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0 0 0
                                    

전투가 종료된 때는 서준호가 기절한 이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괴물이 굉음을 터뜨리며 쓰러졌다. 오롯이 육체적인 힘을 이용해 괴물의 머리를 박살 낸 에스퍼, 심태성이 전투 종료를 알리는 무전을 보냈다. 안전거리를 확보한 채 대기 중이던 수습 팀이 우르르 몰려왔다.
“협회장님, 치료를……!”
“괜찮습니다.”
심태성은 손을 들어 다가오는 사람들을 제지했다. 피부가 녹아내린 것 같은 그의 한쪽 팔뚝에 근심스러운 시선들이 꽂혔다. 물론 그렇게나 근접전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괴물의 피가 튄 부위라고는 그곳이 전부이고, 다른 부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이롭게 여기는 분위기가 더욱 컸다.
심태성이 덤덤히 말했다.
“저는 스스로 해독이 가능하니 생존자 수색에 집중해 주십시오.”
응급 처치는 목숨이 겨우 붙어 있는 일반인들에게나 필요한 것이었다. 퍼지는 독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생존자보다는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아 보였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깔렸거나 어딘가와 충돌해 참변을 당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괴물에게서 분사된 혈액으로 인한 피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는 후회가 머릿속을 스쳤다. 애당초 평소 자신의 방식대로 괴물을 이끌고 인적이 없는 곳에 가서 전투를 치렀다면 인명 피해의 규모가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테다.
하지만……. 파장에 악영향을 끼치는 가장 큰 요인은 능력이다. 현재 그의 파장은 위협적으로 뇌를 감고 있는 줄과도 같아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그 줄을 힘주어 당기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이성과 지성이 산산조각 나기 전에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여기 생존자가 있습니다…….
구조 작업에 몰두한 이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심태성의 눈가가 경직되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흐려진다.
숙면을 취한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파장이 극대화시킨 오감은 모든 것을 과민하게 느꼈고, 진작 한계치를 넘어선 상태였다. 정신은 그 고통을 수용하기를 거부하여 이따금 지금처럼 몽롱해지고는 했다. 몸과 의식이 따로 노는 상황인 것이다.
사방에서 피어오르는 독 연기, 깨진 향수병에서 흘러나오는 향, 의식이 있는 자들의 울부짖음과 비명. 심태성은 실려 나가는 이들 중 제 근처를 스치는 인물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안면이 뒤덮였으나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생존자가 축 늘어진 채 이송되고 있었다.
“협회장님, 오늘 사체 운반은 저희 쪽에 맡기시고 이만 가시죠.”
협회 소속의 후발대 에스퍼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권유했다. 그는 최근 들어 능력의 사용을 삼가는 심태성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표정하고 묵묵했기에 멀쩡해 보이지만, 실은 그 속이 엉망진창일 것임을 같은 에스퍼로서 모를 수가 없었다.
……아니. S급이 겪을 고통의 정도란, 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부탁합니다.”
심태성은 존경과 걱정이 공존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에스퍼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출입구랄 것도 없이 뻥 뚫린 건물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먹을 둔하게 움켜쥐며 기나긴 숨을 내쉰다.
내일.
당장 내일이면…….
***
주청경은 그냥 몰아붙여도 알아서 쾌감을 느끼는 내 몸을 무척 집요하게 탐구했다.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쾌감을 끌어 올리고, 그렇게 해서 성감이 한껏 달아올랐을 때 자신의 욕구 역시 충족했다. 나는 매일같이 감옥이나 다를 바 없는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호화스러운 식사를 하는데도 살이 찔 새가 없었다.
나날이 지쳐 가는 모습을 보였다. 섹스를 할 때는 울며 느끼기 바빠도, 그로 인해 기절하듯 잠들거나 혹은 정말 기절한 뒤 눈을 뜨곤 했다. 그럴 때면 매번 감당하기 힘든 쾌감으로 인해 무너지고 마는 스스로가 수치스럽고, 형에게 버림받은 현실이 아프고 춥다는 듯 계속해서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럴 때면 주청경은 더 울어 보라는 듯 쓰레기 같은 태도로 나를 관망했다.
하지만 내 꼴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이 재미만은 아닌 듯, 미묘하게 애매한 눈빛이 그의 모순적인 속내를 드러냈다.
“…….”
숨이 막히게 고요한 공간을 흘끗 둘러보았다. 모처럼 나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몸을 웅크린 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주청경이 유희에 이용했던 남자는 누구였을까. 당시 상대의 육체가 주청경에게 지배된 상태이기는 했었지만, 아무래도 적나라한 정사 과정을 보였던 내 입장에서는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띠링!
