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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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가 고통에 지배당하면, 불쑥불쑥 분노가 치밀었다. 모든 것을 부수고 망가뜨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강렬한 화기였다.
원체 제어키 힘들었던 그것이 요즘은 더욱 말썽을 부렸다.
수하들에게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한심한 모습 따위를 보일 수 없으니, 나날이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주청경은 오직 심복만을 불러 용건을 꺼냈다.
“내가…….”
창백한 얼굴이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를 쫓고 있지 않았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노인의 얼굴에 의문이 스쳤다.
“예?”
“내가 따로 내린 명령이 없었냐는 말입니다.”
“…….”
노인이 주청경을 쳐다보았다. 지금의 주청경은 어쩐지 초조한 기색이었다. 오랫동안 그를 따랐으나 처음 맞닥뜨리는 모습이었다.
장희강을 적대하는 위치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던 그였건만.
평소의 그라면 본인이 어떤 명령을 내렸는지를 잊었다는 양 제게 묻는 행동 또한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적과 관련된 명령을 내리신 적은 없습니다.”
충성스러운 심복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답했다.
“……그래요.”
주청경은 입을 다물었다.
더 할 말이 없어 보이는 그의 분위기에, 노인이 눈치껏 몸을 물렸다.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집무실에 홀로 남은 주청경은 이마를 꾸욱 내리눌렀다.
“…….”
고개를 돌리자, 창문 밖으로 펼쳐진 황량한 기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귀가 먹먹할 정도의 두통이 조금 가시는 듯하다가…….
다시금 밀려들었다.
“윽…….”
턱에 힘을 주며 탁상을 짚었다.
그제보다 어제가, 어제보다 오늘의 컨디션이 더 나쁘다. 아득한 시간 동안 그래 왔기에 오늘보다 나은 컨디션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치 최근에 이 상황이 나아지기라도 했던 것처럼, 도무지 고통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뿌드득, 그가 주먹이 있는 힘껏 쥐었다.
찢어진 살갗에서 피가 흘렀다.
***
공들여 온 존재를 빼앗겼을 때 격노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비록 먼저 빼앗았던 쪽은 자신이고, 그 존재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말이다.
[자기 세계 사정이 아니라고…….]

과연 제 세계가 멸망을 앞두었어도 마냥 손 놓고 있었을까?
원형의 눈이 파랗게 타올랐다.
시스템은 차은수가 사라진 자신의 세계를 내려다보았다.
처음부터 차은수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그에 대한 기억을 전부 잃은 핵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가이딩을 받아 최악은 피했던 파장 역시 원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이대로 둘 수는 없어.]

하지만 자신은 이미 너무 많은 금기를 어겼다. 그 대가로 잃게 된 권능이 너무도 컸다.
차은수를 다시 데려오거나, 적합한 새로운 존재를 납치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설령 가능하더라도 그쪽에서 또 되찾아 간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터였다.

[차라리…….]

