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알고 지내던 기업 오너의 손자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접한 유석헌이 형식적인 위로차 연락을 했다. 괴물은 상대를 가려 가며 덮치지 않는다. 공습으로 발생한 희생자 중에 가족이나 지인, 또는 지인의 소중한 존재가 포함되어 있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침울한 분위기의 상대와 그리 길지 않은 대화가 오갔다.
의원실에 들어선 유석헌은 핸드폰을 내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탁상에 못 보던 물체가 있었다.
그 근처로 가까이 다가가자 곱게 놓여 있는 작은 상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규정상 아무 물품이나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유석헌은 본인이 확인해야 하는 물건이라고 판단했다.
“…….”
상자를 열어 보았다. 내부에 들어 있던 것은 불투명한 고글이었다. 의아한 낯으로 그것을 집어 든 찰나였다.
삐빅, 삐빅. 희미한 기계음과 함께 프레임의 중앙부에서 파란 불빛이 반짝였다. 인체와의 접촉을 감지한 기기가 작동하는 것 같았다. 불빛이 길게 쏘아지더니, 허공에 여러 장의 사진을 띄웠다.
유석헌이 숨을 들이켰다. 낯빛마저 허옇게 질렸다.
업무를 보고 있는 상황부터, 사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 상황까지. 시간대별로 정리가 된 사진들은 대다수가 유석헌을 담고 있었다. 비서관이나 보좌관, 가족처럼 무척 가까운 곳에 있었던 존재가 아니고서는 거리나 각도상 촬영이 불가능했을 사진들이었다.
“빌어먹을, 이게 뭔…….”
당혹스러움과 섬뜩함으로 욕설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떨리는 눈동자를 굴려 가며 사진들을 보던 유석헌이 멈칫했다.
하단부에 위치한 사진 속 인물은 그가 아니었다. 사망한 상태로 추측되는 남자는 분명 대면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자신들이 잠입 임무를 맡겼던 정보원이 아닌가.
유석헌은 고글을 책상 위로 내던졌다. 불빛이 픽 꺼지며 사진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머릿속에 주청경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소름이 주욱 끼쳤다.
주청경의 능력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이는 적지 않았다. 타인의 육체를 차지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꺼림칙한 힘인가.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를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두고, 물리적인 힘보다도 정신적인 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주청경을 위험한 존재라며 입을 모았다.
하지만 주청경이 그 힘을 인명 구조에 사용함으로써, 불안해하던 여론은 서서히 잠잠해졌다. 주청경의 위치는 선인이다. 아무리 위협적인 능력을 보유했어도 그것을 이용해 괴물로부터의 생존을 돕는 이를 몰아내려 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특히나 요즘처럼 습격이 늘어난 시기에는 더더욱.
그렇게 우러러지던 영웅이, 자신의 주변에 감쪽같이 녹아들어 경고했다. 함부로 들쑤시지 말라고. 네 목숨을 사진 속 누군가처럼 잔인하게 끊는 것쯤은 일도 아니라고.
경고의 대상은 유석헌만이 아니었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전부 잠재적인 표적으로 삼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유석헌은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와 동시에, 주청경이 이렇게까지 나오는 이유를 가늠했다.
선을 넘은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인가.
혹은, 실제로…… 드러나서는 안 될 비밀이라도 존재하기 때문인가.
***
심태성을 현혹해서 가이딩에 성공한 당일, 나는 기절해 뻗은 것이 아니라 지쳐서 잠이 들었다. 심지어 그것도 섹스가 힘들어서는 아니었다. 거칠게 뒹구는 데엔 도가 튼 내가 감질날 정도로 부드러웠던 관계에 나가떨어졌을 리가.
파장 상태가 극악에 가까운 상대를 가이딩한 데다가, 딱 몸이 기분 좋게 녹아내릴 정도의 쾌감을 느껴서 몇 번 가지도 않고 잠에 빠졌던 것 같다. 아주 제대로 숙면을 취했다.
눈을 떴을 때는 심태성이 미지근하게 젖은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 주고 있었다. 이미 가이딩한 마당에 왜……. 설마 손 안 닿게 하려고 이렇게 닦아 주는 건 아니겠지.
떨떠름하게 생각하던 와중에 시선이 마주쳤다.
“일어나셨습니까.”
“…….”
“더 주무셔도 됩니다.”
심태성이 수건을 치우고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나는 입을 다문 채 심태성을 쳐다보았다.
“……혹시 몰라서 다시 말씀드리는데.”
뒤늦게 말문을 열었다. 푹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원해서 한 거예요.”
