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척이 느껴졌다. 건물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에스퍼들이 뒤쪽을 돌아보았다. 방탄복을 착용한 남자 두 명이 실내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가려진 상태라 얼굴을 알 수 없던 둘 중 한 명이 고글을 올려 눈을 드러냈다.
경비들은 그가 조직의 위계상 저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이었기에, 곧바로 각 잡힌 인사를 건넸다.
그게 전부였다.
나가시냐는 둥, 어디 가시냐는 둥 질문들은 불필요했다. 복장으로 미루어 보아 주청경이 내린 명령을 받고 나가는 게 틀림없었으니까.
그들의 임무는 외부인의 출입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이지, 관계자들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상 상황이 아니고서야.
얼굴을 노출한 사내와,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한 명은 경비들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머지않아 죽 늘어선 차량 중 하나에 올라탔다.
“…….”
“…….”
황량한 땅을 벗어나자 나무들이 듬성듬성 나타나더니 빼곡해졌다. 그 틈의 길로 들어선 이후에야 다른 한 명도 고글을 벗었다. 긴장감에 막혔던 숨을 길게 내쉬는 낯이 햇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불안불안한 시간 속에서도 눈부신 가이드의 미안이 시선을 앗았다. 그를 돌아본 운전석의 에스퍼가 핸들을 강하게 쥐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이건 미친 짓이었다.
진심으로 충성해 왔던 인물을 배신하고, 고작 몇 초 동안 말을 섞은 존재를 도피시키고 있다니.
게다가 설령 이대로 떠나는 것에 성공하더라도 주청경은 누구에 빙의해 언제 나타날지 몰랐다. 주청경의 능력과 정보력은, 심복보다는 아니어도 꽤 오래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봐 왔던 저이기에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자신은 이 가이드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었다.
생전 처음 겪어 본 느낌은, 어떻게 표현해도 부족했다.
불완전한 인생이 완전해진 기분이라고 한다면 그나마 비슷할까.
애욕, 독점욕, 그리고 그것들을 뛰어넘는 숭상심. 한순간에 잇따르는 감정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그는 주청경이 왜 직접 나서서 차은수를 납치해 오기까지 했는지 절실히 체감했다. 그건 감히 거부할 생각조차 갖지 못하는 불가항력의 압도적인 가이딩이었다.
초조하게 백미러를 흘끗거리며 입을 열었다.
“가다 보면 절벽이 나올 겁니다.”
“……!”
놀란 눈길이 향해 왔다.
“흔적을 끊는 게 중요하니까요. 능력을 사용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능력은 부유였다. 비포장도로로 진입해 차량을 공중에 띄워 절벽을 건넌다면, 추적 면에서 그나마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두려운지 입술을 꼭 깨물던 차은수는, 이내 자신을 도와주는 그를 믿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계속 달리던 차가 머지않아 거칠게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차체를 이리저리 긁혀 가며 나무 사이사이를 통과하자, 이윽고 절벽이 나타났다.
아찔한 높이에 차은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가 두 눈을 꽉 감은 순간이었다.
끼이이이익!
차가 급정거를 했다. 몸이 격하게 앞으로 쏠렸다. 타이밍을 맞추어 뻗어 온 팔이 차은수의 몸을 좌석에 고정시켰다.
차은수는 제 상체를 가로막은 팔을 반사적으로 붙들며, 다시금 눈을 떴다. 그들은 절벽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멈추어 서 있었다.
“……다정하게 대해 주고 싶었는데.”
싸늘한 목소리가 말했다. 아까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차은수가 헉 숨을 들이켜며 굳었다.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돌리자, 에스퍼의 그늘진 표정이 시야에 들어온다.
주청경이었다.
“데려온 지 얼마나 됐다고 도망을 치네.”
에스퍼의 육체를 차지한 그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공포로 물들어 가는 가이드의 얼굴에 눈길을 고정하고서.
주청경은 헛웃음이 나올 것 같다.
탈출이라니.
얌전히 따라나섰기에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조직원을 구슬려서 말이다.
아니, 구슬렸다기보다는…… 홀린 건가.
예열이 끝난 지 오래인 분노가 불쾌하게 지글거리며 뇌를 녹이기 시작했다.
“흡……!”
비록 도망칠 의도로 써먹은 것일지라도 차은수가 타인에게 가이딩을 행했다는 것이, 그리고 제법 아끼던 수하가 그걸 받아먹고 눈이 돌아가 도주를 도왔다는 사실이 주청경을 더욱더 격노토록 만들었다.
자신이 빼앗은 몸을 향해 내뿜는 살기가 차내를 가득 채웠다. 그에 숨통이 틀어막힌 차은수가 질식할 것 같은 기색으로 파들거렸다.
주청경은 당장 들끓는 감정을 해소할 방식을 결정했다. 그것은 자신에게서 벗어날 생각 따위를 한 가이드도 교육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행동이기도 했다.
별로 선호하던 방식은 아니지만.
