붙잡은 손은 끄떡도 하지 않았고, 거짓된 애처로움이 깃든 상대의 낯이 시야를 가득 채워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입술만 머금던 키스가 서서히 깊어져 갔다. 입술 안쪽이 문질러지는 야릇한 감각에 살짝 입이 벌어지자, 곧바로 주청경의 혀가 파고든다. 분명 물컹한데 단단하기도 한 살덩이는 맛이라도 보듯 구강 여기저기를 훑으며 지나갔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으음…….”
츄웁. 츱. 습한 두 혀가 엉기며 익숙하게 물기 어린 소리를 흘렸다. 아래로 내려온 주청경의 두 손이 내 허리를 감싸 쥐고 몸을 뒤로 돌렸다.
마주 보게 된 자신 쪽으로 더욱 끌어당겨 밀착시키는 손길에서, 벌써 뜨겁게 피어오른 열기가 느껴졌다.
“읍……!”
부드러웠던 입맞춤이 점점 잡아먹을 기세로 바뀌어 간다. 불쌍한 척하던 미친놈은 마치 육체적인 위로가 필요하기라도 하다는 듯, 은근슬쩍 하체를 비벼 오기 시작했다. 하의 밖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주청경의 좆이 내 복부에 문대어졌다.
“하…….”
주청경이 입술을 붙인 채로 뜨거운 숨결을 흘렸다. 그러고는 나를 번쩍 들어 바로 뒤의 창가에 걸터앉히더니, 자연스럽게 내 양다리를 잡고 벌리면서 그사이에 자리 잡았다.
나는 팔을 내려 창틀을 붙잡고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주청경은 그런 내 모습을 핥듯이 주시하면서, 상의를 벗어 던졌다. 과하지 않게 붙어 있는 근육들이 꿈틀거리면서 흥분한 주인의 상태를 표시했다.
“은수 씨.”
정욕이 서린 속삭임이 귓가를 점령했다.
지금 주청경의 파장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따라서 가이딩이 전혀 필요 없다는 사실을 그 스스로도, 그리고 나도 잘 알고 있지만…….
주청경은 이미 진득하게 떡칠 생각이 만만했고, 그와의 정사가 까무러칠 만큼 좋았던 나도 아닌 척 들뜨기 시작했다.
몸은 쾌감을 기억하니까.
주청경은 내가 지독한 쾌락에 정신을 못 차리고 저에게 매달리게 만든 뒤, 나중에는 그 기억으로 인한 치욕감에 무너지게 할 의도에서 약을 먹였던 거겠지만……. 퀘스트 보상으로 성감이 증폭된 데에다가 약효까지 겹쳤던 그 섹스는 솔직히 죽여줬다.
물론 약쟁이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 주청경이 바라는 대로 질질 짜면서 다신 쓰지 말라고 애원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