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
외부와 단절된 곳에서 훈련을 지휘 중이던 차은혁은 뒤늦게 개인 핸드폰을 확인했다. 동생으로부터 온 부재중 전화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는 곧바로 연락을 해 보았지만, 상대의 기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배터리가 전부 닳았을 수도 있으니 심태성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만 길게 이어지다 끊길 뿐이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화면을 내려다볼 때였다.
“팀장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뒤를 돌아보았다.
“출정 준비와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협력 중인 국가 정보기관 소속의 요원이었다. 차은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와 동시에, 차은수에게 잘 지내고 있는지 묻는 메시지를 보냈다.
묘한 찝찝함이 피어올랐다.
***
주청경은 잠든 차은수를 내려다보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가이드는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자신의 흔적으로 가득한 몸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워,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기분 좋은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제 몸을 섞는 내내 차은수는 거부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쾌감에 굴했다기보다는, 명백한 연민이 그 이유에 가까웠다.
유쾌하지 않은 과거를 털어놓은 보람이 있었다.
주청경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과거를 회상했다.
쨍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는 익숙하다. 학교가 끝나고 돌아가면 늘 마주하는 소리였고, 그 원인이 되는 물건을 든 부친이 저를 위협하고는 했다.
‘넌 이 새끼야, 술 하나 못 사 와?’
‘…….’
‘빌어먹을…….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 네 엄마 돌아오기만 해 봐. 내가 가만 안 둬! 어?’
어쩌라는 거지.
주청경은 무표정하게 생각했다. 모친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아니. 부친 또한 마찬가지였다. 향락에 빠져 무책임하게 가정을 버린 어미와, 자식을 무자비하게 패는 아비. 끼리끼리 참 잘도 만나지 않았나.
그들 중 한쪽이 한쪽을 죽이건, 둘 다 죽건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을 터다.
‘…….’
부친의 숨통을 끊고 든 생각은, ‘이런 쓰레기들에게 복종하며 살아갈 또 다른 에스퍼들이 있지 않을까’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애당초 일반인들이 에스퍼들을 통제하는 사회 구조 자체가 문제지.’
장희강이 말했다.
그는 당돌하게 제 조직을 찾아온 미성년자 에스퍼를 흥미롭게 살피는 중이었다.
‘타인의 신체를 조종할 수 있다고.’
‘…….’
‘훌륭한 능력이야.’
흔쾌한 허가하에 주청경은 장희강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제 이념과 일치하는 조직의 논리에, 자신이 있을 곳을 찾았다고 여겼다. 장희강을 따르는 것에도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어떤 에스퍼의 능력도 통하지 않는 장희강은 범접할 수 없는 강자였으니까.
이후 주청경은 자신의 능력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깨우치고, 임무를 수행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망가지기 시작한 장희강을 직면했다.
조직 내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가이드는 장희강을 우선순위로 케어했다. 하지만 가이딩을 했다고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장희강과 같은 S급 에스퍼인 주청경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장희강이 구태여 가이딩을 받은 이유는 하나였다. 파장 상태를 그럭저럭 괜찮게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어서, 수하들의 사기가 저하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날도 평소와 같은 때였다. 장희강이 집무실로 가이드를 부르는 시간.
‘살, 려…….’
복도를 지나던 주청경의 과민한 청각에 누군가의 끊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청경은 그 근원지가 장희강의 공간이며,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위험 신호를 흘리는 음성은 그가 익히 아는 가이드의 것이었고, 조직 내에서도 개체 수가 적은 가이드는 보호하는 게 철칙이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주청경은 집무실로 향했고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
주청경은 가이드의 목을 조르고 있던 장희강과 눈이 마주쳤다.
멍하게 풀린 듯하면서도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였다.
이내 그것은 서서히 원상태로 돌아왔다.
‘이런.’
‘지금…….’
‘실수했네. 거슬려서 그만.’
태연하게 말한 장희강이 의식을 잃은 가이드를 소파에 눕혔다. 주청경은 입을 다문 채 그를 응시했다.
그 일이 시작이었다.
장희강이나 주청경에게는 무의미한 가이드도 급이 같은 에스퍼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수적인 가이딩을 제공하는 가이드를 죽이려 한 장희강의 행동에 불안감을 가졌다. 어찌 보면 충심을 변질시키기에 충분한 계기였다.
조직의 와해를 원치 않았던 주청경은 이인자로서 그들을 다독였다. 하지만 장희강은 술렁거리는 조직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가 저를 무조건적으로 따를 조직원들을 가릴 기회라는 듯, 폭압하기 시작했다.
‘배신자를 사살하는 일에는 동의합니다.’
주청경은 한 임무에 실패한 수하를 죽인 장희강에게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아니지 않습니까.’
‘완수율을 높이기 위한 과정이야.’
