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적 표현 없이도 형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원래 그런 말을 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과, 과거에는 그나마 순애에 가까웠을 감정이 걷잡을 수 없게 일그러졌다는 사실도.
세뇌에 가까운 고백을 받으며 잡아먹히는 기분으로 섹스했다. 그러다 형의 품에서 기절하듯이 잠들었는데……. 아마 형이 뒤처리를 해 주면서 내 몸을 씻기지 않았을까.
노곤하면서도 묘하게 달아오른 몸을 느끼며 눈을 떴다.
“……!”
뭐야, 여기.
당황스러운 얼굴로 눈을 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형의 집에서 머물렀던 방은 아무리 밤중이어도 이렇게까지 어둡지 않았다.
시스템을 만났던 공간이 떠올라서 일순 손발이 차게 식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곳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손목과 발목은 빳빳한 줄로 묶여 있었고, 입에는 재갈 같은 무언가가 물린 상태였다. 심지어 바닥으로 추정되는 딱딱한 곳에 형편없이 쓰러져 있었다.
시발,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할 상대라면…….
‘웬만하면 제 뜻에 따라 주세요.’
‘최대한 막돼먹지 않게 굴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너구나.
튀어나오려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때였다.
희미한 기계음과 함께 시야가 환해졌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으, 눈부셔.
철컹, 문이 요란하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얼마나 붙어먹었으면 지금 일어나요.”
익숙한 쓰레기 같은 말투, 그에 어울리지 않게 듣기 좋은 목소리.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눈꺼풀을 들었다.
눈앞에 구둣발이 보였다. 시선을 위로 올리자 똑바로 선 채 나를 내려다보던 주청경과 시선이 부딪혔다. 적색이 감도는 눈동자는 여전히 오연했고, 전보다 더 섬뜩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미친놈아.
“으읍……!”
나는 충격과 의문이 차오른 얼굴로 몸부림을 쳤다. 잠들기 전까지 분명 형과 함께 있었으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감도 안 잡힌다는 듯.
한순간에 달라진 상황이 경악스러울 만도 하잖아.
빈틈없이 묶인 손과 마찬가지로 자유롭지 못한 발을 버둥거리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형이 잠깐 했던 결박은 애교로 느껴질 지경이다. 긴장 때문인지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네.”
주청경이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었다. 탄탄한 몸과는 다르게 조금 병약해 보이면서도 퇴폐적인 얼굴이 가까워졌다. 장갑을 낀 손이 내 흐트러진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겨 주었다. 그 손길이 부드러웠다.
“은수 씨.”
“흡, 읍.”
“당신이 왜 여기 있겠습니까.”
창백한 만면에 재미있다는 기색이 스친다.
“내가 납치해서?”
“…….”
“정말로?”
……이상한데. 왜 이렇게 숨이 차지. 저항하는 시늉 좀 했다고 그런가. 나는 쌔근쌔근 호흡하면서, 흔들리는 눈으로 주청경을 쳐다보았다.
내게서 긍정을 읽어 낸 주청경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제가 다 속상하다는 양, 과장되게 눈썹을 늘어뜨린다.
“저런.”
긴 손가락이 마치 안쓰러운 상대를 위로하듯 내 뺨을 쓰다듬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가죽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쩌면 좋죠.”
주청경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신을 이곳에 넘긴 게 차은혁 씨인데.”
“……!”
믿기지 않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소중히 대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던데……. 웃기지도 않아요.”
투두둑! 주청경이 내 상의를 한 손으로 잡아 뜯었다. 순간적으로 거세게 당겨진 옷이 목덜미를 스치고, 속절없이 찢긴 채로 바닥에 나풀나풀 떨어졌다.
형과의 격정적인 정사가 남긴 흔적들이 노출되었다. 싸늘하면서도 흥분이 서린 눈빛이 울긋불긋한 살결을 훑어보았다.
“자긴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두고.”
“아읍……!”
주청경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다리를 휘저었다. 물론 사지가 묶여 바닥에 쓰러진 상태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몸속에서 뜨겁게 끓는 열기가 힘이 빠져나가게끔 만들고 있었다. 동시에 온몸의 촉각도 민감하게 곤두섰다.
문득 입에 물린 천에서 쓴맛이 났다.
……아.
이 새끼, 설마 또…….
“이만하면 괜찮을 것 같네.”
내 상태를 면밀하게 살핀 주청경이 중얼거렸다. 나는 가쁜 숨을 쉬면서 흐릿해지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억울해하지는 마세요, 은수 씨. 맨정신보다는 이편이 나을걸.”
주청경의 손끝이 내 턱 밑부터 선을 긋듯이 주욱 훑으며 내려갔다. 나는 소름이 끼치는 몸을 웅크렸다.
“내가 이번에는 더, 아주 많이 힘들었거든.”
“…….”
“그래서 조절이 잘 안 될 거예요.”
그가 느릿하게 장갑을 벗었다.