심태성이 멈칫했다. 단순히 그가 죄책감을 품지 못하게 하려는 의미에서 꺼낸 말이 아님을 눈치챈 얼굴이었다. 아주 미약한 가이딩에도 속수무책으로 휩쓸릴 만한 상태였던 저를 내가 함락시킨 행위에 대해, 이미 제 나름대로 해석을 마친 상태인 것도 같았다.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여태 지독히 휘둘렸던 내가 잠시나마 그를 휘두르는 것으로 심리적인 보상을 얻으려 했다고? 아니면, 그저 폭력적인 섹스가 아닌 다정한 섹스로 나쁜 기억을 덮어 버리려던 것처럼 보였으려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기는 한데.
“예.”
심태성이 복종하듯 대답했다.
“도련님께서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라는 상황에 맞추어 대꾸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언행만 보면, 내 쪽에서 원하지 않으면 손끝조차 대지 않는 태도를 고수할 기세라는 뜻이다.
철저히 내 의사에 따라 행동하려는 모양인데……. 어쨌거나 심태성도 납치범의 입장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심태성의 태도에 나약함이 울컥 치솟은 표정을 지었다. 이내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워, 울음을 참으며 어깨를 떨었다.
심태성이 손을 뻗어 오다가 머뭇머뭇 내리는 모습은, 뒤통수에 눈이 달리지 않았어도 훤히 보였다.
이전까지와 같은 듯 묘하게 다른 고요한 생활이 이어졌다. 심태성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 어떤 욕구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나를 유심히 살피는 행위는 더욱 심해졌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하면 이미 물이 담긴 잔이 준비되어 있었고, 욕조 안에서 근육을 풀며 죽은 듯이 오래 있다 보면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보살핌과 집착 사이의 애매한 행동이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부담스러워하거나 숨 막혀 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는 속내가 간혹 엿보였다.
“……도련님?”
원래는 그가 욕실 문에 대고 노크를 하면 나는 느릿느릿 일어나서 몸을 한 번 더 헹구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나 오늘은 욕조 안에서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자, 바깥에서 재차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
계속 대답이 없으니 불안해졌는지, 심태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단숨에 내 근처로 다가온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순량한 얼굴이 걱정을 담은 채 굳어 있었다. 타일에 무릎을 꿇은 그가 내 만면을 뜯어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멀쩡하다는 것쯤은 육안으로 파악이 될 테다. 나는 그를 마주 보았다.
“경호원님.”
그리고 들어 달라는 태도로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저는 그냥, 일반인이었어요.”
“…….”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직장인이었죠.”
내가 차은수로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였다.
“소소한 취미로 플레이한 게임 속 세상이 또 다른 현실이라는 건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을 만큼이요.”
심태성의 두 눈이 커졌다.
“아니. 사실 이상한 걸 아예 못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분명 게임인데도, 왠지 제가 그 세계에서 사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때는 이게 게임 중독인가 싶었죠.”
떨리는 목소리로 우스갯소리를 던지며 눈을 깜빡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거예요.”
심태성은 별다른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 장희강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을 정보였으니 말이다. 나는 심태성의 표정을 읽으면서 그에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역시 경호원님도 아시는구나.
“이후에 저는 죽었고 차은수로 태어났어요.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한 채로. 제가 플레이를 시작했던 시점에서도 한참 전인 과거에서요.”
“……!”
심태성은 현재야 시스템이 시간을 돌리기 전과 후를 모두 기억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위화감조차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그랬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다들 이렇게 여겼으니 나를 더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거겠지. 특히 형이.
“그리고 형을 만나러 경호원님과 떠났을 때.”
나는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괴로운 기억을 입 밖에 내었다.
“정신을 잃자마자, 제가 원래 살았던 세계의 시스템이라는 존재를 만났죠. 각 세계에 있는……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했어요.”
“…….”
“그 시스템은 저한테 모든 기억을 돌려주고 진실을 알려 줬어요.”
등급 높은 가이드의 혼을 지닌 나를 너희 세계 시스템이 노렸고, 처음에는 게임이라는 통로를 만들어 내가 플레이어의 위치에서 너희를 가이딩할 수 있게 유도했다. 하지만 한계가 존재하자 영혼을 납치했던 것이었다. 기억도 싹 지워 버린 채로.
거짓이 섞이기는 했지만 대부분 진실인 내용을 전달하며, 나는 내가 인외의 존재에게 피해를 입은 가련한 영혼임을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 그때의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처럼 어깨를 떨자, 심태성은 어떠한 말도 섣불리 꺼내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원래의 내 몸이 죽지 않았다고, 돌아갈 수 있다고 하는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땐 모든 게 힘들어서 돌아가겠다고 하고 싶었어요. 거긴 에스퍼도 가이드도 없는 평화로운 곳이었으니까요.”
“도련님.”
심태성이 차마 나를 건드리지는 못하고 욕조를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