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화가 치솟아서 충동적으로 행동할 확률이 높겠지. 지금 심태성은 나를 배려한답시고 참을 처지가 아니었다. 뭐…….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데, 실제로는 누가 누구를 가여워해야 할지가 명확했다. 게다가 만에 하나라도 끝까지 인고하다가 폭주라도 하면, 심태성도 죽고 나도 죽고 그냥 다 죽는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삼켰다. 심태성과 내가 대치 중인 거실 한복판의 분위기가 푹 가라앉았다.
입을 닫고 있던 심태성이 티슈를 내민 건 그때였다.
“죄송합니다.”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답답하고 죄스러워하는 감정이 그대로 비쳤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
기대한 손길이 아니라서 다소 김이 샜으나, 일단 말없이 티슈를 건네받았다. 물론 받으면서 심태성의 손을 꽉 쥐어 버리고 싶은 욕구를 참아야 했다.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자 괴로움으로 물든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태성의 머릿속에서는 당장에라도 나를 데리고 튀고 싶은 본능과, 그것을 막아서는 이성이 충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못할 건 없겠지. S급들 중에서는 가장 도주에 용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미 나를 숨겼던 전적도 있고.
하지만 다른 S급들을 적으로 돌리고 추적을 피하는 문제나, 괴물로부터의 안전과 관련된 문제는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만일 전자를 선택한다면 평생 모든 걸 경계하며 강박 속에서 불안하게 지낼 것이다. 심태성 본인은 상관이 없어도, 내게 그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아뇨……. 제가 경솔했어요. 큰소리칠 입장이 아닌데.”
나는 지친 어조로 중얼거렸다. 심태성이 곧장 부정했다.
“아닙니다. 제 행동이 위선적으로 느껴지셨을 게 당연합니다.”
“…….”
“분이 풀리실 때까지 저를 때리고 욕하십시오. 침을 뱉고 칼로 찌르셔도 됩니다.”
내가 어떻게 굴어도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로 얘기한다. 진심이 뚝뚝 흐르는 모습이었다. 이건 무슨……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내달라며 요구하는 상황 아닌가.
나는 재차 솟구치는 눈물을 참는 척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괜찮다고 했잖아요.”
다 포기하자. 이제 무뎌져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겨우겨우 스스로를 세뇌하던 나를 왜 이리 들쑤시느냐는 듯 괜스레 심태성을 원망했다.
심태성은 내 감정이 옮은 것처럼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눈가를 떨었다. 손을 뻗어 안아주고 싶은데 인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를 함부로 다룰 생각도 없고, 놓아줄 생각은 더더욱 없으면서 또 다감하게는 군다.
나는 그런 심태성을 더는 대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려버렸다.
***
차은수가 꺼낸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을 찔렀다. 엷은 갈색 눈동자에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릴 때마다 숨이 멎는 기분이었고,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씹을 때는 그만두어 달라며 빌고 싶었다. 심태성은 그가 택한 결과가 생동하는 모습을 바보처럼 지켜보기만 하는 지금 이 상황이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정말, 끔찍하게 한심했다.
그렇게 자책을 하던 와중에 차은수가 돌아섰다. 그는 그저 자리를 피하고자 함이었겠지만, 심태성은 외면당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조금도 건드리지 않겠다던 다짐도 잊은 채 반사적으로 차은수의 손목을 잡은 것은 그 탓이었다.
여유가 있는 소매 사이로 드러난 손목이 손아귀에 들어왔다. 살갗이 닿은 부분부터 미치도록 그리웠던 감각이 밀려왔다. 꼬이고 꼬인 채 주인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던 파장이 익숙한 구원을 느끼고 날뛰기 시작했다.
이성이 잠시 끊겼다.
“……!”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차은수를 우악스레 끌어당긴 채 입을 맞추려 들고 있었다. 심태성은 서로의 호흡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거리에서 가까스로 그 이상의 접근을 멈추었다.
놀란 듯했으나 금세 진정한 차은수가 코앞에서 눈을 내리깔았다. 흰 얼굴에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약간의 동요조차 담겨 있지 않았다.
심태성은 제어에서 벗어나 흐트러지는 호흡을 느꼈다. ……이렇게는 안 된다. 이래서는 안 되었다. 안식처가 되어 주지는 못할망정 자기 욕망 하나 조절하지 못하는 꼴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머리가 몸에게 차은수로부터 떨어지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가이드의 허리와 손목을 잡아챈 제 두 손은 결코 말을 듣지 않았다. 떨어지기는커녕 반발심으로 더욱 붙어 있고자 힘이 들어갔다.
“아…….”
잡힌 부위에 통증이 느껴져 움찔한 차은수가 심태성을 쳐다보았다. 언제 물렁한 감정들을 담고 있었느냐는 듯이, 그보다 사납고 원초적인 무언가를 내포한 흑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열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와 힘겨루기라도 하듯 더 밀착하지는 않는다. 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무는 모습에 차은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독하다, 독해. 처음 만났던 시기가 떠오르는 태도였다.
