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차은수는 차은혁의 기분을 풀어 주듯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기억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아, 형. 곧 준호 생일인 거 알지?”
“서준호?”
“응.”
서준호는 차은수의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차은수의 인간관계를 꿰뚫고 있는 차은혁이 모를 리 없었다.
차은수는 차은혁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트에일 호텔에서 파티 할 예정이래.”
이윽고 날짜를 들은 차은혁은 눈썹을 모았다. 하필 작전이 있어 일정을 빼기 어려운 날이었다. 함께할 수 없다면 불안해서 보낼 수 없었다.
“안 돼.”
“형…….”
“당분간 외출 생각은 마.”
“그렇게 당장은 아닌데…….”
차은수의 표정이 흐려졌다. 차은혁은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그런 그의 눈치를 보며 차은수가 조곤조곤 설득해 왔다.
“이번에 선물도 사 왔는데, 직접 건네주면서 축하하고 싶어.”
“…….”
“형이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 근데 남들이랑 신체 접촉도 조심할 거고, 내가 가이드란 사실도 잘 숨길게.”
그러기에는 이미 심태성에게 진실을 드러내지 않았나.
물론 따지고 보면 애초에 심태성을 동생의 경호원으로 고용한 제 잘못이었다. 차은혁은 불신과 자책감을 동시에 느끼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동생으로부터 자신이 원했던 속삭임을 들은 상태인 그는, 생각이 다소 물렁해져 있었다. 저를 바짝 조여 오던 강박증을 조금 내려놓은 채 동생의 눈망울을 내려다보았다.
결국 무겁게 입을 떼었다.
“……심태성과 절대 떨어지지 마.”
동그랗게 눈을 뜬 차은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
조경이 화려한 호텔 입구.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까만 벤츠가 부드럽게 바퀴를 굴리며 도착했다. 도어맨이 다가가 차량의 문을 열자 내부에서 길쭉한 다리가 빠져나왔다.
“나온다.”
“지금, 지금!”
건물 주위를 둘러싼 채 일정 거리를 두고 대기 중이던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었다. 차에서 완전히 나와 땅을 디딘 청년은, 찰칵거리며 터져 나오는 플래시 세례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 띤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걸음을 옮겼다.
맵시 있게 차려입은 슈트가 빛을 발할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드러나 있는 목과 하얀 손 역시도 묘하게 타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경호원인 듯한 사내가 청년의 뒤로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굉장한 거구와 무표정한 얼굴에 많은 이가 압도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차화 그룹 로열패밀리를 경호하려면 피지컬이 저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건가 싶었다.
심지어 잘생겼다. 빼어난 미모로 인기가 많은 차은수와의 투 숏이 무척 조화로워, 다들 신나게 셔터를 눌러 댔다.
시끌시끌한 외부에서 실내로 들어가니 평화로운 로비가 두 사람을 반겨 왔다. 그들은 연회장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나왔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차은수가 심태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희 가족들이 대단한 거지, 제가 대단한 건 아닌데……. 가끔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 상황이 부담스럽더라고요.”
“…….”
심태성은 조용히 차은수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이 가이드는 본인이 세상 그 누구보다 유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눈치였다.
“저 혹시 표정 이상하진 않았죠? 걷는 거나.”
“모델처럼 보이셨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진지한 칭찬이 날아왔다. 차은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고맙다고 응수했다.
띵. 작은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초대받은 장소가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혼잡하지는 않지만 적잖은 인원이 모인 공간이 나타났다. 주로 상류층의 젊은이들이었다. 심태성처럼 경호 따위를 목적으로 그들을 따라온 일행들은, 문 근처에 따로 마련된 자리에 앉거나 섰다.
심태성은 멀찌감치 떨어져서도 차은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르르 몰려든 이들을 한 명 한 명 상대하는 얼굴이 말갛다. 최근 몸을 완전히 회복한 터라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다.
“오, 차은수~.”
바쁜 차은수에게 서준호가 다가왔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자, 차은수와는 오래된 친구 사이였다.
“왔냐?”
“왔다. 생일 축하해.”
차은수는 미소를 띤 채 선물을 건넸다. 지난번 심태성과 방문한 숍에서 구매했던 향수였다. 서준호가 그것을 열어 보지도 않고 코를 찡긋거렸다.
“벌써 마음에 드는데.”
“그래?”
“어. 너만큼 내 취향 잘 아는 애가 어디 있겠냐.”
“뭐야, 서준호. 쓸데없이 느끼해.”
두 청년을 에워싸고 있던 무리 중 한 명이 끼어들어 야유했다. 와르르 웃음꽃이 피었다. 갓 성인이 된 이가 대다수이니만큼 아직 애티가 풍기고 활발한 분위기였다.
여러 사람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서준호가, 차은수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어디론가 이끌었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단상 위였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귀빈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과장된 몸짓으로 꾸벅 인사를 올리는 모습에 여기저기서 유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떨결에 옆에 서서 함께 조명을 받게 된 차은수는 장난기 가득한 친구의 낯을 난감하게 쳐다보았다.
“보자. 앞길 창창할 나이대로 보이는 분들이 많군요. 아, 대부분 이 몸이랑 동갑이실 테니 당연하겠어요.”
홀을 둘러보며 농담조로 하는 말은 또 한 번 좌중을 키득거리게 만들었다.
그 순간 단상 밑에서 호텔 직원이 트레이에 받친 샴페인 병을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들며 서준호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정말 뛰어난 인재는 거의 없네요.”
“…….”
“…….”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쟤 방금…….”
