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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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청경은 심태성과는 자못 달랐다. 사람마다 무언가를 손에 쥐려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심태성이 나를 무조건적으로 지키려는 성향이었다면, 주청경은 내 몸은 물론이고 정신까지 제어하려 들었다.
거짓된 정보로 속이고.
상처를 주더라도.
……또다시 심태성에 의해 일이 틀어진 심정이 어땠을까.
그 뒤로 나를 추적했을까.
심태성과 외딴섬에 있기는 했지만, 체류하는 시간이 길었다면 혹시 모른다. 언젠가는 꼬리가 밟혔을지.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지 않은 상태에서 장희강을 만나기 위해 떠났었다.
그리고…….
‘감히 자신의 근원을 거부하다니.’
‘당신은 차은수로서의 삶을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두 번째 삶의 그 어떠한 부분도 기억하지 못한 채, 이탈했던 곳으로 돌아와……. 원래대로 내 세계의 일부로서 살아갈 것입니다.’
분명 나는 차은수로 살던 세계에 남겠다고 했으나……, 내 의지가 철저히 무시된 채 강제로 원래 세계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허무하게도 불쑥.
마지막으로 그 누구의 얼굴도 한 번 못 보고서.
이쪽 시스템이 단언했던 대로, 두 번째 생의 기억을 전부 잊은 채 말이다.
그렇게 됐는데 어떻게 장희강이 이 세계에…….
“……!”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는 감각이 느껴졌다.
푹신한 침구의 감촉도.
장희강을 만난 직후 의식이 끊기지 않았던가.
방대한 양의 기억을 되찾느라 그랬던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보다 중요한 건 장희강이 어떻게 이곳에 있느냐,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였다.
“정신이 들었나.”
장희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움찔 떨고 만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누워 있는 내 머리맡에 걸터앉은 장희강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영혼을 앗아 갔을 때나, 날 범했던 때처럼 헝클어진 상태가 아닌 깔끔하게 넘긴 머리. 그토록 들끓던 광기가 보이지 않는 말끔한 얼굴.
시커먼 눈동자에는 어울리지 않는 다정함이 그득했다.
지독히 갈구하던 사냥감을 포획하기라도 한 것처럼 몹시 안정적인 분위기였다.
“어디 아프지는 않고?”
“…….”
“코피를 많이 흘려서 걱정했거든.”
시발, 무슨 말부터 해야 할까.
일단 대꾸 없이 놀란 듯 멍하니 그를 쳐다만 보던 순간이었다.
“원래의 네 모습도 꽤 내 취향이었지만, 역시 지금이 더 좋구나.”
장희강이 내 뺨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말뜻이 단번에 이해되지 않아 입을 달싹인 찰나.
특이하게도 거울처럼 되어 있는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비친 내 모습도.
커다란 침대에 누워 있는 나는…….
차은수의 모습이었다.
눈을 부릅뜨며 숨을 헉 들이켰다.
기억만 돌아온 게 아니고, 육체 역시 차은수의 것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장희강은 바짝 얼어붙은 내 눈가를 매만졌다.
“모든 게 기억난 눈치야.”
그의 얼굴이 내려왔다.
이마가 맞닿았다.
끔찍하게 일그러진 파장이 느껴졌다.
가이드로서의 힘도 돌아왔다는 반증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인데.”
“……!”
파장도, 속삭임도 모두 소름이 끼친다.
마찬가지라는 건…….
“여기.”
별안간 옷 속으로 단단한 손이 들어왔다.
파드득 몸을 떨며 다급히 그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장희강은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고, 제가 원하는 지점으로 막힘없이 파고들었다.
쿵쿵대며 심장이 빠르게 뛰는 부위를 거친 손바닥이 덮었다.
“많이도 아파했지.”
미친.
내가 게임을 통해 그를 공략했던 시점부터……. 그러니까, 말 그대로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정도로 괴로워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
“영혼을 빼는 과정이라서 고통이 심했던 건가.”
그럼, 시발. 급소에 칼 맞는 상황에서 안 아파하겠냐.
일반인은 감당키가 불가능하다는 고통 속에서 살았던 저 같은 S급 에스퍼야 그보다 더한 걸 겪어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을 테지만.
욕설을 삼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게 된 것에 더해, 가차 없이 찔렸던 부위를 장희강이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상의 안에 들어와 있던 손이 그대로 가슴을 토닥여 왔다.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나로서도 살기 위해 한 일이니 이해해 주면 안 될까.”
지옥 같았던 시기를 회상하는 것처럼, 장희강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러나 손동작이 멈추지는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네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더구나.”
“…….”
그야 공략이 끝났었으니까.
게다가 게임 속 인물과 세계가 지나치게 생생히 느껴지는 탓에, 너무 과하게 몰입이 되었었다. 내가 플레이하던 차은수. 그리고 현실의 나인 이은수. 둘을 스스로 혼동하는 경우가 가끔 발생할 정도로.
