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적으로, 설전의 결과는 형의 승리였다. 형에게 나는 본인을 염려하는 상대의 의견을 계속 묵살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마뜩잖은 태도로 물러서자 형은 눈에 띄게 안심했다.
내 머릿속에 든 계획도 모르고.
정보는 지닌 사람이 적을수록 새어 나갈 위험이 적다며, 어머니와 누나에게마저 비밀로 하기를 강요한 형이 순진해 보일 따름이다.
씻는 걸 돕겠다는 형을 만류한 뒤 샤워를 하고 간단히 식사했다. 이후에는 거실에 자리를 잡고서 손을 맞잡은 채 담소를 나누었다.
원래 내 앞에서는 그랬지만, 확실히 손만 잡아도 좋은 것인지 표정이 평소보다 더 유했다. 어떤 느낌일지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입장이 되어 보지 않는 이상 나로서는 결코 모르겠지.
그러다가 밖에서 만났는지 나란히 돌아온 어머니와 누나를 맞이했다.
“오셨어요, 어머니. 누나도 어서 와.”
“우리 막내!”
피곤에 찌든 누나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러나 금세 깜짝 놀란다.
“뭐지? 안색이 나쁜데.”
“은수 어디 아프니?”
어머니도 나를 살펴보았다.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아뇨, 전혀요.”
하지만 어머니는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워낙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잦은 나였기에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급기야 진위를 가려내듯 형에게 시선을 던진다. 형은 묵묵히 어머니로부터 외투만 받아 들었다. 나는 어머니의 어깨를 감싼 채 소파로 이끌었다.
“출장은 잘 다녀오신 거죠?”
“그럼.”
누나도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왔다. 내 옆에 앉은 형을 마지막으로 온 가족이 착석했다.
어머니에게는 이번에 다녀온 영국에서 어땠는지, 밤샘 근무를 한 누나의 컨디션은 얼마나 안 좋은 건지, 화제가 내 몸 상태로 돌아오지 않도록 이것저것 나서서 물어보았다. 사뭇 어설픈 대화 주도였다.
“…….”
“…….”
그것을 느낀 누나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치가 비상한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래도 과묵하지만 오늘따라 말이 더 없는 형에게도 뭔가 있다고 여겨졌는지 우리 형제를 번갈아 응시해 온다.
“너희…….”
“설마 둘이 싸웠어?”
물어보면서도 그럴 리 없다는 기색들이다. 다들 형과 내가 마찰 한 번 없이 살아왔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원체 애정 표현이 드물지만 내게는 유독 자상한 형. 그런 형을 잘 따르는 나. 누가 봐도 두터웠던 우애가 어제부로 다른 의미로도 끈끈해진 사실을 저 두 사람이 알게 된다면, 막장 드라마의 OST가 어울릴 법한 상황이 연출될 것이었다.
뭐, 그래도 결국에는 받아들이지 않을까.
긴 시간 동안 고통받아 온 맏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데.
그 상대가 설령 같은 가족, 사랑을 듬뿍 주며 키운 막내여도……. 에스퍼와 가이드라는 정형은 어쩔 도리가 없지 않냐며 힘겹게나마 납득할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만큼의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솔직히 오빠랑 은수가 틀어지는 건 상상이 안 가는데……. 지금 분위기가 좀 묘하단 말이야. 무슨 일 있긴 있었지?”
누나가 애매한 낯으로 재차 질문을 던져왔다.
형과 나는 동시에 침묵했다.
가족들에게도 내가 가이드로 발현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기로 했지만, 우리 둘 모두 거짓말에 능한 성격은 아니라 그저 함구하는 것으로 대신한 셈이었다.
어머니와 누나가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당사자들이 내막을 털어놓지 않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이어진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오히려 좋은 게 좋은 거겠거니 하는 얼굴들이 되었다. 평소보다 훨씬 심하게 나를 챙기는 형의 태도를 맞닥뜨렸기에.
조용히 극성부리는 게 이런 걸까. 나는 자기 몫엔 손도 대지 않고 내 밥에 반찬을 올리는 형을 말렸다.
“잠깐만, 형. 내가 알아서 먹을게. 형도 먹어야지.”
“그래.”
가짜 어미 새를 진짜 어머니가 다소 얼떨떨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누나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흘끗거린다. 아까 형이 샤워시켜 주겠다던 걸 제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경악할 듯싶었다.
띠링!
……어?[부가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에스퍼들의 성적 판타지를 실현해 주자!단순히 가이딩만을 위한 삭막한 관계는 재미없죠. 만족스러운 관계를 통해 가이딩의 효율도 높이고, 차은수 님께서도 제대로 즐겨 보시는 건 어떨까요?성공한 대상과의 신체 접촉 시, 가이딩 및 양방이 느끼는 쾌감이 증폭됩니다.]퀘스트 팁이 주어집니다.][각 에스퍼별 선호 섹스 키워드차은혁: 욕조, 수면, 강제...*공통 키워드: 다섯 시간 이상]
허……?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시스템 창들을 한참 쳐다보다가, 형을 돌아보았다.