“……뭐라는 거야?”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도 서준호는 태연했다.
“네. 에스퍼나 가이드 말이죠.”
그가 차은수를 돌아보았다.
조명을 받아 희게 빛나는 차은수의 얼굴은 당혹감에 물들어 있었다.
“굳이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들 안온한 삶에 진정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손에 들린 병이 반짝였다.
“무력입니다. 개중에서도 무궁하게 다양하고 강력한, 에스퍼의 힘.”
“…….”
“무력은 모든 걸 없앨 수 있지만 지키기도 해요. 아무 능력도 없이 환경만 잘 타고난 여러분 같은 약자들까지도 말이죠.”
그러니…….
“이제 그만 약자답게 순응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
“대체 그게 무슨…….”
어안이 벙벙한 사람들이 무어라 외치려던 순간이었다.
계속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서준호가 병을 높이 들어 올렸다.
펑.
샴페인이 터졌다.
신호탄이었다.
***
서준호는 저런 말을 할 성격이 아니었다. 저렇게 에스퍼 테러 조직이 지닐 법한 사상에 물든 놈이었다면 이미 돌팔매질을 당했을 것이다.
녀석은 꼭 무언가에 씐 것만 같았다.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는 동안 본의 아니게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된 두 눈의 초점이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
입가에 걸고 있는 웃음 또한 언뜻 본인의 의지가 아닌 것처럼 보여 섬뜩했다.
……잠깐.
잠깐만.
씌었다고?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듯한 시스템이 이번에도 내 생각에 반응해 즉시 창을 띄웠다.[폭주 위험군 명단...<사진>주청경: S급, 빙의 능력자, 31세...]
시발.
얘가 있었지.
빙의라니, 이것도 존나 사기 스킬 아니냐고 감탄한 기억이 있다.
근데 어떻게…….
“으아아악!”
“이게 뭐……!”
샴페인이 터진 직후 급속도로 장내가 뿌옇게 변해 갔다.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지는 연기의 정체가 무엇일지 감도 안 잡혔다. 본능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최소 한 명 이상의 공범도 여기 온 거다.
“우웨엑!”
“사, 살려, 줘…….”
“커헉, 꺽!”
제대로 보이지 않는 연기 속 상황이 아비규환이라는 사실은 소리만 들어도 알아챌 수 있었다.
독가스인가?
끔찍한 환영이라도 보이나?
그도 아니면, 누군가에게 공격당하고 있는 건가?
“윽!”
억센 손길이 내 손목을 붙들었다.
서준호……. 아니지, 서준호의 탈을 쓴 주청경이었다.
“역시 이 상태로는 모르겠네.”
놈이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으로 맞닿은 피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내 상태를 보았다.
“아.”
귀엽다는 듯 웃는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참지 않아도 됩니다. 편하게 호흡하세요.”
“…….”
웃기지도 않았다.
저게 뭔 줄 알고, 시발.
사람들이 거의 미쳐 가는데.
“약, 드셨잖아요?”
……뭐?
“차은혁을 가이딩할 정도라면 가치가 잴 수 없을 만큼 높은데……. 다치게 할 수야 없죠. 정신 나간 가이드는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
“침대에서라면 모를까.”
야릇하게 손바닥을 간질이는 손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 새끼……. 우리 집안 전담의에게도 빙의해서 내가 약을 먹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다 먹으라기에 꼬박꼬박 챙겨 먹었던 그것이, 지금 이곳에 퍼진 화학 무기 같은 연기로부터 무사할 수 있는 일종의 백신 역할을 하는 약품이었던 듯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심태성은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당한 건…….
“서, 서준호.”
나는 두려움을 그득 담은 목소리로 몸을 뺏긴 녀석을 불렀다.
친구가 갑자기 딴 사람처럼 굴고, 연회 홀은 습격당한 데다가, 가이드라는 정체를 들켜 버린 이 상황이 마냥 혼란스럽고 무서운 양 부들부들 떨었다.
실제로도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아니……. 누구야, 당신.”
“……오.”
썩 영특하고 기꺼운 질문이라는 듯, 주청경이 눈을 휘었다.
“저는…….”
그때였다.
강한 힘이 단상 아래쪽에서 나를 낚아챘다. 얼마나 빠르고 거칠었는지, 주청경의 손아귀에서 순식간에 풀려날 정도였다.
눈을 크게 뜨며 떨어지던 찰나. 마찬가지로 놀라움이 스치는 주청경의 낯이 보였다.
그 직후 시야가 바뀌었다.
“헉……!”
쏴아아, 쏴아아.
가장 먼저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다음에는 푹신하고 차가운 모래의 감촉이 뒷덜미로 느껴졌고.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내 위에서 나를 감싸고 있는 심태성을 느리게나마 인지할 수 있었다.
처음 겪는 순간 이동이었다.
비현실적인 경험에 잠시 나가 버린 넋이, 벌겋게 물든 심태성의 셔츠를 발견하고서 급히 되돌아왔다.
“경호원님! 피가……!”
기겁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순순히 비켜 준 심태성이 해당 부위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제 피가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다.
나는 아프게 뛰는 가슴을 움켜쥐고 다시 모래사장 위로 허물어졌다. 그러고 보니 여긴…….
여길 또 왔네.
“정말 다치신 곳이 없는 게 맞습니까?”
늘어져 버린 나를 살피는 심태성의 얼굴에서 진심 어린 불안과 걱정이 흘렀다.
그 모습에 혹시나 하고 심태성을 의심했던 나 자신이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 그렇게 정신없는 상황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이동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