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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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 위치한 에스퍼 협회.
네 개의 협회장실이 존재하는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협회 소속의 비서실 직원은 숨 막히는 분위기의 복도를 직면했다.
괴물들에게 부산과 용인이 동시에 공습당해 현재 협회는 굉장히 어수선해진 상황이었다. 직원은 바쁘게 뛰어다니던 비서실장으로부터 한 가지 업무를 넘겨받았다. 공습과 관련 없이 원래 진행 예정이었던 보고 업무였다.
직원은 긴장한 얼굴로 복도에 발을 디뎠다.
부산 쪽 괴물의 처리가 더뎌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직후 해당 지역으로 떠난 심태성의 방. 최근 휴가를 낸 차은혁의 방. 아직 출근하지 않은 주청경의 방.
주인 없이 텅 빈 세 곳을 지나, 며칠간의 부재를 끝내고 복귀한 장희강의 방 앞에 당도했다. 조심스럽게 주먹을 든 직원이 똑똑 문을 두드렸다.
“장희강 협회장님,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들어와.”
짧은 응답이 돌아왔다.
직원이 문손잡이를 돌렸다. 안쪽으로 들어선 그는 그만 흠칫하고 말았다. 분명 예전보다 안색이 좋아졌는데, 기분은 더 나빠 보이는 장희강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직원은 목이 바싹바싹 말랐다.
너무 보잘것없는 사냥감이라 노려지지도 않는 기분이었다.
“용건.”
위압적인 저음이 내뱉었다. 직원이 미세하게 떨리는 손길로 서류 하나를 책상에 올렸다.
“협회장님들께서 교대로 휴가를 보내실 계획이라는 사실에 관해, 의혹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
“가이딩 부족으로 건강 상태가 심각하게 나빠진 건 아닌지 우려하는 비중이 가장 컸고……. 이와 관련하여 신체검사 결과를 정부와 공유해 달라는 청원이 빗발치는 상황입니다.”
“…….”
“이를 근거로, 먼저 다녀오신 장희강 협회장님께서 현재 무탈하다는 모습을 보여 주길 바란다는 정부 측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내가?”
장희강이 실소했다. 직원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직접 찾아가서, 멀쩡하다며 머리를 숙이기라도 하라는 건가.”
장희강은 재미마저 느껴진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회상하듯 허공을 쳐다보면서.
직원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에스퍼는 국가 차원에서 중요시하는 병력 자원이었다. 당연히 그 에스퍼들이 집결한 기관인 에스퍼 협회는 본디 정부의 관할이었다. S급 에스퍼 넷이 협회를 독립시키기 전까지는.
정부 측에 남기로 한 에스퍼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에스퍼는 독립한 협회로 적을 옮겼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S급들을 따르는 에스퍼 세력. 차은혁의 가문인 대기업 차화의 후원.
하지만 분리된 뒤로도 정부는 협회를 다시금 자신들의 산하에 두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는 회유를 시도했으나 협회장들이 무시로 일관하자, 이제는 견제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정부가 그들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직급이 있는 협회 관계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쪽에서 자리를 마련했다고 하는데…… 거, 거절하겠습니다.”
장희강은 말없이 서류를 넘겨 보고 덮었다. 직원은 혹시 그가 다른 대답을 할까 싶어 조금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뒤를 돌았다.
문가로 다가서던 와중이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누군가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묘하게 성격이 나빠 보이는 창백한 미남자였다.
“안녕하십니까, 주…….”
“…….”
적색이 도는 눈동자가 저를 훑어보자, 자신도 모르게 말이 끊겼다. 오한이 들었다.
장희강이 휴가 기간 동안 훌륭한 보양이라도 한 듯 낯빛만큼은 나아졌다면, 눈앞의 주청경은 피부색 때문인지 컨디션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 항상 그랬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그렇게 느껴졌다.
얼어붙은 직원을 주청경이 무표정하게 지나쳤다.
“얼굴, 좋아 보이네요.”
누가 들어도 빈정거리는 목소리였다. 직원은 장희강에게 시비를 거는 그의 모습에 동공이 흔들렸다. 혹시라도 싸움이 나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본능이 솟구쳤다.
서둘러 바깥으로 나가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의외로 나는 한 번 정신을 잃고 나서 억지로 깨어나지 않았다. 있는 힘껏 형에게 매달리느라 체력 소모가 컸기 때문일까.
잠든 내 몸에 대고 무슨 짓을 했을지 알 길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새벽빛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며칠을 누워 있었는지 온몸이 뻐근했다.
나는 격렬히 뒹굴었던 흔적이 싹 사라진 침대에, 말끔해진 몸으로 누워 있는 상태였다.
형에게 단단히 끌어안긴 채.
놀라운 사실은, 형이 잠든 상태라는 것이었다. 성인이 되어서 처음 보는 모습이다. 신기하게 형을 응시했다.
얼마나 정신적으로 몰려 있었으면 이렇게 푹 잠들었어.
반듯한 이마에서 이어지는 콧날과 입술, 날카로운 턱을 손끝으로 쓸었다. 눈에 띄게 야윌 만큼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게 안쓰러우면서도 나쁘지 않다.
