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공동생활을 시작했으나 별다른 수칙을 정하지는 않았다. 집주인들에게 그럴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을 뿐더러, 그들은 어차피 차은수가 존재하는 이상 평화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소한 마찰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방금처럼 대화를 나누기만 해도 서로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는 관계였기에.
차은혁과 주청경이 서로를 사물 취급하는 동안 시간은 꾸준히 흘렀고, 심태성과 장희강이 귀가했다.
“예상은 했지만 거슬려.”
장희강이 재킷을 벗으며 말했다.
“협상을 걸어오더군. 차은수의 존재를 기밀에 붙이는 조건으로 능력을 빌려 달라고.”
정부에서 날아온 연락을 무시한 경우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자 그간의 경험 탓인지, 이번에는 대놓고 협회로 사람을 보내 왔다.
그조차 무시로 일관하려 했으나, 로비를 지나치던 저를 붙든 상대가 차은수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으려 한 순간…… 하마터면 장희강은 상대를 그대로 즉살할 뻔했다.
정부 관계자는 차은수가 협회 소속이니, 협회 내에서 그를 언급하는 데에 문제가 없으리라 여긴 것이 아니었다. 차은수의 존재 정도라면 협회에서도 극비리에 소속되어 소수에게만 알려져 있을 확률을 충분히 계산해 보았을 테니까.
결국 자신과 말을 섞을 의도로 도발한 셈이었다.
심기가 불편하다 못해 살의가 솟구치는 상황에서, 그 원인인 대상에게 시간을 내어 주는 일은 상당한 고행이었다.
“……무력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겠지.”
장희강은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이에 주청경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뜻이 통했네요. 기쁘진 않지만.”
“…….”
“…….”
차은혁과 심태성이 엇비슷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를 힐끗한 주청경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다 죽이는 것까진 아니어도 말입니다. 효과 좋은 협박이라도 한다든지.”
“협박이라…….”
“목숨이 걸리면 입을 다물기 마련이니까요.”
차은혁이 침묵을 지키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국가의 기능을 상실하지 않는 선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탐욕에 눈이 뒤집힌 이들은 자신들로 족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결정권을 가진 쪽은 우리가 아닙니다.”
돌연 심태성이 입을 열었다. 세 쌍의 눈길이 그를 향했다.
“저들이 요구하는 건 엄연히 도련님의 능력이니, 결정 역시 도련님의 몫입니다.”
차은수에게 상황을 전하고 그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심태성이 주청경을 돌아보았다.
“더 이상 억압은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태도를 계속 고수한다면, 도련님께서 저런 부작용을 안고도 이쪽에서 벗어나려 들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마십시오.”
벗어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차은수가 어디를 가더라도 같은 세계에 있는 이상 반드시 찾아낼 수 있었으니까. 그를 찾아 온 세상을 뒤져 보았던 경험이 있는 에스퍼들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차은수가 피를 토할 정도로 괴로워하고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 되는 부분이 문제였다. 아픔은 대신해 줄 수가 없고, 죽으면 되살릴 수 없다. 두려움이 거세된 것처럼 살아왔던 장희강이나 주청경 또한 차은수가 잘못되는 경우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 말뜻은, 이제 와서 자유라도 주고 활보하게 두자는 것 같은데.”
장희강이 말문을 열었다.
“저 성격에 도울 수 있는 이들이라면 돕겠다고 나설 텐데. 그걸 마냥 지켜보겠다는 이야기로 들려. 위험을 방지하겠다고 위험에 몰아넣자는 말인가?”
“안 돼.”
동일하게 생각한 차은혁이 일축했다. 차가운 눈동자가 심태성을 노려보았다.
“마찬가지입니다.”
주청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심태성 씨. 속죄라도 하고 싶습니까?”
“……!”
“아니면, 은수 씨에게서 받은 애정이 그렇게 달던가요.”
이내 심태성의 앞에 멈추어 선다.
“근데 우린 그 애정이란 걸 포기할 정도로 은수 씨를 원해서요.”
“…….”
“단지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여기까지 왔죠. 그건 당신도 다를 바가 없었잖습니까. 그러니까 혹시라도 마음이 바뀐 거라면 지금 말해 주세요.”
섬세한 낯이 작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방해되기 전에 처리하게.”
제어하고 있던 살기가 폭발할 기세로 넘실거렸다. 위협을 넘어서서 노골적인 전투 의지를 표출하는 모습이었다.
눈썹을 꿈틀거린 심태성이 여차하면 주청경을 낚아채 장소를 이동할 계획을 세운 찰나였다.
달칵. 거실 어느 각도에서나 볼 수 있는 차은수의 침실 문이 열렸다. S급들의 눈길이 일제히 침실 방향을 향했다.
문고리를 잡은 채 서 있는 차은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대화 내용을 엿들었는지 백지장처럼 질린 얼굴이, 어째선지 결연한 기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은 몸 상태 탓인지 심리적인 문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은수야.”