‘여태까지의 방식과 다릅니다.’
‘글쎄.’
장희강은 느긋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간 내가 너무 물렀던 것 같아서 변화를 좀 주려고 하는데, 문제라도 있나?’
묵색 눈은 분명한 경고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에 네 동의가 필요했던가.’
그로부터 불과 며칠 후, 장희강은 변절한 죄를 묻겠다며 보란 듯이 특정 조직원들을 모아 모조리 죽였다. 그들 대부분은 장희강이 가이드를 해치려 들었던 사건 이후부터 주청경을 따르기 시작한 에스퍼들이었다.
주청경은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장희강은 자신의 이상향을 일구어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신은 힘 있는 자의 사회를 바랄 뿐, 피아 구분이 없는 미치광이가 다스리는 사회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청경은 남아 있는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조직을 나왔다.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지만, 결국 현재처럼 자신만의 조직을 구성해 안착하는 일에 성공했다.
물론 장희강의 맹추격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끝이었다. 장희강도 차은혁을 위시한 정부 측 병력의 낌새를 알아차렸다면, 더 이상 이쪽에 힘을 들이지 않을 테니까. 모든 무력을 집결해 강화하겠지.
“…….”
주청경은 옆자리에 누워 규칙적인 숨소리를 흘리는 차은수의 볼을 쓰다듬었다. 소중한 것을 대하는 손길이었다.
자신이 장희강에게 거두어졌었다는 사실도. 그 장희강이 차은수의 친부를 죽였다는 사실도.
또한 장희강과 차은혁의 전력 충돌이 머지않았다는 사실 역시.
제 가이드는, 차은수는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
주청경은 품 안의 가이드가 그를 향한 감정을 키우는 데에만 몰두하게 만들 예정이었다. 다른 상념에 빠질 틈을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
또 전생의 내 모습이 나오는 꿈이다.
수많은 파티션의 중앙쯤에 위치한 자리에서 업무를 보던 내가 기지개를 켰다. 충혈된 눈으로 창밖의 캄캄한 밤하늘을 흘끗한 순간이었다.
‘어으, 추워.’
야근을 함께하던 동료가 패딩을 여미며 들어왔다. 흡연을 하고 왔는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자기 자리에 올려 둔다.
‘은수 씨, 언제까지 있게?’
‘글쎄요. 아직 모르겠어요.’
‘아이구, 우리 다 고생이다.’
동료가 흐물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다가 심심한지 내 쪽으로 와서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을 구경한다.
‘그나저나 은수 씨.’
‘네?’
‘안색이 많이 좋아졌어.’
함께 회사에서 늦은 시간까지 썩고 있는 이에게 할 법한 말은 아니었으나, 나는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지 멈칫하며 얼굴을 매만졌다.
‘그래요?’
‘응. 다들 요즘 우리 회사 비주얼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난리였잖아.’
‘하하.’
내가 민망한 듯이 웃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그냥, 어떤 게임에 푹 빠져서 매일 밤새 하느라 그랬던 거 같아요.’
‘게임? 무슨 게임?’
‘음…….’
‘아니다. 말해도 난 모를 거야. 게임에는 관심이 없어서.’
동료가 코끝을 긁적였다.
‘웹 소설 보는 게 취미거든. 아, 게임을 소재로 쓴 것도 꽤 많더라고.’
‘아하.’
‘즐겁게 하던 게임이 알고 보니 다른 세계라는……. 뭐 그런 설정의 작품도 있고. 흥미롭더라.’
‘웹 소설은 잘 안 봤는데……. 재밌겠네요. 제목이 뭔가요?’
내가 관심을 갖자 동료는 신이 나서 작품명과 더불어, 자신이 쓰는 웹 소설 플랫폼들까지 지나치게 친절히 알려 주었다. 웬만하면 다 기다리면 무료로 볼 수 있는 시스템인데, 결제를 한다면 대여와 소장이 있고, 방식이 여기는 어떻고 저기는 어떻고.
미소 띤 얼굴로 경청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저거 기계적으로 웃는 거다. 제목까지만 대충 들으려고 했는데, 제대로 붙잡힌 거지.
‘저도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요.’
‘어, 다녀와.’
겨우 풀려난 나는 사무실을 벗어나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한숨을 푹 내쉬며 버튼을 누른다. 올라가는 방향이었다.
‘…….’
옥상으로 향한 나는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한숨과 함께 스트레스를 날린다.
그러고는 이제 내려가야지, 하며 몸을 돌린 찰나였다.
우두커니 서 있던 거구의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시, 아, 깜짝이야.’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내가 화들짝 놀랐다. 반사적으로 상대를 면밀히 살피던 순간이었다.
시야가 일그러지면서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때, 조각 같은 꿈은 끝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