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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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수많은 지인을 잃은 충격이 컸는지, 차은수는 며칠 내리 기운이 없었다. 넋을 잃은 채 허공을 바라보기도 했다. 정신력이 약하고 강하고를 떠나서 누구라도 정신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했다.
하루는 발을 헛디뎌 집 안 계단에서 구를 뻔한 적도 있었다.
눈을 떼기가 걱정스러웠다. 차은혁과 심태성은 주인의 위태로움을 느낀 반려견처럼 그 곁을 맴돌았다.
그리고 오늘도, 테러 후로 몹시 바빠진 탓에 늦게 귀가한 차은혁이 자연스레 차은수를 찾았다.
방문을 열기 전이었다.
선득한 불길함이 심장을 스쳤다. 이 시간에는 잠들어 있어야 할 동생의 숨소리가 규칙적이지 않았다.
당장 안으로 들어간 그가 순식간에 침대 앞에 당도했다.
“……!”
그러고는 할 말을 잃었다.
동생이 웅크린 채 울고 있었다.
감은 눈에서 방울져 흘러내리는 눈물이 베갯잇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적셨다. 열이 올라 한층 붉어진 입술은 꾹 다물린 채 소리를 죽이고 있었고, 마른 등이 애처롭게 바들거렸다.
이내 기척을 느낀 듯, 눈꺼풀이 올라가며 물기 가득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형.”
우느라 가슴을 들썩이던 차은수가, 천천히 팔을 뻗어 왔다.
마치 제게 스스럼없이 안겨 오던 어린 시절처럼.
차은혁은 잠시 굳은 채로 그 모습을 응시했다. 숨죽여 우는 동생의 모습을 처음 맞닥뜨려 잠시 정지했던 사고가 빠르게 돌아왔다.
망설임 없이 침대로 올라가, 마른 몸을 끌어안았다. 품에 달라붙어 오는 체온이 따끈하게 높아져 있었다.
“나 때문이야.”
형의 가슴에 얼굴을 감춘 차은수가 웅얼거렸다.
“나 때문에 다들 그렇게 됐어.”
“……은수야.”
“내 주변 사람들 전부 그렇게 되어 버리면…….”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어머니랑 누나까지 잘못되면 어쩌지?”
“…….”
차은혁은 대꾸 없이 차은수의 머리에 입술을 묻었다.
호텔 사건이 본인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청경이라면 가이드를 납치할 계획이 아니었더라도, 장희강의 문제로 저를 불러낼 겸 결국 테러를 저질렀을 터였다. 어쩌면 그 시간 그 장소 그대로 말이었다.
하지만 차은혁은 설명하지 않았다.
“무서워, 형…….”
제가 바라 마지않았던 상황이었으니까.
의지할 수 있는 상대를 갈구하는 동생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이어 동그란 이마와 달아오른 눈가, 발간 입술에 차례대로 입을 맞추었다. 감정에 매몰된 차은수는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길들여진 동물처럼 얌전한 모습이 지극히 사랑스럽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차은혁이 나직이 물었다.
“말해 봐.”
“…….”
촉촉한 눈동자가 아프게 흔들렸다.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에도, 차은혁은 결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차은수가 입을 달싹였다.
“내가 여기 있으면 가족들도 위험해질 거야.”
눈물로 젖은 얼굴에 결심이 섰다.
“떠나야겠어.”
가능한 한 빨리.
대답을 들은 차은혁은 동생을 안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차은수가 어디를 가든, 당연히 자신이 함께일 것이다.
***
차은수의 기분 전환을 위해 온 가족이 시간을 내어 외식하던 중이었다.
차은혁이 덤덤히 말을 꺼냈다.
“은수와 나가서 살까 합니다.”
“……뭐?”
“뭐라고?”
차선정이 놀란 표정을 지었고, 차은세가 식기를 떨어뜨렸다.
“오빠 너, 별안간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일은 상상한 적도 없다는 듯 차은세가 떠듬떠듬 물었다.
“둘이 집을 나가겠다고?”
“……응, 누나.”
확답은 차은수에게서 흘러나왔다. 미안한 기색이 그득 담긴 얼굴이었다.
차은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모친을 돌아보았다. 당신께서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시라는 눈빛이었다.
차선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왜 그러려는 건지 얘기해 줄 수 있겠니?”
“예전부터 성인이 되면 그렇게 할 계획이었어요. 사실 혼자 독립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형이랑…….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정확한 이유를 털어놓지 않는 차은수의 모습에 차선정은 침묵했다.
친구들을 떠나보낸 비극에서 무얼 느낀 것인지……. 하필 이 시기에 집을 나가겠다는 선언이 매우 마뜩잖고, 불안했다.
하지만 차마 지난 사건을 언급해 상처를 들쑤실 수는 없었다. 아픈 아이에게 추궁하듯 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첫째가 함께라면…….
묵묵하게 앉아 있는 맏이와, 핏기 없는 막내의 낯을 번갈아 살폈다.
