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단편이 떠오른다.
‘아무튼 서로에게 반감이 없다면 다행이네요.’
서준호에게 줄 선물을 고르러 외출하던 날. 다소 서먹했던 차내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린 타이밍이었다. 나는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안심했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그때 심태성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적어도 제 쪽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태도였을까.
……사람 일은 모르는 건데.
내 쪽에서 먼저 도와주겠다고 손길을 내밀고는 그대로 튀어 버린 것처럼 보였을 테니, 그 허무감과 배신감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을 거다. 회귀 전의 기억까지 돌아왔다면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만일 내가 심태성의 입장이었다면…… 증오마저 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를 데리러 왔을 때, 심태성의 표정은 내가 예상한 그 어떤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가 엿보이기는 했지만 날 향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가이드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솟구쳤을 갈증이나 욕구보다도, 내 상태에 대한 걱정이 확연히 앞선 얼굴이었다.
실은 멀쩡하던 내가 일순 스스로의 상태를 착각할 정도로 말이다.
“……도련님.”
“…….”
덕분에, 피폐해진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훨씬 수월히 몰입할 수 있었다.
침잠한 눈으로 심태성을 쳐다보았다. 심태성의 집에 도착한 나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옷을 입고 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하도 맨몸으로 지냈었다 보니 옷의 촉감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널찍한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내 몸을 적셨다. 칙칙한 장소에 갇혀 있던 내게 자연광은 꽤 귀한 것이었다.
“아픈 곳은 없으십니까.”
창문을 등지고 내 앞을 지키던 심태성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표정 없는 내 얼굴을 가까이서 살피는 그의 낯에 잠시 음울함이 스쳤다.
나는 가만히 말문을 열었다.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스스로가 듣기에도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대답이 전부였다.
“…….”
“…….”
입을 다물고서 조용히 창밖을 응시했다. 심태성 역시 침묵했다. 정신이 망가져 보이는 나를 배려해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양방의 묵언으로 인해 쥐 죽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다시 심태성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흑갈색 눈동자는 내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의 앞으로 천천히 두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의미인지, 안으라는 의미인지 애매한 동작이었다.
“가이딩, 해 드릴까요.”
당신이 주청경에게서 날 구해 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당신 또한 다른 세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나를 감추고, 나누어 갖고, 각자의 방식대로 다루려는 계획임을.
그에 굴하지 않으려는 의지나, 현실을 부정하려는 의지 같은 건 이제 나에게 조금도 남지 않았다. 너무 지쳐서 그냥 전부 받아들이고만 싶었다. 어차피 형에게 그러했듯 당신에게도 죗값을 치러야 옳다. 배신감을 느끼기에는…… 당신이 내게 느꼈을 배신감이 더 처절했을 테니까.
그런 문드러진 체념을 눈빛에 정성스럽게 녹여 냈다.
의미를 제대로 읽었는지 심태성의 얼굴이 얼어붙는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손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저는…….”
심태성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가이딩을 목적으로 도련님을 모셔 온 게 아닙니다. 제 상태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말이라도 감동적이네.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 나는 심태성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제가 불편해서 그러신 거면 편하실 때 하세요.”
“……!”
“잠든 상태에서도 괜찮아요.”
마치 나 자신을 가이딩 기계로 취급하는 듯한 발언에 심태성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만면에 번져 나가던 충격이 분노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일그러지는 그의 표정을 시야에 담다가, 나는 심태성이 내 예상보다 더 순진하다는 것을 느꼈다.
장희강과 주청경이 본디 어떤 인물인지 알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들일지라도 가이드인 내게 가혹히 대하지 못하리라고 여긴 모양이다. 이를테면 나체인 상태로 철창 안에 가두는 짓 말이다. ……최소한의 선은 지키고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할 줄 알았으려나?
내가 어느 정도 즐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심태성은, 누적된 살의를 참아 내느라 입을 악다물 뿐이었다.
“도련님께선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될 존재가 아니십니다.”
험악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깃털 같은 손길이 내 손목을 잡아 내린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말씀하지도 마십시오.”
“…….”
나는 사고하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여전히 텅 빈 얼굴로 심태성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무기력하게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내 소매 위를 덮은 심태성의 큼직한 손이 눈에 들어왔다. 피부 간의 접촉을 피하려는 의지가 명명백백 드러난 모습이었다.