[당신은 게임을 통해 본인도 모르는 새에 실제로 가이딩을 해 주고 있었던 겁니다.]
결국 그 게임은 게임이 아닌, 사실상 또 다른 현실이었기에 그러했던 것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래서 현실 세계에서의 컨디션 난조는 물론이고, 스스로의 중독자 같은 모습을 문득 깨달은 나는 공략 후에 이어지는 게임은 플레이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미친 것처럼 온 세상을 뒤졌다. 겨우 만났던 내 구원자를 찾아서.”
[하지만 게임의 형태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겠지요. 당신은 공략이 끝난 이후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으니까요.]
[그쪽 세계에서는 사라진 당신을 하염없이 기다렸을 겁니다.]
장희강이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에서, 돌연 시스템이라는 존재가 내려 준 동아줄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
“…….”
“너는 날 만나 구원해 주었던 그 세계를 그저 게임 속 허구의 세계로 알고 있고, 더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했어. 그러니 직접 데리러 가야 한다고.”
장희강이 비어 있던 손으로 내 볼을 쓸어내렸다.
“다만 그 이후에는 네 진정한 탄생을 위해 시간을 되돌릴 거라고.”
나는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숨을 참았다.
일정하게 다독여지는 감각이,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오히려 더욱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뭐든 좋았단다. 너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시스템이 한 말이 거짓이고, 너에 대한 기억만 날아간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지.
널 기억하면서 함께하지 못하는 채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그곳에서 태어난 널 드디어 다시 만났는데.”
짧은 자조가 스쳤다.
“허무하게 또 없어질 줄이야.”
먹색 눈동자가 심연처럼 깊어진다. 예술적으로 조각된 것만 같은 얼굴은 이제 섬뜩해 보였다.
마주하는 그 누구라도 덜컥 겁을 집어먹을 듯한 분위기.
아니, 시발. 억울하다고.
내가 원해서 돌아온 게 아니었거든……?
나는 하얗게 질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저는…….”
“하지만 이번에는 너에 대한 모든 걸 기억할 수 없었지. 네 얼굴, 목소리, 그리고 네가 떠났다는 사실조차도.”
닥치고 들으라는 양 강압적인 어조로 그가 말했다.
“네가 존재했던 사실 자체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으니까.”
“……!”
“그럼 그대로 살지, 왜 다시 찾으려 했고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 왔는지. 아마 넌 그게 궁금하겠구나.”
……부정할 수 없었다.
가장 우선적으로 든 의문이었기에.
이내, 아주 깊은 곳에서 울리는 듯한 저음이 귀를 적셨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
“아……!”
여태 가슴을 토닥이던 손이 돌변해, 젖꼭지를 아프게 꼬집었다. 반사적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몸부림을 치며 피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번쩍였다.
장희강이 내 얼굴을 매만지던 반대쪽 손으로 뺨을 내려친 것이었다.
삐이이, 이명이 들린다.
불타는 것처럼 홧홧하게 달아오른 피부가 느껴졌다.
와.
와아.
나 지금 뺨 맞은 거야? 왜?
힘 조절을 했으니 이 정도에서 그친 거겠지만, 실로 충격적이었다.
“흐, 으…….”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장희강은 살짝 헷갈리게 다정한 척하다가, 지 꼴리면 바로 난폭해지던 새끼였다.
간간이 엿보았던 평소의 행동거지나, 나를 강간했을 때나 똑같이 그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여기가, 이 세계가 어느 쪽인지.”
“…….”
“유감스럽지만 알려 줄 생각이 없단다. 너한테는 하등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서.”
네가 알아 둘 건 하나야.
돌아간 내 얼굴을 움켜쥐고 정면으로 돌린 장희강이 음습하게 경고했다.
“끔찍하고 지겨워서 도망친 가이드로서의 삶. 그걸 이제 평생 영위해야 한다는 것.”
아니, 그것도 오해인데.
나 가이딩은 좋아했다고.
……가만.
설마, 시발…….
내가 도망쳤다고 생각해서 싸대기 갈겼냐.
“다시는 벗어날 수 없을 거고.”
턱을 쥔 악력이 강해진다.
아까부터 용케 숨기고 있던 분노와 애욕,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갈망이 장희강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유두를 괴롭히던 손이 서서히 내려갔다. 갈비뼈를 지나 배꼽 주변을 느릿하게 어루만져 온다.
“항상 이 안이 터질 것처럼, 내 좆물을 먹어야 할 거야.”
“……! 으읍!”
장희강이 우악스럽게 내 뒷목을 당기며 폭력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뺨을 맞을 때 터졌는지 피 맛이 나는 입 안을 두꺼운 혀가 가르고 들어왔다. 무자비하게 목젖을 찌르고 희롱하는 혀 놀림에, 차츰 내 눈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জীয়াই থাকি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