조끼 안쪽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이어 차은수에게 보란 듯이 번뜩이는 날을 스스로의 목에 겨눴다.
무엇을 하려는지 노골적으로 예고하는 모습이었다.
“……! 잠, 잠깐……!”
차은수의 눈이 경악으로 한껏 커졌다.
그러고는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어 막아 보려 들었다. 하지만 그 다급한 손길이 미처 닿기도 전에…….
주청경은 가차 없이 손을 움직였다.
“아아악!”
차은수가 비명을 질렀다.
에스퍼의 상체가 기우뚱하더니 차창 쪽으로 쓰러졌다. 선혈이 쏟아지는 광경과 비릿한 냄새에, 청년이 까무러칠 것처럼 물러났다.
곧 그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구역질을 참았다.
“욱…….”
충격과 겁에 질린 눈동자가 습해졌다. 불안정한 호흡에 어깨가 크게 오르내렸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셔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았다.
퍼뜩, 청년은 비어 있는 손을 벌벌 떨면서도 뻗었다.
“…….”
상대에게서는 숨소리도, 맥박도 잡히지 않았다. 방대한 출혈량을 비롯한 모든 상태가 즉사를 가리키고 있었다.
차은수는 도망치듯 차 문을 열고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냉혹한 겨울 공기가 온몸에 들이닥쳤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려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바로 밑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흐읍……. 윽…….”
눈물을 뚝뚝 흘리는 눈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추락한다면 약해 빠진 제가 살아남을 확률은 낮았다.
아니……. 죽을 것이 확실했다.
“…….”
하지만, 죽음 또한 회피의 일종이다. 당장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 중 한 갈래였다.
차은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과연 살아서 버티다 보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올까.
물론 형이라면, 뒤늦게라도 납치 소식을 접한 즉시 나를 구하러 오겠지.
근데…….
만약 그러다가 형까지 위험에 처한다면?
주청경은 무서울 게 없어 보이는 존재였다. 아군이었던 조직원도 일말의 머뭇거림 없이 처단하는 성정을 갖추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했다.
청년은 재기 불능으로 보일 만큼 다쳤던 심태성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게 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친구들도 죽었고, 다 나 때문에…….
평생을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만 살아왔던 그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었다. 눈꺼풀을 스르르 내리자 맑은 액체가 차게 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안해, 형.
그가 충동적으로 허공에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은수 씨.”
단단한 팔뚝이 뒤에서부터 그를 감싸 왔다.
“자꾸 이렇게 자극하면……. 곤란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라앉은 음성이 귓속에 흘러들어 왔다.
***
역시 돌아 버린 범죄자 새끼.
면전에서 잔인하게도 죽인다.
즉석에서 벌어진 그 살생의 현장에서, 곧바로 토하지 않은 나 자신이 용했다.
주청경은 배신자의 말로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수하를 처단하는 일과, 내가 앞으로 누군가를 이용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걸 동시에 해결한 셈이었다.
놀라운 점은 또 있다.
일반인한테만 빙의가 가능한 줄 알았더니 같은 에스퍼한테도 가능했던 것.
도주를 도왔던 에스퍼가 그에 관해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눈치였던 걸 헤아려 보면, 아마 주청경은 이 사실을 측근들에게도 감추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수하들이 저에게 몸을 빼앗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끔 하는 장치의 의미로 드러내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고. 자기들한테는 능력 적용이 안 되니 안심하고 저를 따를 수 있게.
언제고 자기 몸을 뺏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대부분 찝찝해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이유는 그뿐만이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빙의한 대상의 특성에 따라, 능력의 부작용 강도가 정해지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정신 방벽 내지는 일반인 여부 등과 관련해서 말이었다.
분명 첫날의 가이딩으로 상태가 많이 좋아졌던 주청경의 파장이, 아주 낮은 등급은 아닌 듯했던 에스퍼한테 빙의한 이후 끔찍이도 꼬였기에 그렇게 추측이 섰다.
아, 파장은…….
당연히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아흐윽……!”
우악스러운 손길에 잡혀 뒤로 꺾인 내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엉망이 된 지 오래였다. 엎드린 채 주청경의 흉악망측한 대물을 받아들이는 몸이 멀미가 날 정도로 흔들렸다. 애처롭게 흐느끼면 흐느낄수록 좆은 더욱 부풀었다.
“하읏, 으으응!”
내 몸이 고장 나 버려도 상관없다는 양 학대하듯 좆질이 자행된다. 퍽퍽퍽. 듣기만 해도 아픈 소리가 실내에 울렸다. 사나운 움직임을 이기지 못한 침대가 강력한 진동 기구라도 올려 둔 것처럼 미친 듯이 출렁였다.
“하아…….”
주청경이 고개를 숙여 내 목선을 입술로 훑었다.
“너무, 조이잖습니까. 남자 자지가, 큿, 그렇게 좋아요?”
마구 박아 대는 하체와 다르게 냉한 기운이 감도는 목소리가 나를 희롱해 왔다.
……내가 절벽에서 투신하는 줄 안 주청경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