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평화 아닌 평화는 휴전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내 동맹이 언급되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장희강은 협력자들에 대한 예우를 갖춰 주겠다는 듯 그가 가진 몇 가지 정보를 흘렸다.
차은수가 본디 다른 세계 사람이었고, 그쪽 세계에서 게임을 통해 처음으로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만났던 것이라는 사실.
장희강 자신이 시스템이라는 존재의 제안에 응해, 그곳으로 넘어가서 차은수의 영혼을 납치했다는 것.
……애당초 장희강이 정보를 공유한 의도는 사실상, 본인이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차은수와 비현실적으로 얽힌 바가 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제각기 지독한 불쾌감과 충격을 억누른 채 침묵을 지키던 순간.
‘그 시스템이란 건 왜 도련님을 되찾게 도운 겁니까.’
심태성이 입을 열었다.
‘왜 우릴 도왔는지, 무슨 속셈인지는 들었습니까.’
‘글쎄.’
장희강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모르겠군. 그런 걸 물어볼 여유가 없었거든.’
‘…….’
‘시스템에게 불려 갔을 때도 내가 미쳐서 환상을 보는 거라고 여겼어.’
인정하기 싫지만 신뢰가 가는 답변이었다. 당시에 미쳤던 것은 장희강만이 아니었으니까.
‘진짜 재미있네요.’
주청경이 웃으며 말했다.
‘은수 씨한테 우리가 살아 있는 존재로 보이기는 했을까요?’
‘…….’
‘아니니까, 게임을 그만두듯이 쉽게 자기 세계로 돌아간 거 아닌가.’
그는 곧 이간질이라도 하듯 속삭인다.
‘그리고 시스템이라는 상대. 저도 그게 참 수상쩍어요.’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괴물이니 뭐니……. 갑자기 세상이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고, 다른 삶을 살아온 것처럼 내 과거도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같은 기관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네?’
다른 누구도 아닌 이곳에 있는 넷이.
……서로 옷깃만 스쳐도 치를 떨 관계가 아닌가.
같은 기현상을 겪은 모두가 입을 닫았다. 암묵적인 동조였다.
‘난 그게 꼭 고의적으로 안배된 것 같습니다. 시스템에 의해서.’
‘…….’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괴물이라는 위험이 수시로 침범하는 세계에서 서로 다투다 공멸할 것인지.
한발 물러서서 현재의 삶대로 그 위험을 함께 물리치며, 차은수의 안위도 지키고 가이딩도 나누어 받을 것인지.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결국 그들이 후자를 택할 것임을 알기에 의도된 상황같이 느껴졌다.
“…….”
본인의 사저 입구에 도착한 차은혁이 상념을 거두었다. 그리고 조수석을 돌아보았다.
장희강의 영역에서 데려온 차은수가 힘없이 늘어진 채 잠들어 있었다.
죄책감에 질식할 것 같은 얼굴로 울며 사죄하느라 심력을 소모한 탓이었다.
이미 장희강으로 인해 구석에 몰릴 대로 몰렸던 동생이었다. 저를 구하러 왔으리라고 믿었던 상대의 다그침에, 갈 길을 잃은 듯 흐느끼는 모습이 얼마나 가여웠던지.
하지만 차은혁은 그를 달래지 않았다.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으니까.
차라리 자신을 허구의 존재로 보았다고 답했다면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차은수는 그 물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예고 없이 떠날 만큼 차은수에게 제 가치가 없었다는 사실은, 발밑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상심을 안겼다.
차은수는 자신의 모든 것이었지만, 그 반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괜찮아.”
갈망하는 손길이 잠든 차은수의 뺨을 매만졌다.
들끓던 어두운 충동이 가이딩을 맛보자 폭발할 것처럼 솟구쳤다.
가족이라는 관계의 형태는 사라졌을지라도, 그에게 차은수는 영원한 동생이자 구원자였다.
자신만이 그를 바라더라도 상관없었다.
차은혁은 애틋한 손길과는 다르게, 검게 타오르는 눈빛으로 차은수를 내려다보았다.
***
적절한 스릴감은 활력을 돋운다. 나에게는 늘 다정했던 형이 처음 보는 얼굴로 윽박지르는 모습은, 꽤 신선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재밌을 것 같은 영화의 예고편을 하나 본 느낌.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엷은 파란색의 천이 물결치듯 흘러내린 캐노피 침대에 고이 눕혀져 있었다.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답답하지 않게 활짝 열린 창밖으로 녹음이 펼쳐져 있었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로 꾸며진 방 안에는 나밖에 없었다.
의아한 기분에 상체를 일으켰을 때였다.
차라랑, 맑은 금속성 음이 울려 퍼졌다.
“……!”
뭐야.
황급히 소리가 난 부근을 돌아보았다.
쇠사슬……?
