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잃은 사이 어딘가로 옮겨졌거나, 어떠한 일을 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많은 경우의 수를 헤아리며 눈을 떴다.
그리고 낯설지 않은 장소를 대면했다.
“…….”
먹물에 잠긴 듯한 공간.
원래 세계의 시스템이 다시금 자기 영역으로 나를 불러낸 것이다.
자꾸 기절했을 때 데려오는 이유가 뭘까. 정신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영혼을 빼 올 수 있기라도 한 건가.
영혼 상태인 것으로 추측되는 몸을 내려다보던 순간이었다.
띠링!
익숙한 효과음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곧장 허공에 시스템 창이 떴다.
[■■■를 ■■하시겠습니까?]
……또다.
또 같은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입을 다물고 창을 쳐다보았다.
“퀘스트……. 포기할 거냐고 묻는 건가요.”
한 박자 늦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창이 사라지고, 정적이 흘렀다.
아무리 기다려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
그때 문득, 다른 말을 나한테 전할 수 있었으면 진즉에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 세계의 시스템은 따로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 나를 불러낸 원래 세계의 시스템은 이곳에서 허락된 권한이 거의 없어서,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고민 끝에 재차 입을 열었다.
“제 말이 맞으면 창을 세 번 깜빡여 주세요.”
퀘스트 창이 깜빡였다.
정확히 세 번이었다.
“혹시 지금 여기서 그러겠다고 하면, 바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나요?”
깜빡, 깜빡, 깜빡.
나는 잠시 침묵했다.
내 짐작이 맞았구나.
원래 세계의 시스템이 나를 데려가려고 한다던 이 세계 시스템의 말도 틀린 게 아니었어. 이런 방식으로 데리고 빠져나갈 수 있는 거였다니.
……근데 원래 세계의 나는 죽었잖아.
저승에라도 가게 되는 건가.
그리고, 내가 돌아가게 되면 이 세계는…….
‘저희에게는 차은수 님이 필요해요.’
‘아마 차은수 님께서도 아실 테지만……. 이제 네 명 다 차은수 님 없이는 견디지 못할 거예요.’
간절했던 시스템의 목소리를 곱씹었다.
내가 떠나면 S급들이 모두 죽는다. 이후 세계가 소멸한다. 그게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과정이겠지.
형, 심태성, 주청경, 장희강.
누나와 어머니까지도.
모두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죽는 상황을 상상했다.
“…….”
시발.
절대 안 될 일이다.
돌아가야 할 이유보다, 돌아가지 않을 이유가 너무도 명확했다.
물론 내 두 번째 삶이 이 세계 시스템의 설계로 정해졌다는 사실은, 굉장히 꺼림칙하고 거부감이 들었다. 잠깐이지만 분노마저 솟구쳤었고.
그러나 시스템은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신이 내 영혼을 납치하고 앞일을 짰다고 해서, 한낱 인간인 내가 뭘 어쩔까.
지금 이곳에서 퀘스트를 포기하고 돌아가면 엿을 먹이는 셈이니 복수 정도는 되겠으나…….
“죄송하지만,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시스템 창을 상대의 눈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며 말했다.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돌아가면 이쪽 세계가 없어진다고 들었거든요. 저는 제 가족이, 사람들이 죽는 걸 원치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