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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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이 나를 부른 게 정말 단순히 사죄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
의도가 있었겠지.
희생을 무릅쓰고 두 세계를 융합해, 나와 S급들을 다시 붙여 둔 시스템이다. 그 정도로 집착이 강한데 제가 사라진 이후의 세계는 염려를 안 하겠냐고.
그러니 나한테 자신의 소멸을 알리고 증명함으로써, 내가 시스템이 짜 둔 새로운 판 위에서 움직이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도록 안배한 거다.
거부감 없이 적극적으로 S급들을 케어하게끔.
……어쩌면 진짜로, 그저 나를 속인 것이 미안해서 부른 걸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죽기 전에 변하듯이 말이다.
뭐, 나도 용건은 끝냈다.
보험이 될 힘을 받아 냈으니까.
“…….”
눈을 떴다. 캄캄한 방 안에는 여전히 나뿐이었다.
내 몸을 더듬어 보았다.
전이될 때만 기이한 감각이 들었지, 지금은 잠잠했다. 가이드로 발현했을 때처럼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다.
써 봐야지 알겠네.
바깥에는 소설 보는 취미가 없다고 하고 다녔지만……. 그건 대화를 하다 보면 취좆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었고, 나는 한때 웹소설을 즐겨 봤다.
보통 판타지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신 같은 상위 개체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당당히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욕을 하는 모습들이 참 대단해 보였다. 저 정도 담력은 되어야만 주인공 하는구나 싶었지.
그런데 직접 겪어 보니 못할 건 없더라고.
그쪽에서 잘못한 게 있다면 정당히 보상하는 게 맞잖아?
생각보다 순순히 넘겨주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입으로만 때우려던 시스템에게서 남은 권능을 뜯어내니…….
사실 그렇게 행동한 것 자체로 기분이 꽤 나아졌다.
이곳에 감금된 이후, 장희강과 떡칠 때 외에는 별로 느낀 적 없던 즐거움이었다.
‘앞으로는 제 욕심이 개입되지 않은, 행복한 여생을 보내시길 바라요.’
……여생이라.
물끄러미 천장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 넓은 침대 위에서 혼자 누워 있는 내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많은 생각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시스템의 부름에 응하기 전까지 생각했던 대로,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면 될 일이었다.
시스템은 소멸했고 이 세계는 여전히 S급들이 없으면 멸망한다. 그들은 나를 갈구하며,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니 상부상조할 수 있는 셈이다.
자기들끼리 번갈아 나를 점유할 계획을 세웠다던데, 내 쪽에서도 기껍게 어울려 주며 넷을 보살피면 된다. 어렵지 않지.
어차피 지금도 장희강과 즐기고 있었던 참이고.
다음은 누구일까.
내가 자의로 도망친 줄 알고 돌아 버렸다는 다른 셋. 그들은 어떻게 나올지 상당히 기대되었다.
그리고 이 기대감을 지키기 위해, 제3의 눈은 가급적 쓰지 않을 예정이었다.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
괴물의 사체를 분석하는 연구소.
심태성이 운반한 사체와 오랜 시간을 보내던 연구원들은 저녁 식사를 위해 지상층으로 올라갔다. 구내식당은 한창 붐비고 있었다.
식판을 채워 자리에 앉은 연구원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지 않아?”
“뭐가아.”
퀭한 얼굴의 동료가 국을 한 숟가락 뜨며 반응했다.
“이번 개체, 그렇게 특별한 게 없잖아. 결과가 거의 다 나왔는데.”
“늘 비슷비슷했는데 뭐.”
“그럼 왜 저거 잡으려고 셋이나 갔었대?”
“셋? 무슨 셋.”
“S급 에스퍼들 말이야.”
“……그랬어?”
피로한 얼굴에 생기가 스쳤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우르르 나타났다고?”
차원이 다른 능력치를 갖춘 까닭인지, 괴물을 단독으로 상대하던 이들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함께 움직였다니. 흥미로운 정보였다.
“장희강 빼고 셋이 다 나타났다더라.”
“아, 생각해 보니까 사체 운반은 심태성이 했어도……. 공격은 전부 차은혁이 했댔지.”
여러 차례 봐 왔기에 약간 면역이 되었지만, 몹시 끔찍하게 죽은 괴물의 상태를 떠올리며 두 연구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S급들이 괴물 잡는 괴물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 중 하나였다.
입맛이 떨어진 그들은 자연스럽게 식사를 멈추었다.
“그럼 나머지 한 명은 주청경이라는 거네.”
실제로 마주친 적이 없지는 않지만, 다른 세계 사람 같이 느껴지는 존재들이다. 존칭 따위는 생략한 연구원들이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렇지. 거기서 구사일생했다는 고등학생이 글 올린 게 있는데, 그렇게 셋을 실물로 본 경험담이기도 해서 엄청 떴어.”
“궁금하다.”
“음…….”
말을 꺼낸 연구원은 ‘ㅈㄴ 멋있었음 ㅅㅂ’ 문구로 거의 도배가 되어 있었던 게시글 내용을 떠올렸다.