시스템은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해 내었다.
그것은 정말 이기적이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계의 유지를 위해서는, 덤벼 보는 수밖에 없었다.
***
꿈속에서 본 인물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의 기분.
처음에는 내가 미친 게 아닌가 싶어서 참 엿같았다.
피부에 닿던 입술과 숨결, 옷감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정말 말도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곧 머릿속으로 해일처럼 밀려오는 차은수의 이야기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태 꿈으로 꾸었던 모든 것들이 순서가 맞추어진 채, 완성된 기억으로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래. 기억.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 기억이었다.
내가 차은수였고, 차은수가 나였다.
‘안녕.’
요람에 누워 있는 내 손을 어린 차은혁이 조심스레 건드렸다. 그는 하루의 반 이상을 잠으로 보내던 내가 깨어날 때를 귀신같이 알고 나타났다. 눈을 뜨면 보이는 상대는 대부분 그였다. 어머니보다 더 많이 보았으니 말 다 했지.
나는 벌써 잘생긴 형의 얼굴을 보며 까르르 웃었다. 그러고는 팔다리를 동당동당 흔들다가, 손등을 간지럽히는 검지를 움켜쥐었다.
풀린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낯이 귀여웠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형 역시 나를 사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푸릇푸릇한 봄날이었다.
한 손으로 나를 안고 있던 형이 허공에 다른 손을 뻗었다. 손바닥 위에서 생성된 얼음 구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것을 만져 보았다. 차갑고 매끈했다.
‘와아.’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그야말로 비과학적인 힘이었다.
능력의 산물을 구경하는 내 머리에 벚꽃 잎들이 떨어졌다. 주변에 있던 벚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휘날린 것이었다.
신기해하는 나와 놀아 주려는 듯, 형은 꽃잎들을 떼어 주다가 한 장은 꽁꽁 얼려서 건넸다. 코팅된 듯한 그것은 한참을 만지작거려도 녹지 않았다.
문득 나는 고개를 들어 형을 쳐다보았다.
‘형, 형. 나도 얼릴 수 있어?’
‘…….’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이냐는 듯한 시선이 나와 눈을 맞춘다.
‘내가 너를?’
‘응.’
‘아니.’
‘사람은 못 얼려?’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었는데, 조금 이상하게 들렸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왕 질문한 김에 대답을 기다렸다.
‘할 수 있지.’
그럼 나도 얼릴 수 있다는 거잖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내 볼을 형이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내가 널 어떻게 얼려.’
절대 못 해.
그리고…….
흑안에 서려 있던 녹음이 잠시 사라진다.
‘그럴 상대는 따로 있어.’
얼리고, 부수어야 할 상대.
형이 구체를 움켜쥐었다.
파사삭! 강한 악력이 딱딱한 얼음을 어렵지 않게 부수었다. 반짝거리는 가루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후.
성인이 된 형과 어머니가 대면했다.
‘어딜 가겠다고?’
어머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위험해. 절대 안 된다.’
‘어머니.’
형이 진중히 어머니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에스퍼 훈련소 입소는 의무였으니 말리지 않았지만, 아예 그쪽 길로 가는 건 안 돼.’
‘…….’
‘에스퍼 중에도 일반인처럼 사는 부류도 많지 않니.’
이윽고 머뭇거림이 섞인 말이 덧붙여졌다.
‘너까지 잃을 수는 없어.’
거실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나는 계단을 내려오다가 멈춘 채로, 그런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키기 위해서 가는 겁니다.’
목표가 확고한 눈동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미 내 존재를 눈치챈 지 오래였던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느꼈던 심정을, 오랜 시간이 지나 뒤늦게 털어놓았다.
‘그때, 나 처음으로 무서웠잖아.’
지독하게 취할 만큼 술을 마시고 형과 섹스했던 호텔.
침대에 마주 누워 있던 형에게 고백하자, 커다란 손바닥이 묵묵히 내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맨살에 와 닿는 체온이 나른함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형이…….’
‘…….’
‘위험한 일을 한다니까, 그래서 무서웠어.’
형의 품에 파고들며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그런 건 다 잊으면 안 돼?’
이때의 나는 형이 쫓고 있는 최종 목표가 내 공략 대상 중 하나인 장희강이리라는 사실을 몰랐다. 따라서 그를 잡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주청경.
그 사기적인 능력에 굉장히 잔인하기까지 했던 테러리스트를 추적할 것이 분명한 형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심지어 주청경 역시 내 공략 대상이라서 사망 루트를 타면 안 된다는 사실 또한 지극히 신경 쓰였다.
그냥, 공략 대상들끼리 피 터지게 싸우다 어느 한쪽이라도 죽을까 봐 전전긍긍한 거다.
피로감에 눈을 깜빡거리는 내게 가벼이 입을 맞춘 형은 나직하게 답했다.
‘모든 걸 끝내야 해.’
내 얼굴을 소중히 당겨 자기 가슴에 파묻는다.
그래야 비로소…….
‘널 위협하는 것들이 아닌, 너한테 집중할 수 있겠지.’
……그래.
그랬는데.
나중에 알게 된 형과 주청경이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심지어 이유가 장희강이라는 동일한 적 때문이고, 그 장희강이 바로 내 또 다른 공략 대상이자…….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는 점도.
그래서, 시발, 착잡한 마음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심태성과 몸을 섞었던 것 같다.
기실 심태성과는 몸정만 든 게 아니었다.
우직해 보이지만 의외로 눈치가 빠른 점도, 내게 집착적인 면도, 그의 모든 점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주청경에게서 나를 구해 냈던 순간이 가끔 떠오를 때마다 존나 멋있었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그리고 마치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걸 다 경호원님이 하신 거예요?’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말도 안 되게 요리도 잘했다. 이사한 곳에서 식사 준비는 그가 자발적으로 담당했다. 전부 정갈하고 맛있어서, 맛본 순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림조차 잘 그렸다.
……이거 소설 속 인물이면 설정 과다 아니냐고.
하루는 그가 나를 그려 둔 모습을 우연히 발견해 충격을 받았는데, 잠들어 있는 내 모습이 자못 생생하게 표현된 그림이었다.
그걸 보았을 때…… 솔직히 오랜만의 감동과 함께 무언가 묘하게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심태성이 나를 어떻게 봐 왔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뜻했다. 부드럽게 그어진 선들이 만들어 내는 내 인상과 분위기가 무척이나 온화하고 평화로웠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애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জীয়াই থাকি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