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가 사각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소리가 멈추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심태성과 눈이 마주쳤다. 드로잉 북과 연필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림 그리세요?”
“예. 혹시 시끄러우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듣기 좋았는데.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들 있잖아. 빗소리, 키보드 소리, 이런 거……. 그림 그리는 소리도 나쁘지 않네. 잠기운이 남은 머리로 몽롱하게 생각했다.
뻐근하고 무거운 몸을 힘겹게 움직여 심태성이 있는 방향으로 돌렸다. 심태성은 물건들을 자기 옆쪽으로 치우고 내 몸을 가볍게 들어 안았다. 건장한 육체가 나를 안정적으로 받쳤다. 속옷조차 입지 않은 서로의 나신을 밀착하여 체온을 나누었다.
내 이마며 눈가, 볼에 간지러운 입맞춤이 떨어졌다. 점점 정신이 맑아졌다. 나는 손을 뻗어 심태성의 뺨을 붙잡았다.
“그리신 거 보고 싶어요.”
물끄러미 쳐다보며 요구하자, 그가 망설임 없이 드로잉 북을 집어 내밀었다.
하얀 종이 위를 채운 것은 깊게 잠들어 있는 내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림도 잘 그렸지. 이건 뭐, 거의 실물이네. 나는 심태성의 뛰어난 그림 실력을 새삼스럽게 인지하면서 천천히 페이지를 넘겨 보았다.
그리고 다음, 또 다음 페이지. 내가 자면서 뒤척일 때마다 그 순간순간을 그린 것인지 자세가 저마다 달랐다. 몇 장이냐, 이게. 잠도 안 잔 거 아냐? 퀄리티가 대단해 보이는 그림을 많이도 그렸다는 생각을 하며 한 장 한 장 살펴볼 때였다.
“제가 도련님 모습을 더 많이 손에 익혔다면.”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심태성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을 잊어버린 이후에도,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떠올라서…… 그림으로나마 되새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존재가 잊힌다는 것은 그 존재에 대한 기억, 자취,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의미일 테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돼, 그게.
그런데 마치 내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심태성이 말을 이었다.
“저는 항상 제 곁에 도련님이 계신 것처럼 느꼈습니다.”
“……!”
“그러니 분명 가능했을 겁니다.”
……환각까지 겪었단다.
시발, 불쌍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드로잉 북을 무릎 위로 내려 두고 심태성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심태성은 애정을 갈구하듯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노출된 피부를 따뜻한 숨결이 물들였다.
한동안 말없이 그대로 있다가, 내가 먼저 정적을 깼다.
“가끔 꿈에 모르는 사람들, 모르는 장소가 나왔어요.”
한쪽 손을 들어 심태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중 이렇게 짧은 머리에, 큰 체격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정중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그가 당신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나도 너를 떠올렸었다고 고백하는 이야기였다. 심태성이 고개를 들어 나를 돌아보았다. 두 눈이 커져 있었다.
나 역시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본 채로 작게 속삭였다.
“미안하고 그리웠던 것 같아요.”
“…….”
“경호원님이 떠오를 때마다, 그냥 아파서…….”
흐려지는 말끝에 내 몸을 휘감은 팔뚝의 완력이 강해졌다.
“……도련님.”
온갖 감정의 격랑이 흑갈색 눈동자 안에서 휘몰아쳤다. 쏟아 내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그 눈이 맞닿을 기세로 가까워졌다.
부드럽지만 힘 있게 입술이 겹쳤다. 다른 부위에 쪽쪽거리며 남겼던 입맞춤과는 달랐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머금으려 들다가, 벌린 틈으로 내민 혀를 마찰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습한 살덩이를 빨아 당겼다.
먹먹한 감정이 교류되는 키스가 길게 이어졌다. 심태성이 내 몸을 돌려 안았다. 내 하체 위로 대충 걸쳐져 있던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양쪽 팔을 교차해 단단한 목을 끌어안자, 홀린 듯이 내게 빨리던 두꺼운 혀가 슬그머니 움직이며 점막 사이사이를 유영했다. 초콜릿이라도 녹여 먹는 것처럼 구강 전체를 핥아대는 혀 놀림에 아랫배가 야릇하게 당겨 왔다.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심태성은 이미 좆을 세운 지 오래였다. 내 배를 문지르는 딱딱한 좆대를 느끼며 눈을 떴다.
“……음.”
심태성이 목울대를 움직이며 침음 비슷한 소리를 흘렸다. 깊게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선명한 애욕과, 어쩐지 난감함이 공존하는 눈길로 나를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허기지진 않으십니까.”
가라앉은 목소리가 물었다.
“식사 먼저 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뭔……. 자신의 거근이 그 위용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는데도 밥부터 먹게 하려는 인내심을 보인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분명 나를 위하는 태도라서 나쁘지만은 않은데, 참을 수 있을 정도인가 싶어 살짝 자존심이 상하는…… 아무튼 존나 묘한 기분이었다.