캐노피에 따로 연결된 쇠사슬이 내 양쪽 손목과 이어져 있었다. 손목을 감싼 가죽 부분은 안감의 재질이 다른지 부드러웠다. 눈으로 보고 인식한 지금에서야 그 감촉이 느껴졌다.
납치당했을 때도 겪어 보지 않은 결박이다. 하마터면 입 밖으로 감탄사가 흘러나올 뻔했다.
와아……. 형…….
심장이 쿵쾅거렸다.
줄이 팽팽하지 않고 굉장히 길었기에 침대에서 내려와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보였지만…… 그래 봤자 이 방에 한해서일 것이다.
멍한 얼굴로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열려 있는 방문으로 형이 나타났다. 일부러 낸 듯한 인기척에, 나는 헉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들었다.
“컨디션 좀 어때.”
“……형.”
긴장감이 스며든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형은 개의치 않는 태도로 침대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내가 저한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즉시 멈칫했을 텐데 말이다.
거리가 좁혀지는 동안 나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침대 헤드가 등에 닿았다.
나는 확연히 떨리는 한쪽 손으로 다른 쪽 손목을 쥐었다.
“형, 이건…….”
“방은 마음에 들어?”
기어코 침대에 걸터앉은 형이 말을 잘랐다.
“은세한테 조언받아서 손봤는데.”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누나의 이름에 내 눈이 커졌다.
“나 혼자 사는 집에서, 갑자기 내가 쓰는 방이 아니라 다른 방을 왜 신경 쓰는지 궁금해하더라.”
익숙한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기서 네 이름을 말했어도 아마 누군지 몰랐겠지.”
“…….”
“이상해. 몸도 이름도 이렇게 너인데, 더는 가족이 아니라는 게.”
덤덤한 어조로 말하는 형의 얼굴에는, 이 주제에 대해서 언급해도 내가 상처받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깔려 있었다. 스스로 버린 가족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자기가 내게 의미 없는 존재였다고 착각하고 있는 만큼.
묘하게 차가워진 듯하면서도 집착은 더 심해진 형의 태도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충혈된 눈을 꾸욱 감았다가 떴다.
“이거, 풀어 줘.”
나는 용기를 낸 기세로 두 손목을 모아 내밀었다. 억압받는 생활을 하다가 겨우 구조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하는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그것도 형한테.
“못 도망친다는 거 알잖아.”
“……거짓말도 하네.”
형의 짧은 중얼거림에 입이 다물렸다. 어둑한 눈빛이 아프게 나를 찔렀다.
단단한 손이 쇠사슬을 움켜쥐었다. 확 잡아당기는 힘에 몸이 앞으로 쏠렸다. 형이 가까워진 내 뺨에 입을 붙이고 속삭였다.
“이게 풀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아, 차은수.”
“……!”
“잘 생각해 봐.”
가이딩이 전해지는지 잘게 동요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형은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몸을 물렸다.
눈빛이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나는 단박에 형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눈치챘다.
우리 형, 발전했네?
“…….”
형은 자신이 전한 바를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가늠하는 눈길로 날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형이 원하는 대로, 내 얼굴이 점차 수치심에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맞닿았을 때 느껴졌던 파장이 끔찍이도 나빴기에, 나는 현재 형에게 가이딩이 지극히 필요한 상태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곧장 몸을 섞어 형의 괴로웠던 시간을 보상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관적으로 가라앉아 있는 형의 분위기가 무서워 꺼려진다는 양, 이미 한바탕 쏟았던 사과만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잘못했어, 형.”
쓸데없이 시간을 벌려는 것처럼.
“잘못했어…….”
눈물이 가득 괸 채로 형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 동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인 형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
“…….”
반응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형이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문 쪽으로 향하는 모습에, 놀란 나는 다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쇠사슬이 물 흐르듯 함께 움직였다.
“잠깐, 형……!”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을 맨발로 달렸다. 그리고 걸음을 멈춘 형을 뒤에서 와락 껴안았다.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마.”
두려워할 땐 언제고, 함께 있어 달라는 듯 불안정한 정신을 표현했다.
결국 나를 장희강에게서 구해 낸 건 형이니까. 형과 떨어져 있으면 언제든 다시 장희강에게 끌려갈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힐 터다.
형이 화가 난 건 낯설고 두렵지만 당연하다. 나 때문이잖아. 그걸 풀어 주는 것도 응당 내 몫이고, 업보였다.
천천히 나를 돌아본 형이, 그런 생각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내 표정을 훑어보았다.
건조하던 얼굴에 선명한 만족감이 스쳤다.
내가 불안해하면서 매달리는 모습이, 마음에 찬 것이다.
과거라면 그러한 스스로에게 혐오감 역시 느꼈겠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형에게선 자책감 따위의 기색은 티끌만큼도 비치지 않았다.
정말 달라졌구나.
나 역시 만족스러운 웃음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