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 녀석을… 한태경을 만나선 안 되었다. 다시 만나지도 말았어야 했다.
◆
누구나 살아가면서 원치 않는 라이벌 한 명쯤은 만나게 된다고들 한다. 처음엔 서이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느 날부터 지겹게 들려오던 그 이름. 하지만 자신이 무시한다면 금방 스쳐 가듯 사라질 거라고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 이름은 서이건을 초등학교 때부터 괴롭힌 것으로도 모자라 어느덧 고등학교까지 바짝 따라와 있었다. 덕분에 이젠 그 이름이 들리면 짜증부터 날 정도였다. 물론 그 이름의 주인은 죄가 없었다. 그도 어쩌면 자신과 똑같은 처지일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본인들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을 단순한 라이벌로도 모자라 최고의 경쟁자 구도로 만들려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작은 행동이나 말 하나하나에도 서로의 이름을 들먹였다.
한태경.
명문가, 소위 말하는 있는 집안 자식들과 우성 알파들만 다닌다는 공화고등학교 2학년.
같은 나이에 알파라는 걸 제외하면 서이건과 그는 접점이랄 게 없었다. 어차피 세계 인구의 1/3이 알파이니 그리 신기할 것도 없었고 말이다. 물론 사적인 접점이 없는 것일 뿐, 어떻게든 피할 수 없는 공통점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건 두 사람 모두 국가대표가 될 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태권도 유망주라는 사실이었다. 한태경은 어릴 적부터 해외를 다니며 태권도 대회를 휩쓸었고, 서이건은 한태경보다 2살 늦게 태권도를 시작해 국내의 내로라하는 상을 휩쓴 뒤 근래엔 해외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는 중이었었다. 주니어 국가대표이기도 한 두 사람은 차기 올림픽을 위한 시니어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이쯤 되면 대회에서 한 번은 마주칠 법한데, 서이건과 한태경은 아직 단 한 번도 경기에서 맞붙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아는 모든 이들은 두 사람이 고3이 되기만을 고대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될 두 사람의 경합이 지금껏 보지 못한 레벨의 치열한 경기일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죽겠네. 진짜.”
땀에 절어서 바닥에 누워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달래며 천장을 보던 서이건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어서 안 일어나? 쉴 시간이 어디 있어? 네가 이러는 동안 한태경이 발차기 열 개는 더하겠다.”
“어휴, 그만 좀 하세요!”
서이건이 머리카락을 헝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진 사범이 씩 웃었다. 원하는 대로 되었다는 듯 의기양양한 웃음에 서이건은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못 한다고 끙끙 앓던 서이건이 한태경의 이름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치사하다. 진짜.”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그럼 네가 그놈을 덜 신경 쓰든가.”
“말했잖아요. 난 진짜 한태경 신경 안 쓴다니까?”
“아, 그랬어요?”
진 사범은 심드렁한 얼굴을 하며 서이건의 발차기를 받았다.
“근데 한태경 진짜 잘생겼더라.”
“아, 뭡니까? 아직 한태경 이야기 안 끝났어요?”
“아니 생각난 김에 이야기하는 거지. 우성 알파라고 하더니 그럴 만하겠던데.”
“뭐 우성 알파라고 자랑하면서 페로몬이라도 뿜어냈나 봐요?”
고고하신 도련님이니 그럴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들으면 한태경에게 질투하느냐고 하겠지만, 절대 질투는 아니다. 서이건 자신도 우성까진 아니어도 알파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왜 비꼬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답은 하나다. 서이건은 한태경에 대해서 남자, 우성 알파, 태권도 선수, 잘난 집 아들, 그 외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아주 어릴 적 우연히 경기하는 모습을 TV 스포츠 뉴스에서 본 것을 제외하면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얼굴조차 잘 몰랐다.
“아니, 아니, 그 도련님이 그런 실례되는 짓을 할 리가 있나. 그냥 뭐라고 해야 하나… 가만히 서 있는데 그 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말이야. 오메가들이 아주 껌벅 죽겠더구먼.”
“사범님 아쉬우시겠어요. 오메가가 아니라서.”
“이 녀석이! 사범을 놀려?!”
‘아니 당신이 먼저 시작했잖아?!’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씩씩거리던 사범이 시킨 운동을 모두 끝낸 서이건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며 다시 한번 사범이 하는 한태경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정말 지겨워 죽겠네.