심태성은 조심스럽게 나를 내려 주고 침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정말로 밥 먹을 준비를 하러 간 것이다. 좆 식는 데에 시간 꽤 걸릴 텐데……. 나는 허탈함을 티 내지 않고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격정적인 섹스를 한 여파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심태성이 내 몸을 깨끗하게 씻겨 준 상태였지만,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싶었다.
“…….”
욕실 거울로 스스로를 당면하자마자 흠칫했다. 얼룩덜룩하게 페인트칠이라도 한 것처럼 멀쩡한 구석이 없었다. S급들과 몸을 섞으면 멍은 진짜 기본으로 먹고 들어간다.
가장 심각한 곳은 역시 유두였다. 심태성답게 젖꼭지를 얼마나 혹사했는지 아직도 통통하게 부어 있었다. 색도 좀 충혈된 것 같고.
이거……. 옷 입으면 자꾸 스쳐서 괴롭겠는데.
몸을 씻고 준비되어 있던 옷을 챙겨 입은 직후, 그 불길한 예상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걸음을 뗄 때마다 보드라운 재질의 상의 안에서 돌기가 스치면서 쭈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거실로 나갔다.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솔솔 자극했다. 식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탁상을 빼곡히 채운 요리들이 보였다.
“앉으십시오.”
앞치마를 풀어 낸 심태성이 내 자리의 의자를 빼 주었다. 다 직접 하는 건데 어떻게 매번 이렇게 가짓수가 많나 모르겠다. 내가 의자에 앉자 심태성도 맞은편을 차지했다.
반찬이며 국이며 하나같이 신선하고 맛있었다. 내가 짠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심태성은 전체적으로 간을 약하게 맞추었다.
이전까지는 식사 시간이 숨 막힐 정도로 조용했다면, 이번에는 짤막한 주제들로 대화가 오갔다. 영양가는 없지만 그만큼 진지하지도 않아서 부담이 없는 잡담이었다. 나는 조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심태성에게 앞으로의 일에 관해 아무런 질문도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물을 한 모금 마시고서 머뭇거리며 운을 뗐다. 심태성이 내 얼굴을 응시했다.
“이제 저한테 도련님이라고 안 부르셔도 되지 않을까요.”
지금의 나는 경호 대상인 도련님도 아니고, 심태성은 경호원이 아니다. 감금이라는 수단을 통하기는 해도 본질적으로 보호하고 보호받는 관계임은 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심태성은 호칭의 재정립이 꺼려지는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경호원님?”
의아함에 심태성을 부른 나 또한, 방금까지 쓴 호칭이 아닌 어떤 호칭을 골라 써야 할지 감이 안 잡혀 입을 다물었다. 태성 씨는 뭔가 조금 그래. 태성이 형도……. 부르다 보면 적응이야 되겠지만 당장은 너무 낯설어서.
으음……. 이대로도 딱히 상관없나.
“원하시는 호칭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건 아니에요.”
“그럼 생각나면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도련님께서는 편히 불러 주셔도 됩니다.”
나는 일단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어난 터라 점심을 챙겨 먹은 셈이 되었다. 심태성은 슬며시 거실의 TV를 틀어 두고 주방으로 돌아가 남은 식자재 따위를 정리했다.
원래라면 지금은 나 혼자 조용한 거실에서 멍하게 앉아 있던 시간대였으나, 심태성은 분위기가 미묘하게 풀린 내가 영상 매체라도 접하면서 활력이 돋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주청경 때는 못 누렸을 평범한 생활을 보내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형이나 심태성이나 참 무르다. 유폐한 대상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는 해 주다니. 누구처럼 정보란 정보는 전부 차단하고 오직 저 하나로만 일상을 꽉꽉 채우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향수 브랜드 멜엔의 대표이자, 상원에이치 그룹 서찬웅 회장의 손자인 서준호 씨가 현재 위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어?
눈을 깜빡이며 상념을 멈추고 화면을 쳐다보았다. 익숙한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따라서 응급 처치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혹이 일고 있습니다. 해독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관계자의 의견에 따르면…….
보도 자료로 띄워진, 화면의 일부분을 차지한 얼굴은 방금 들은 이름과 일치했다. 내 기억보다는 더 성숙해진 모습이지만 서준호가 맞았다. 친구였던 녀석을 갑자기 방송으로 맞닥뜨리게 되어 잠시 머리가 굳었다.
‘그날 아침부터 기억이 없어……. 이게 말이 되냐고!’
정신적으로 무너졌던 서준호의 모습을 묻어 둔 마음 한구석이 거칠게 파헤쳐졌다. 너는 살아서 불행 중 다행이라고, 미안하다고 뒤늦게 연락해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