“엄마, 아니죠? 허락하실 거 아니죠?”
차은세의 초조한 목소리가 테이블 위를 날았다.
온몸으로 반대를 외치는 딸을 돌아보았다.
“은수도 다 컸다. 허락하고 말고 할 게 없어.”
“엄마……!”
“은혁이도 같이 지낸다잖니.”
“그래도, 우리 막내 매일 못 보게 되잖아요!”
울상인 둘째에게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은수야.”
차선정은 자신의 아픈 손가락에게 말했다.
“하지만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줬으면 좋겠구나.”
“말씀하세요, 어머니.”
“몸이 안 좋을 낌새가 보이면 바로 연락하렴. 네 형도 종일 집에 있는 게 아니니까.”
남들에게는 별것 아닌 듯 들릴 테지만, 이 자리의 구성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약속하지 않으면 혼자 미련하게 앓을 막내를 알기 때문이었다.
차은수가 가족을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경호원님도 계속 함께해 주실 거라서요. 걱정 마세요.”
“심태성 경호원 말이니?”
“네.”
차은혁의 입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차선정은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생각했다. 사람이 괜찮아 보이더구나.”
차선정은 심태성을 대면했던 때를 기억했다.
첫째와 알고 지내는 사이라더니 과묵한 점이 상당히 비슷했던 인물이었다. 미심쩍게 속내를 알 수 없는 분위기라기보다는, 신중하고 책임감이 강해 보이는 타입이라 호감이 갔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라 경호를 맡기기에도 제격으로 보였다.
애당초 가족들의 안전에 예민한 아들이 데려온 인물이니만큼 믿음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봐 둔 곳은 있니?”
이후 가족 간의 대화는 어디에서 지낼 예정인지, 날짜는 언제쯤으로 계획했는지 등에 관해서가 주를 이뤘다.
차은세만이 침묵을 지켰다. 굉장히 섭섭하지만, 최근 힘들었던 동생에게 우는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차은수가 본가에 자주 오겠노라며 그런 누나를 부드럽게 달랬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에는, 다 함께 인근 프라이빗 라운지로 향했다.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린 듯한 차은세가 차은수에게 필요한 것들을 물어보는 동안, 차선정과 차은혁은 창가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은혁이 네가 함께 생활한다니 안심이야.”
차선정이 조용히 운을 뗐다.
“너한테는 항상 고마움뿐이란다.”
차은혁은 별다른 대꾸 없이 경청했다.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가고, 내가 많이 힘들었을 때……. 못난 나는 물론이고 동생들까지 전부 네가 챙겨 주었지. 너도 어린 나이였는데 말이다.”
괴로웠던 시절을 떠올리는 차선정의 얼굴에 회한이 서렸다.
“특히 은수와 네 사이는 참 각별했어. 지금도 그렇고.”
“…….”
“……언젠가 이유를 말해 줄 거라고 믿어도 되겠니?”
며칠 전부터 아들들 사이의 묘한 기류를 읽은 모친은, 그것과 둘이 분가하려는 것에 연관성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에 대한 설명을 훗날에라도 들을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당장 캐묻지 않는 인내 정도야, 늘 부채감이 드는 맏이에게 베풀고도 남기에.
“어머니.”
그때, 차은수가 칵테일 잔을 들고 나타났다.
“누나 좀 말려 주세요.”
저만치 남겨 두고 온 차은세를 눈짓으로 가리킨다. 차은세는 거의 들어갈 기세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가구에, 차에, 어째선지 요트까지……. 너무 이것저것 보고 있어요.”
난감한 차은수의 표정에 차선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있어 보렴.”
차선정이 몸을 일으켜 둘째에게로 향했다. 차은혁은 제 옆자리에 앉는 차은수를 뜯어보았다.
알코올이 들어간 동생의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차은세가 일부러 차은수에게 술을 쥐여 주었음을 알아차렸다.
그 의도대로 잠깐일지라도 우울함을 떨친 듯한 모습에, 차은혁이 차은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형?”
“그냥.”
차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아직 음주 경험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묘하게 익숙한 태도였다.
“몇 잔 마셨어.”
“아……. 이거? 모르겠는데.”
“…….”
차은혁은 고개를 돌려, 차선정이 걸어간 곳을 보았다.
한 소리 하려던 모친을 앉히고 무언가를 떠들어 대는 여동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에 주르르 나열된 빈 잔들도.
그새 많이도 비웠다.
“누나도 같이 마신 거야.”
형의 눈길이 어디를 향했는지 깨달은 차은수가 변명했다.
“그리고 도수 약할걸. 나 안 취했어.”
동생이 취객의 단골 대사를 흘렸다. 차은혁은 차은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조금 더 마시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지친 정신을 술기운에 기대는 것이 좋지만은 않겠지만…….
오늘처럼 같이 있는 날이라면 괜찮지 않나.

জীয়াই থাকি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