차은혁은 황급히 동생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이 한데 모인 상황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충분히 쉬고 깨어나면 설명하려고 했건만.
하지만 차은수는 팔을 뻗어 차은혁의 접근을 막았다. 차은혁은 심장이 멎는 기분으로 멈칫했다.
장희강이 차은수의 표정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저는…….”
차은수에게서 가늘게 떨리지만 뚜렷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를 지켜 달라고 한 적 없어요.”
거실을 향해 딛는 발걸음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보자마자 살기를 갈무리한 주청경과 심태성의 사이로 걸어갔다. 이후 심태성을 등지고 주청경과 마주 보았다.
또르르 흘러내린 식은땀이 갸름한 턱 끝에 매달렸다가 떨어졌다.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요.”
“…….”
“물론 중요하지 않겠죠. 다들 제 의사는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이 놀랍지도 않아요.”
주청경은 자신이 했던 말을 꺼내는 차은수를 조용히 응시했다. 본인의 입으로 직접 그 심정을 들으니, 가슴 어딘가가 불쾌하게 따끔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런 주청경을 맞서듯 쳐다보던 차은수가 이윽고 다른 이들도 둘러보았다. 호흡이 살짝 흐트러졌다.
“근데……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에요.”
고개를 가로젓는다.
“줄곧 그랬어요. 왜 하필 내가 이런 일을 겪는 거지. 다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감정이 북받친 그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너무 힘들고 괴로운데. 답답하고, 숨이 막혀서 견딜 수가 없는데…….”
용기 내어 차분하게 할 말을 하려던 노력에 쩍쩍 금이 가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뻘겋게 벌어진 상처를 모두에게 내보이며, 사람 대 사람으로서 차은수는 소리 죽여 절규했다. 무너진 감정의 둑 위로 엎어진 채 눈물을 쏟아 낸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말을 더 잇지 못하겠다는 듯 펑펑 울기만 하는 모습이 애달팠다. 그를 코앞에서 직시하고 있던 주청경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내려갔다.
차은수가 차은혁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았던 심태성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끝만 움찔거렸다. 안쓰럽게 떨리는 뒷모습을 당장이라도 안아 주고 싶었다.
“…….”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있던 차은혁 역시 고통스럽게 인상을 썼다. 무너지는 동생의 모습에 대고 감히 어떤 말도 얹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석상이라도 된 것 같은 상황에서, 장희강만이 생각에 잠긴 낯으로 차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항하고, 거부하고,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이 술렁거리는 것일까. 남은 기력을 모조리 쥐어짜 얼굴이 붉어질 만큼 울고 있는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뇌리에 박힌다. 짜증이라고 하기에는 그보다 애틋한…… 그렇다고 좋은 것만도 아닌 애매한 기분이었다.
“……!”
가이드 한 명을 두고 굳어 있던 에스퍼들이 눈에 띄게 반응한 것은, 눈물 젖은 얼굴에서 코피가 흐를 때였다.
“은수 씨?”
비틀거리는 차은수를 주청경이 곧바로 붙잡고 살폈다. 후드득 떨어지는 선혈은 굵었고, 계속해서 흐르고 있던 식은땀도 이제 심상치 않게 쏟아졌다. 몰아쉬는 숨에는 쇳소리가 섞여 들렸다.
이내 차은수는 주청경의 품에서 정신을 잃고 늘어졌다.
***
한집 살이라니.
홀로 방에서 깨어나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다소 경악스러웠다. 감시를 강화하려고 내린 조치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해가 되는 점은 특별히 없을 듯했다. 집이라는 건 하나로 정해져 있어야 안정감이 들잖아.
딱히 다섯이 함께하는 어떤 특수한 상황을 기대하는 건 아니고.[남은 부작용 시간은 9분 24초입니다.]
싸우기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에 냅다 끼어들었다. 부작용을 이용했던 열연은 효과적이었다. 나를 좆대로 범하고 가두었던 육체적 강자들이 정신적으로는 내 밑이라는 점을 확신하게 되면서, 나는 짜릿함에 휩싸였다. 이런 종류의 심리적인 쾌감은 돈을 주고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욕망과는 별개로, 이런 식으로 한 번 터뜨려서 구속을 느슨하게 푸는 것은 원래 필요한 일이다. 차후 내가 원할 때 능력을 쓰기 위해서는 S급들의 협조가 필수니까.
물론 원래 권능을 휘두르고 다닐 생각 따윈 없었다. 사용해 본 결과 부작용이 생각보다 끔찍하기도 했고……. 하지만 S급 셋이 살생부에 견줄 수 있는 리스트를 작성하려는 기세라, 아무래도 내가 정부에 협조한다는 명목으로 나서서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서준호를 살리면서 압도당한 이유도 컸다. 권능을 가졌다고 막연히 인지했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죽어가던 서준호를 직접 되살려 보니 이 힘을 아예 쓰지 않는다면 존나 양심에 찔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