어머니와 덤덤하게 얘기 중이었다.
“은혁이, 저번에 교체해 준 인이어는 불편한 점 없고?”
“네. 팀원들도 적응해서 편하게 잘 쓰고 있습니다.”
“다행이구나. 아직 출시 전이니 피드백 생기면 바로바로 전달 부탁한다.”
욕조, 수면, 강제…….
다섯 시간 이상…….
형의 성생활이 어떨지까지는 관심을 두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키워드들이 형과 썩 어울려 보이지는 않았다. 근데 연애도 안 해 본 걸로 아는데.
아마 본인도 인지하지 못한 성향이 아니려나.
어찌 되었건 간에 음, 여러모로 놀랍다.
“은수야?”
누나가 의아한 어조로 내 주의를 끌었다. 퍼뜩 누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응?”
“갑자기 되게 멍해 보여서. 머리 아픈 건 아니지?”
“아……. 괜찮아, 누나.”
너무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어 머쓱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형 또한 바로 말을 끊고 나를 살폈다.
“어디가 불편한데.”
눈썹을 찌푸린 형이 낮게 물어왔다. 나는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부정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멀쩡해.”
“그럼 몇 숟갈 더 들렴.”
“배가 불러서요.”
“겨우 그거 먹고?”
쏟아지는 걱정 세례에 거의 의자 밑으로 침몰될 지경이었다. 내가 늦둥이라 그런지 다들 옛날부터 한결같은 과보호 기질을 보인다.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마는.
가족들에게 고개를 약하게 흔들어 보이면서,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마음에 안 드는 키워드가 없잖아.
형, 나랑 생각보다 더 잘 맞겠는데?
***
밤이 깊었다.
긴 바깥 일정이 끝나고 귀가해서 고단할 텐데도, 서재에서 업무 관련 대화를 나누던 모녀가 드디어 헤어져 각자의 침실로 향했다. 이 시간까지 형제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한 채로.
잠을 청하느라 누이와 모친의 기척이 잠잠해진다. 차은혁이 침대 근처에 앉은 자신 쪽으로 몸을 돌리고 누운 차은수의 뺨을 매만졌다. 사랑스러운 막냇동생은 잠든 지 오래였다.
가족들 앞에서 끝까지 멀쩡한 척을 했던 차은수의 컨디션은, 기실 결코 좋지가 않았다. 식욕이 없는지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고 움직일 때마다 어지러움에 시달리는 게 뚜렷하게 보였다.
그에 수액이라도 맞게 할 생각이었으나, 어머니와 누나에게 걱정 끼치기 싫다는 본인의 거부에 결국 주치의를 호출하지 못했다.
차은혁은 버거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기다려 줘.”
네가 낫는 대로 돌아올 테니.
동생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그는 내일 진행할 검사를 대비해 파장을 스스로 헤집어야만 했다. 그럼 추후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제처럼 이성을 잃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더욱 심각하게 날뛸지도 모르고.
이미 차은수의 가이딩을 경험했으니까.
접촉하지 않는다 해도 이 말간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달려들 확률이 높았다.
물론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대한 본능을 제어할 테지만, 과연 뜻대로 될까.
혹시 모를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동생은 최대한 컨디션을 회복하는 게 맞았다. 몸이 이토록 약해진 상태에서 또다시 가이딩을 빼앗기기라도 한다면, 그때야말로 생명이 위험한 수준에 이를 수도 있으므로.
그래서 차은혁은 또 밤을 새우지 말고 방으로 가서 자라는 차은수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오전에 떠나면 차은수가 회복하기 전까지 며칠간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라, 최대한 곁에 머물고 싶었던 것이다.
“…….”
그렇다면 어째서 이를 미리 차은수에게 경고하지 않았는가.
간단하다.
제 은밀한 욕심 탓이었다.
그는 자신도 이럴 줄 몰랐다는 이유로, 차은수를 완전히 탐하고 싶었다. 동생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제 흔적을 남기고, 저 또한 동생의 가이딩으로 온통 물들기를 원했다.
그런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조차, 그 순간을 기대하는 부도덕한 설렘으로 뒤덮여 버릴 만큼.
“내가…….”
어떠한 충동이나 필요에 의해 사람들을 죽여 대던 사내가 다시금 떠오른다.
내가 놈과 다를 게 뭐지?
원하는 걸 어떻게든 얻어 내려는 나 역시 괴물이 아닌가.
좋은 형인 척, 소중히 여겨 주는 척하면서 사실은……. 그렇게 굴어서 나를 내치지 못하게 만드는 거다.
속이 울렁거렸다.
“미안하다.”
차은혁은 끝없이 자조하면서도, 제 욕망을 받게 된 어린 형제에게 또 한 번 사죄했다.
당연하게도 수면에 빠진 상대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참으로 일방적이라 더 우스운 패턴이었다.
동생의 작은 숨결과 손이 주는 온기에 기대어, 차은혁은 자신이 어디까지 추악해질지를 가늠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