문득, S급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게 된다.
나에 대한 기억을 잃은 채로 지내다가, 별안간 세상이 바뀌고 과거도 바뀌었을 테다. 원수였던 이들과는 같은 길을 걷고 있고. 그 모든 걸 인지함과 동시에 나와 관련된 기억도 전부 되찾았으니까…… 혼돈도 그런 혼돈이 없었겠지.
하지만 그러한 기현상 속에서도 말이 안 되는 속도로 나를 찾아냈다. 그들의 사고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려 주는 대목이었다. 그 소름 끼치는 능력과 집착력이 내게 희열을 안겼다.
원래도 미친 인간들이 더 미쳐 가지곤, 손잡고 나를 공유할 생각이라니.
찰그랑.
“…….”
내 손목에서 흘러내린 사슬이 번뜩였다. 충분히 적극적으로 굴었던 것 같은데, 이건 언제 풀어 주려고 그러지. 계속 달아 두고 있을 건가.
말끄러미 손목을 내려다보던 순간이었다.
큼직한 손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움찔했다. 눈을 뜬 형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일어났어.”
듣기 좋게 가라앉은 음성이 울렸다. 나른하게 풀린 흑안에는 감출 수 없는 애정이 눌러 담겨 있었다.
“……방금.”
잔뜩 맛이 간 목소리로 대답하자, 형이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대로 잡아당겨 나를 자신의 품에 더 밀착시켰다. 웃통을 벗고 있어 노출된 흉부가 뺨에 닿았다. 심장의 고동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맞닿은 체온에 몸이 뜨끈뜨끈하게 녹는 것만 같았다. 나는 팔을 움직여 넓은 등을 마주 안았다.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는지 형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에 어깨가 간지러웠다.
“목 아플 테니까 물부터 마시자.”
집어삼킬 것처럼 굴었던 때가 언제냐는 듯, 꿀이라도 발린 것 같은 태도였다. 음……. 엄청 즐겼나 본데.
형이 상체를 세우고 등을 돌렸다. 미리 준비해 둔 물을 컵에 따르더니, 내 허리를 감싸 일으킨다. 기력이 부족해 시들시들한 몸이 형에게 안겼다.
형은 친히 입가에 물잔을 대고 기울여 주었다. 이런 식의 보살핌은 이제 익숙했다. 얌전하게 물을 받아 마셨다.
소화를 돕기라도 하듯 따뜻한 손으로 내 등을 쓸어 주었다.
마치 과거의 다정하기만 했던 형 같았다. 감정의 형태가 걷잡을 수 없게 비틀렸다는 걸 아는데도, 깜빡 속아 넘어갈 뻔할 정도로.
……아니지. 속아 넘어간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난폭하든 다정하든, 내게 보이는 어떤 행동도 거짓된 건 아니니까.
“차은수.”
형이 나직이 나를 불렀다. 굵은 눈썹 아래 자리 잡은 흑안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나는 그 눈을 쳐다보았다.
“응.”
“형은 너 없으면 안 돼.”
일순 말문이 턱 막혔다.
갑자기 뭐야.
“넌 여전히 내 동생이야. 내 가이드고. 다른 누군가를 구원했어도 그 사실은 안 변해.”
눈빛이나 행동으로만 표현하던 감정을 언어로 풀어낸다.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고,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제 집착에 내가 놀라건 말건 이제는 괘념치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다시 도망치더라도.”
일부러 사슬을 스치고 올라온 손이 내 손목을 움켜쥔다.
살벌한 고백이었다.
……시발, 설레게.
“형…….”
나는 고개를 저으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내가 어떻게 또 그래. 난 오히려……. 지금 나한테는…….”
목멘 소리로 띄엄띄엄 말했다.
“나한테도 형이 전부야.”
“…….”
“형이 계속 날 필요로 한다는 게 기뻐.”
날 구해 준 사람에게 내가 아직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받고 안심하는 것.
자연스러운 반응 아닐까.
형 시점에서 현재의 나는, 장희강에게서 형이 나를 구출해 주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상황이니까.
……노림수에 걸린 척도 해 줘야 하고.
가이딩 전에 형이 무슨 생각으로 내게 가족들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지 않는다. 단순히 상처를 주려는 의도만은 아니었을 거다. 가족 중에서 오직 자신만이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키려던 심산이었겠지.
근데 이래 놓고 다른 S급에게 나를 넘길 때는 어쩌려고 그러나. 형이 날 구해 주었다는 게 아니라는 사실 또한 내가 필연적으로 깨닫게 될 텐데.
그런 상황이 닥쳐 배신감에 절망하더라도 결국 자신에게 의존할 거라고 예상하는 건가.
형의 시커먼 속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늠해 보았다.
“……미안해. 너무 이기적이지.”
나는 형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는 듯 푹 숙였다. 하지만 곧 턱밑으로 들어온 손길이 다시 고개를 들게 했다.
형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다.
내가 꺼낸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জীয়াই থাকি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