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송이가 흩날렸다. 한차례 스치는 바람에 나뭇가지에서 투둑 눈이 떨어졌다. 설한으로 얼어붙은 호수가 차갑게 번뜩였다.
정적에 휩싸인 산중의 저택 앞. 엉망으로 헤집어진 땅에 쓰러져 있던 거구의 사내가 손끝을 꿈틀거렸다. 혈액이 말라붙은 눈꺼풀 역시 잘게 떨리더니, 천천히 들려진다.
드러난 흑갈색 눈동자가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휘청거리며 일어선 심태성은 헛되이 근처를 살폈다. 의식을 잃기 전 들었던 차은수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목을 다칠 수도 있건만 오로지 자신만을 향한 걱정으로 몸부림치던 모습도.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겼던 것은 빌어먹을 적의 상판이었으나, 스치듯이 보았던 차은수의 안색은 마치 저가 죽기라도 할 것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도련님.”
갈라진 목소리가 사라진 대상을 찾아 공중에서 방황했다.
언제고 지켜 내리라 다짐했던 스스로가 무색하게도 그를 잃고 말았다. 안정적인 파장 상태가 일으킨 방심이, 위협당하고 있던 차은수에게 쏠린 신경이 한순간에 패배를 불러왔다.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톱이 단정히 깎여 있음에도 강하게 손바닥을 파고들어 상처를 냈다. 그 살벌함에 사뿐히 내려앉은 눈꽃이 순식간에 녹았다.
심장의 반쪽이 뜯겨 나간 것 같은 끔찍한 고통에 휩싸였다. 차라리 실제로 그러해도 좋으니 다만 차은수를, 자신의 삶을 돌려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당장 차은수의 곁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제 능력은 인물이 아닌, 장소를 지정해야만 했으므로.
절망스럽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차은수가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는 양 굴던 적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알고 이곳을 찾아왔는지는 중요치 않다. 놈의 능력은 빙의였고, 이곳저곳에 옮겨 붙으며 그들을 미행했을 확률이 높았다.
어디에나 눈이 있었다고 보아도 억측은 아닐 테지.
익숙해질 수 없는 상실감, 분노, 살의, 모든 어두운 감정이 밑바닥부터 올라와 전신을 불태웠다.
능력이 광적으로 일렁였다.
지이이익.
사방에서 허공이 날카롭게 찢어졌다. 그 인근에 있던 식물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디로 이동되는지는 능력의 사용자인 심태성도 알 수 없었다. 그가 능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소용돌이에 능력이 휘둘리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닿지 않고서도 사물을 이동시킬 수 있다고?
“…….”
심태성의 얼굴에 이성이 돌아왔다. 동시에 능력의 분산도 멈추었다.
이걸 제대로 다루게 된다면, 차은수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능력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은가.
그는 머리를 차갑게 가라앉혔다.
***
에스퍼의 재생력은 뛰어나다. 주청경이 심태성과의 전투 탓에 치명상까지는 아니어도 분명 적지 않게 입었던 부상들은, 이곳 거점에 도착했을 때 거의 아물어 있었다. 그의 노출된 온몸을 볼 수 있었던 나로서는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심태성도.
잠깐이나마 제3의 눈을 사용한 나는 안심했다. 아직 응급 처치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에 불과하나, 그래도 자가 회복을 하면서 의식 또한 되찾은 심태성의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다만 폭주하는 줄 알고 굉장히 가슴을 졸였다. 주청경과 싸우느라 급작스럽게 능력을 많이 사용한 데다가 자제력까지 잃어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인 듯했다.
“…….”
느리게 눈을 떴다.
조용한 방 안에는 나뿐이었다.
내가 잠드는 것을 끝까지 곁에서 지켜보았던 주청경은 곁에 없었다. 전날 저녁에 나를 씻기면서 촉감 놀이라도 하듯이 굴더니, 끝까지 욕구를 견뎌 내고 볼일을 보러 간 듯했다.
솔직히…… 컨디션을 좋게 만든 다음 잡아먹으려는 의도로 느껴진다. 높은 확률로 그게 맞을 거고.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공손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내가 깨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상대에 소름이 쫙 끼쳤다. 침대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그저 뒤척였을 뿐인데, 깨어난 걸 알아채다니. 에스퍼겠지.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네.”
작게 대답했는데도 바로 듣고 문을 열고 들어온다. 활동성이 좋아 보이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나를 뒤에서 붙들고 날붙이를 들이댔던 남자다.
당시와는 너무도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물론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거겠지만 말이다. 정성스럽게 음식을 차리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남자는 내게 시선이 향했던 것이 거짓이었다는 듯 태연하게 식기를 내려다보며 세팅한다.