“……경호원님.”
차은수가 저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마냥 견디고만 있는 심태성을 복잡하게 불렀다.
마치 그 목소리가 신호라도 된 것처럼, 심태성이 간신히 악력을 풀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
이제 사과는 지겨우니 그만두라는 양 곧은 손가락이 심태성의 입가에 닿아왔다. 심태성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내버려 둔 손길이 피부 위를 쓸었다. 미치도록 감질나는 쾌감이 느껴졌다. 가이딩이 전달되는 부분으로 줄기처럼 뻗어져 나간 파장이 욕심껏 그것을 음미하며 환희에 젖었다.
고작 손끝을 가져다 댄 행위지만 이는 곧 차은수 본인에게 겨누어져 있던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였다. 지성체로서의 의식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는 에스퍼에게, 가이드가 스스로를 무방비하게 내어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차은수는 말끄러미 심태성의 얼굴을 응시했다. 확대된 동공과, 맞닿은 흉근에서 느껴지는 거친 심장 박동이 눈앞의 에스퍼가 극도로 흥분했음을 알린다.
참지 말라는 의미를 잘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
홀린 듯이 차은수를 눈에 담던 심태성이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고개가 비스듬히 내려가고, 형편없이 갈라진 입술이 부드러운 입술을 덮었다. 의지를 다잡으려던 내면의 외침이 흔적도 없이 꺼졌다.
“음…….”
차은수는 자신도 모르게 눈꺼풀을 바르르 떨다가 나지막이 신음했다. 입을 맞추고 있는 존재는 틀림없이 심태성인데, 탐욕스레 저를 갈구하는 또 다른 존재에게 생기가 흡수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심태성이 흐트러진 숨을 내쉬며 차은수의 말캉한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그러다 돌연 좁은 틈새를 두꺼운 혀로 가르고 들어가, 촉촉한 점막을 천천히 휘저었다. 어느 한구석에 정착하지 않고 진득하게 혀를 돌리는 행위였다. 제집을 빼앗긴 차은수의 혀가 몸을 사리듯 움츠렸다. 심태성은 그조차 낚아채 흡사 삼키고 싶다는 듯이 강하게 빨아들였다.
혀와 혀가 마찰하며 입 안에 고인 타액이 서로에게 넘나들었다. 질척한 살덩이가 비벼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숨결에 열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흐으, 읍.”
차은수가 삽시간에 흐려진 눈을 깜빡였다. 어질어질한 시야에 본능적으로 의지할 것을 찾아, 심태성의 어깨를 꾹 잡았다. 심태성은 비척거리는 차은수의 몸을 단단히 붙들고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차은수는 의문을 느꼈다. 어……. 방으로 가네? 뭐야, 침대에서 할 정신이 있다고? 분명 눈은 맛이 갔는데……?
여태껏 들어와 본 적 없던 심태성의 침실에 눕혀졌다. 푹신한 침대의 감촉이 등을 감쌌다. 바닥에서 하는 것보다야 훨씬 좋긴 한데……. 차은수는 설마 심태성이 무의식중에도 저를 배려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읏.”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느냐는 양 심태성이 차은수의 목울대 부근을 베어 물었다. 아프지는 않아도 홧홧하게 달아오를 정도는 되어서 상체가 살짝 튀었다.
차은수는 심태성의 뒤통수를 끌어안은 채, 그가 자신의 쇄골 사이를 혀끝으로 쑤시는 것을 느꼈다. 뜨겁고 습한 것이 움푹 파인 곳을 자극하는 묘한 감각에 발끝이 옴찔댔다.
머지않아 고개를 든 심태성이 차은수의 상의를 걷어 올렸다. 판판하고 하얀 가슴에 자리 잡은 옅은 분홍색의 유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심태성의 눈빛이 짙어졌다.
“아흐으……!”
망설임 없이 달려든 그의 입술이 젖꼭지를 머금었다. 탄력 있는 돌기가 농밀하게 빨리며 본디보다 길게 늘어났다. 심태성은 입 안에 들어온 돌기를 혀로 굴려 대다가 이를 세웠다. 오싹한 느낌이 스친 차은수가 몸을 떨었다.
거대한 덩치로 저보다 체구가 훨씬 작은 상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서 탐하는 남자는 얼핏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잡아먹히는 듯한 이에게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점차 달짝지근해져만 갔다.
“하읏……. 경, 으응……!”
“…….”
반들거리는 유두에서 입술을 떼어 낸 심태성이 상반신을 세우고 탈의했다. 깊은 흥분감에 자기주장을 하듯 꿈틀거리는 굵은 근육들이 밝은 불빛 아래에서 전부 드러났다. 성감대를 자극당한 여파로 볼이 발개진 채 할딱이며 그를 쳐다보던 차은수는, 순식간에 다리를 붙잡혀 바지가 벗겨졌다.
“……!”
심태성이 무릎을 꿇고 앉아 차은수를 잡아당겼다. 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두 다리가 가지런히 들려, 심태성의 한쪽 어깨에 기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