***
게임이니, 뭐라느니. 그냥 차은수의 존재를 몰랐던 과거에 주청경은 간혹 생각했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뭐라고.
당연히 스스로의 가치나 신념을 부정하는 의미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둘의 관계성에 대한 고찰이었다.
에스퍼는 가이드를 필요로 한다. 가이드는 에스퍼가 필요하지 않다. 에스퍼는 가이드가 없으면 고통 속에서 죽어 간다. 가이드는 에스퍼가 없어도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실로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결국에는 발현한 이상, 에스퍼들의 입장에선 생존을 위해 순응할 수밖에 없는 섭리였다.
주청경 역시 늘 그것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산소 호흡기 수준도 되지 않는 가이딩을 받으며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그를 구원해 줄 존재를 만나 평생을 함께하기를 바랐으니까.
그런 경우가 생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여기면서도, 혹시라도 기적처럼 구원자가 나타났을 때의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꿈꾸었다. 상대가 거부한다면 잘 구슬리고……, 그래도 안 된다면 다소 가혹한 방법을 쓰면 될 일이었다.
오롯이 자신을 위한 존재로서 살아가도록, 그 인생을 철저히 설계해 줄 생각이었건만.
그럴 수 없었다.
차은수에 대한 소유권을 홀로 주장할 만한 세상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를 비밀리에 두고 최소한의 인원으로 보호하며 가이딩을 누리는 쪽이 어떻게 보아도 합리적이었다.
눈앞의 가이드에 한해서는 그 무엇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데, 양보해야 하는 현실이 분노를 유발했다. 다른 에스퍼들과 차은수의 유착된 관계를 무너뜨리고 싶었고, 그것을 참아내야만 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돌이켜 보면 처음으로 제 머릿속을 물렁하게 주물렀던 차은수다웠다. 본인의 존재 자체로 현실과 타협하게 만든다. 그것에서 비롯된 분노가 욕망의 형태로 자신을 향하게 하기까지도.
“흐으읍…….”
호화스러운 실내에 자리 잡은, 사면이 검은 창살로 이루어진 공간.
그 괴이한 공간 안에서 차은수가 발갛게 달은 얼굴로 온몸을 바르작거렸다.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기색이었다. 재갈에 배어 있던 약을 흡수했다면 이제 곧 무의미해질 발악임을 모르고.
주청경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차은수의 바지 또한 벗겼다. 이내 제 옷도 모조리 벗어 던졌다. 최대한 많은 부위를 겹치고 느끼고 싶었다. 무력한 나신 위에 올라타자, 인위적으로 높아진 체온이 맞닿은 살결로 번져 왔다.
“흐…….”
따뜻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이성을 녹인다. 주청경은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뜀박질을 하는 심장을 느꼈다. 첫 만남이 항상 급한 불을 끄는 느낌이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차은수를 가질 수만 있다면 아무런 상관도 없었으니까.
혀를 내밀어 차은수의 귓가를 핥았다. 물컹하고 촉촉한 살덩이에 연골이 범해지며 차은수가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거부 의사를 비쳤다. 주청경은 멈칫하기는커녕 입술을 내려 하얀 목을 크게 베어 물었다.
“……!”
엷은 색의 눈이 부릅떠졌다. 강제로 당하는 처지에 열까지 잔뜩 올라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동물처럼 굳어 버린 그에게서 주청경이 얼굴을 떼었다. 여린 피부에 붉게 난 잇자국은 추후 멍이 들 것이 확실해 보였다.
주청경은 딱딱해진 좆을 차은수의 허벅지에 문지르며 흥분한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 안 넣어도 쌀 것 같네.”
“으응, 읍……!”
“누가 이렇게 씹어 먹고 싶게 생기래요.”
차은수는 강한 악력에 턱이 잡혀 고개가 정면으로 돌아갔다. 벌어져 있는 그의 입술을 주청경이 잘근잘근 물다가, 집요하게 빨기 시작했다. 재갈이 타액으로 질척하게 젖어 갔다.
입이 틀어 막힌 채 유린당하는 상황과, 자위라도 하듯 제 허벅지 위로 좆을 붙인 채 거칠게 비비는 주청경의 행위에 차은수에게도 서서히 야릇한 느낌이 밀려왔다. 자극당하고 있는 겉가죽에서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열이 약 기운을 증폭시켰다.
입술이 끈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주청경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차은수의 몸을 뒤집었다. 좀 더 마주 보고 싶었지만, 즐기는 것도 여유를 얻은 후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양손이 결박된 차은수는 팔꿈치로라도 바닥을 짚으려고 했으나, 금세 힘이 풀려 상반신이 엎어졌다. 주청경의 손아귀에 골반이 잡혀 있지 않았다면 완전히 엎드려 누운 자세가 되었을 터였다. 도움 아닌 도움 덕에 하체만 세워진 그가 혼미한 낯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
주청경은 탄력 있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태워 버릴 기세로 내려다보며, 흉악하게 부푼 제 좆을 손으로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