저거 봐라……?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보았다.
따지고 보면, 주청경이 공들여 데려온 나에게 호기심이 드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얼마나 대단한 가이드인지가 에스퍼로서 가장 궁금하지 않을까.
나는 문득 내 몸을 살폈다.
조금도 결박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도망을 가면 얼마나 가겠냐고 여기는 거겠지.
당연한 태도이기는 하다. 에스퍼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심지어 S급인 주청경이 있는 구역에서 무력한 가이드가 어떻게 도주를 할 수 있겠어.
하지만 엄연히 말해서 나는 아무 힘도 없는 가이드는 아니었다. 가이드의 힘은 가이딩이니까.
덧붙여, 성공과 시도는 별개다. 순순히 끌려왔어도 범죄자한테서 도망칠 생각을 안 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이상하잖아. 납치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욕실에서 주청경의 입맛대로 굴려지기까지 했는데.
앞으로가 끔찍하게 두렵지 않겠냐고.
“저…….”
내 목소리에 반응해 에스퍼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슬프게 눈동자를 떨어뜨렸다.
“통화 한 번만, 할 수 있을까요?”
“…….”
“안 되면 메시지라도…….”
들어주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부탁하는 기색에 상대가 잠시 침묵했다.
“죄송합니다.”
“…….”
“수장님께서 외부로의 연락 일체를 금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알지, 그럼.
근데 딱히 상관없었다.
울음을 터뜨리기 위한 추진 장치였을 뿐이라서.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울기 시작하자 에스퍼는 입을 다문 채 동작을 멈추었다. 가만히 서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반응을 오래 고수하지는 못했다. 이불 위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보다 못해, 닦을 만한 것을 가지고 다가온다.
훌쩍거리던 나는 코앞에 내밀어지는 티슈를 바라보았다.
장갑 위쪽으로 살짝 피부가 드러난 손목도.
“……감사합니다.”
티슈를 받아 드는 척 손가락 끝으로 그 부위를 지그시 눌렀다. S급들에 비하면야 매우 양호하나, 상태가 좋다고만은 볼 수 없는 파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조직 내에 상주하고 있는 가이드들의 등급이 눈앞의 에스퍼보다 하위인 듯싶었다.
이 정도면 먹히겠는데.
속으로 확신하며 시선을 올렸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홀린 듯이 나를 응시하는 에스퍼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찼다. 초현실적인 무언가를 접한 사람 특유의 표정이었다.
간단한 접촉만으로도 이토록 얼빠진 모습을 보아하니, 본인은 무척 큰 변화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
“…….”
이 상황을 노렸다는 걸 부인하지 않겠다는 양, 나는 아예 에스퍼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입술을 달싹였다.
“부탁드릴게요.”
눈물 젖은 얼굴로 간절하게.
“저 좀, 돌려보내 주세요.”
오랫동안 가이딩이 부족한 에스퍼일수록 독점욕은 강해진다. 특히 상대 가이드가 자신의 파장을 완벽에 가깝게 안정시키는 존재라면, 그에 대한 호감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여러 S급 에스퍼를 통해 몸소 깨우친 바가 있기에 확신했다.
당연히 그들만큼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더라도, 지금 정도의 반응이면 충분하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정신이 몽롱한 상황 속에서도 이 에스퍼는, 내가 주청경에게 당했을 것이 분명한 상황을 되짚어 보는 듯했다.
치솟는 투기와 미혹으로 혼란스러워 보이는 상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불가……합니다.”
굉장한 충심이었다. 저가 따르던 이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본능을 억누르려 드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배신을 들켰을 경우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나는 손목을 스르르 놓아주었다. 이어 양쪽 팔을 뻗어 조심스레 에스퍼의 얼굴을 붙잡았다.
일부러 천천히 움직였는데도 거부하지 않는 게, 이미 답은 나온 셈이었다.
“평생 여기 갇혀 있고 싶지 않아요.”
“…….”
“제발…….”
그득 차오른 눈물이 다시금 주르르 흘렀다. 애달프게 울먹거리며 쳐다보자, 에스퍼는 올가미에 엮인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내 불안하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쉰다.
주먹도 여러 차례 쥐었다 펴며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는데, 떨리는 눈동자만큼은 내게 못 박혀 떠나지 않았다.
“……수장님께서는 현재 회의 중이십니다.”
축이 다 기운 에스퍼가 말했다.
“지금…….”
뒷말을 잇는 상대의 얼굴에 긴장감이 차올랐다.
“지금 바로 출발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
나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가 이윽고, 차츰 희망에 물들어 가는 표정으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