용케도 참는다. 서슴없이 가이딩을, 나아가 육체 자체를 부숴 버릴 기세로 취했던 이들과는 확실히 다른 자세였다. 심태성 또한 당장 가이딩을 받고 싶어서 안달 났을 게 분명할 텐데…….
처음부터 내 시선을 앗았던 버석하게 갈라진 입술과, 눈동자 주변으로 붉게 선 핏발만 보아도 심태성의 파장 상태가 최악임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괴물 처치와 뒤처리에 그의 힘이 제일 많이 필요했을지도 모르지.
……여전히 혀를 내두를 만한 인내심이었다.
이후로도 심태성은 나를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 대했다. 주청경에게 납치된 나를 구해 내어 케어했던 때는 조금 저돌적인 면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정말 보는 내가 다 스트레스를 받을 만큼 극도로 조심스럽게 굴었다. 본인과 닿지 않게끔 주의하느라 더욱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안 좋은 생각을 품을까 염려되는지 씻을 때마다 항상 욕실 근처에서 서성였고, 식사 시간에는 나이프나 포크를 포함해 그 어떤 날붙이도 근처에 두지 않았다. 섣불리 말을 걸지는 않았으나 시선이 늘 나를 좇았다. 같은 집 안에 있는 이상 온 감각이 곤두서 있을 심태성에게 내 모든 행동이 살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친 구속감은 느끼지 않게끔 내게 혼자만의 시간도 안겨 주었다. 주로 침실에서 잠을 자거나 거실에 앉아 멍하니 볕을 쬘 때가 그러했다. 분명 함께 실내에 있기는 한데, 당최 어디로 모습을 감췄는지 모르겠는 심태성의 노력이란……. 어떻게 해야 내게 더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는지 극심히 고민 중인 것이 그대로 비쳐서 문득문득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심태성이라고 내게 할 말이 없지는 않을 테다. 성격상 노골적인 원망을 퍼붓지 않고 있는 것이라 해도, 일말의 서운함이나마 꺼내 보일 법했다. 그런데 자기 감정 따위는 내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구는 그의 모습에 대단한 희열이 밀려오면서, 내가 주청경의 변태스러움을 욕할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통감했다.
“왜…….”
나는 설핏 혼란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내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여긴 상대가 계속 나를 보듬으려 든다. 벌써 며칠이 지났건만 손 한 번 잡지를 않았다. 나를 맡고 있을 시간은 심태성 또한 제한되어 있을 텐데 말이다.
혹시 내게 가이딩을 바라지 않는다던 말이 진심일까. 선의의 거짓말이 아닌 건가. 의식적으로 비웠던 머릿속에 서서히 의문이 피어오르는 척, 심태성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왜 참으세요?”
“…….”
“지금 괴로우시잖아요.”
S급들 모두가 그러했지만, 구태여 따지자면 중년에 접어든 장희강의 파장 상태가 가장 끔찍했었다. 그러나 현재 심태성의 징후를 두고 짐작해 보자면 그가 혹시 장희강보다도 상황이 나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외적인 증상을 떠나서, 간혹 혼탁해진 눈으로 인상을 한껏 찌푸리는 모습을 목격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이라도 하듯이.
그럴 때마다 어느 정도로 사정이 안 좋은지 새삼 인식하게 되는 탓에 솔직히 가슴이 철렁했다.
“도련님만큼은 아닙니다.”
심태성이 미련하게 대답했다. 그에 떨리는 목소리로 받아쳤다.
“경호원님 뜻대로 하셔도 된다고 했잖아요, 제가.”
“……그러지 않겠다고 답해 드렸습니다.”
심태성의 다부진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모양이 고스란히 보였다. 하마터면 흠칫할 뻔했다.
“그럼 왜 데려오셨어요.”
고개를 저으면서 물었다.
“이해가 안 돼요. 가이딩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을 거면 대체 왜 데려오신 건지.”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변해 간다.
“더는 기대하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또 위로받으면 다시 아파질 거잖아요.”
형을 통해 겪은 바가 있던 나는 기어코 눈시울을 적셨다. 심태성도 내가 말하는 아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을 테다.
“차라리 경호원님도 똑같이 대해 주세요.”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으려 하지 말고, 오히려 더 덧입혀 달라고. 본인의 욕망대로 나를 휘두르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회복이 빠르면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울 테니 심태성의 다정한 행동에 동요한 척, 어차피 내가 강제적으로 귀속된 상대는 그뿐만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다는 걸 드러냈다. 심태성이 욱할 만한 포인트를 꼬집어 자극하는 방법이야말로 가이딩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