[시스템 동기화 중…….][동기화가 완료될 때까지 권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그래서 제3의 눈을 쓰려고 시도해 봤는데……. 아직 동기화 중이라는 알림창만 뜰 뿐, 능력은 전혀 쓸 수가 없었다. 눈앞에 뜬 창을 유심히 들여다볼 때였다.
철컥,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딜 그렇게 봐요, 은수 씨?”
짧은 질문과 함께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철창 내부로 들어온 주청경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는 돌발 상황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뭘 봤냐고.”
그는 내가 보고 있던 방향을 돌아보며 재차 물었다. 마치 내가 허공을 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들어오면서 봤나……. 시발, 그냥 넋 놓고 있었겠거니 하면 되지.
나는 주청경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위축된 척,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계요.”
공교롭게도 내가 보았던 철창 너머에는 시계가 걸려 있었다.
“시간을 봤어요.”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둘러댄 내용에 주청경이 고개를 돌렸다. 소음 없이 작동하고 있는 시계를 본 그의 낯이 이내 서서히 풀렸다.
“아, 시간.”
“…….”
“난 또.”
주청경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 새끼, 설마 나한테 무슨 능력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의심한 건가? 어쩌면 시스템과 내 관계를 다각도로 추측해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내가 감금 신세를 벗어날 능력을 지녔다면 진작 탈출했으리라 여겼는지, 빠르게 의심을 거둔 눈치였다.
“우리 은수 씨가 혼자 있어서 지루했나 보네요.”
아무것도 없는 철창 안에 나를 가둬 둔 인물이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면서 입을 다물고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개의치 않고 무릎을 꿇은 주청경이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도 은수 씨랑 한시라도 떨어져 있기 싫었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제대로 경고를 해 주려면.”
경고?
“은수 씨.”
속으로 의아해하는 내 머리를 주청경이 살살 쓰다듬었다.
“나는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어조로 중얼거린다.
“아직 은수 씨랑 못한 게 많은데……. 왜 하필 그 사람일까요. 이러면 또 뺏기는 것 같잖아.”
“…….”
심태성의 이야기임을 알아챘다.
조만간 그의 차례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주청경 역시도 강한 불쾌감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매번 자신에게서 나를 구해 내어 특히나 아니꼬울 심태성에게 말이다.
근데 누가 보아도 악의 축은 주청경 본인이 아닌가. 애초에 자기가 먼저 벌인 짓들은 생각도 안 하는 모습이, 개도의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다. 이런 존재가 나 하나 지키겠다고 괴물들을 처죽이고 있다니……. 집착의 긍정적인 효과가 웃길 따름이다.
나는 주청경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캐물을 의지도 없다는 듯, 우울하고 체념 어린 표정만 지었다. 내 얼굴을 한참 응시하던 주청경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이리로.”
그가 무릎을 꿇고 팔을 벌렸다. 누가 봐도 와서 안기라는 제스처였다.
기계적인 태도로 주청경의 품에 안겼다. 주청경은 나를 꽉 끌어안고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따끈한 숨결이 피부를 덮쳤다.
주청경이 고개를 들었다. 지척에서 숨결이 얽혔다. 따가운 눈빛이 내 얼굴을 훑어 내렸다. 나 역시 주청경의 기분을 읽었다. 주청경이 내게 품고 있는 감정을 정확히 뭐라고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이대로 나를 보내고 나면 찝찝해하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입맛대로 나를 다루면서도, 막상 무기력한 내 모습을 보면서 그리 즐겁지만은 않은 스스로를 짜증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 말이다.
본인도 그것을 아는지, 조금 신경질적으로 내게 입을 맞춘다.
연한 표피가 강하게 겹쳐 원래의 형태를 잃고 뭉개졌다. 피를 내진 않았지만 입술을 물어뜯는 듯한 키스에 신음이 튀어나왔다. 정말 어디서 무얼 하고 온 것인지, 상당히 비틀린 파장이 느껴졌다.
입 안으로 들어온 혀가 내 혀를 꾸욱 짓누른 채 끄트머리로 구개를 거칠게 문질렀다. 점점 깊은 곳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며 자극하는 움직임에 오싹함이 솟구쳤다. 찌르르 울리는 허리를 힘이 들어간 손길이 잡아당겼다. 질척한 살덩이가 점막을 범하는 소리와 숨소리가 뒤엉켜 귓가를 적셨다.
“읍…….”
그럴 일은 없겠지만 목구멍까지 쑤실 듯한 기세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주청경의 혀를 깨물었다. 그 방어적인 태도가 무언가를 건드렸는지 나를 담고 있던 눈동자가 사뭇 질척해졌다. 한 손으로 내 목덜미를 움켜쥔 주청경이 고개를 틀며 더욱 깊숙이 침범해 왔다.
……아마 오늘이 이곳에서 보낸 날 중, 가장 힘든 날이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জীয়াই থাকি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