“특별한 건 없었던 것 같아. 자기 목숨 살려 줬다고 엄청 고마워하는 내용 위주에, 같은 남자가 봐도 다 잘생겼다는 찬양 정도? 그리고……. 잘 기억이 안 나네. 주청경이 빨리 끝내야 한다는 소리를 했다던가.”
실제로 이번 전투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끝났다.
“싸우는 시간이 길어져 봤자 피해만 늘고 좋을 게 없으니까, 그건 당연하지 않나.”
“그러게. 어쨌든 지금은 그 글 못 봐. 삭제됐거든. 협회에서 에스퍼들에 대해서 떠드는 글들 철저히 관리하잖아. 특히 S급 일이라면 장난 아니고.”
유명한 만큼 그들에 대한 목격담, 비방, 추측성 게시글은 매일 수많은 커뮤니티에서 올라왔다. 개중 선이 넘는 경우는 에스퍼 협회에서 귀신같이 발견해 글을 내리게 만들거나 법적 조치를 취했다. 기사나 댓글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중들은 우스갯소리로 협회를 일 잘하는 연예기획사 못지않은 곳이라고 표현하고는 했다.
“아니, 단순 칭송글이었다며.”
“맞아. 근데 아무래도 S급들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까, 눈살 찌푸려지는 댓글들이 많이 달리긴 했었어. 뭐, 본인이 그냥 삭제한 걸 수도 있고.”
“아이고, 참나. 사람들 이해가 안 돼, 진짜.”
퀭한 연구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통 성격 나빠 보인다고 욕하는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장 앞장서서 괴물들 막아 내는 영웅들이잖아.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이 여태 얼마나 많아. 거기다 무슨 살갑기까지 하길 바라냐.”
최근 연구소에 방문했던 심태성을 떠올렸다.
괴물이 어떤 식으로 공격해 오고 누구에게 처리되었는지, 특이 사항은 없었는지 등 의례적인 질문이 가득한 서류를 제출하던 그는 S급 중 그나마 인상이 나았다. 눈꼬리가 약간 처져서 그런가. 게다가 딱 필요한 말만 하기는 해도 충분히 정중한 성격이었다.
건조한 낯과 무거운 분위기는 다른 세 명과 다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애초에 성격이 좋을 수가 없지. 등급이 너무 높아서 매칭될 만한 가이드가 없으니깐. 에스퍼들은 가이딩 못 받으면 엄청 괴롭다더만.”
“내 말이. 그런 거 필요 없는 우리 같은 일반인은 축복받은 거야.”
잠시 숙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근데 그래서……. 셋이 모였던 이유가 뭘까. 장희강만 없고.”
질문을 받은 동료가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도 궁금하다는 의미였다.
“……어.”
이내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거기가 장희강 사저 근처 아니었나?”
***
짙은 푸른색 차량이 번화가를 지나 한적한 길로 빠졌다. 머지않아 어둑하고 고요한 건물이 나타났다. 근처의 차고에 미끄러져 들어간 차가 멈추어 섰다.
곱게 포장한 꽃다발과 케이크를 든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사랑스러운 기척이 느껴져야 하는데, 안정화된 파장은 그것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는 구둣발 소리를 내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자 유리문이 나타났다.
우우웅.
생체 인식이 완료된 문이 진동을 울리며 열렸다. 기척을 감지한 센서로 인해 조명이 켜지고, 어두웠던 거울 방이 환해졌다.
침대 위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던 차은수가 눈을 찌푸렸다.
“왜 안 자고.”
장희강이 사뭇 다정하게 물으며 다가갔다.
“내가 없을 때는 자는 게 좋을 텐데.”
“……잠이 안 와서.”
차은수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장희강은 근처 협탁에 케이크를 내려 두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하얀 이마에 입을 맞췄는데, 여태 훨씬 더한 행위도 반복적으로 거쳤던 탓에 반항기를 보이지 않았다. 그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머금어졌다.
이렇게 말을 잘 듣기 시작했건만.
벌써 약속된 시간이 끝나간다.
물론 자신의 차례가 다시 돌아올 테지만, 눈앞의 아이가 일정 기간 다른 에스퍼들의 가이드가 된다는 사실은 피를 거꾸로 솟게 만들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이라도 동맹을 맺은 상대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싶다.
차은수가 오로지 제 손아귀에만 잡혀 있길, 제 손길만 타고 제 품 안에서만 울기를 바랐다.
그러나…….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이들과 손을 잡는 편이, 가장 안전하게 가이드를 지키는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전 세계의 에스퍼와, 괴물.
양쪽 모두로부터 말이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공평하게 가이드를 독식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장희강은 들끓는 살의를 억누르며, 차은수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생화 향이 풍겼다. 차은수의 눈이 절로 꽃다발에 내리꽂혔다.
“이건…….”
흐드러지게 포장된 보라색 꽃이었다.
“늦었지만 기념하고 싶더구나.”
장희강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걸.”
뒤섞이고 변화한 이 세상은 바로 차은수의 원래 세계이기도 했다. 더 이상 차은수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다.
그러니 이제는, 비로소 함께라는 기쁨을 기념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차은수의 반응을 살폈다.

জীয়াই থাকি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