“그렇다고 해서 뭐 건방지거나 그런 건 아니고, 나한테도 인사를 깍듯하게 하더라고.”
“…어쩌다 만난 거예요?”
“아, 태권도 협회 정기 모임에 갔다가 봤지. 한태경 사범이 김태운이잖아. 자랑하려고 데려온 거지 뭐.”
“저런… 그런 줄 알았다면 저도 갈 걸 그랬어요. 우리 사범님 어깨 딱 펴게 해 줬어야 했는데.”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라.”
“넵.”
서이건은 운동화 줄을 묶으며 건성건성 대답했다.
“태운이 녀석이 날 소개하면서 네 이야기를 하는데, 네 이름도 알고 있더라.”
‘어떻게 저를 알죠?!’라고 하기에는… 아마 지겹게 들었을 테니…. 서이건은 한태경에게 갑자기 동질감이 생겼다. 얼마나 지겹게 제 이름을 들어왔을까.
“너랑 꼭 경기하고 싶다고, 그날을 기다린다며 너에게 인사 전해 달라고 하더라고.”
그러게 진작 어릴 적에 맞붙어서 뭔가 서열 정리 같은 걸 했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뭐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운명의 장난처럼 참가하는 경기마다 어긋난 건지,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서이건은 신기할 지경이었다.
“캬, 지금 생각해 보면 목소리도 진짜 무슨 올림포스 제우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낮은 저음이었는데 정말 멋지더라.”
“사범님, 올림포스 제우스 목소리 들어 봤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방금 사범님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어이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범을 뒤로하고 서이건은 체육관을 나왔다. 다 낡아 빠진 체육관 문은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이번 대회 우승하면 꼭 체육관 문부터 갈아 끼워야지 생각하며, 서이건은 캄캄해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부디 내일도 후회 없는 하루가 되길 바라며 그는 집으로 향했다.
◆
서이건이 태권도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생계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며 일하시는 아버지를 대신해 아직 어리고 약한 자신을 보호해 줄 곳이 필요했고, 그곳이 바로 청학 체육관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철운 사범과의 인연도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체육관에서 밥도 먹고, 숙제도 하고, 태권도도 배웠다. 처음엔 그저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러 올 때까지 버티는 곳일 뿐이었고, 태권도 역시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배우다 보니 점점 재미를 느끼게 되었고 어느 순간 자신에게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다. 물론 그 재능을 먼저 눈치챈 것은 진철운 사범이었다. 하지만 사범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2년 정도 지켜보고 서이건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진지하게 서이건의 아버지에게 그가 태권도에 재능이 있음을 알렸고, 아버지는 안타까워하며 서이건의 의사를 물었다.
서이건은 태권도가 좋았다.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집안 형편상 자신이 운동을 택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짓말을 했다. 태권도 싫다고, 안 해도 된다고. 그 말에 제일 충격 받은 것은 진 사범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 그래도 혼자 아등바등 고생하는 아버지를 더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서이건은 태권도를 그만뒀다. 그렇게 평범하게 지내다 4학년으로 올라갔을 때, 방과 후 활동으로 태권도를 하는 아이들을 보고 많이 울었다. 혼자 있는 집에서 숙제하면서도 울고,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도 울었다. 그런 아들을 아비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이건아, 보여줄 게 있단다.’
막노동을 끝내고 돌아온 아버지는 김치와 밥뿐인 초라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우울해하는 아들을 불러 상자를 내밀었다.
‘아버지… 이건….’
그 상자 안에는 상장과 사진이 들어 있었다. 낡은 티가 나는 태권도 1등 상장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성함이 적혀 있었고, 사진 속에선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 어여쁜 푸른색 눈을 가진 젊은 청년이 태권도복을 입고 친구들과 함께 밝게 웃고 있었다.
‘네 아빠는 이건이 너처럼 태권도 선수였단다.’
‘아빠가요?’
나를 낳아준 사람. 엄마이자 아빠…. 독일인이었고, 오메가였던 그는, 태권도 선수를 꿈꾸며 살아왔지만, 집안의 반대로 고등학생 때 홀로 태권도 종주국인 한국으로 유학을 왔고, 한국으로 귀화해 국가대표를 꿈꿨다고 했다.
‘그래. 국가대표가 되고 싶었지. 그럴 수 있었고. 하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
‘왜요…?’
아버지는 씁쓸하게 웃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늘이 그렇게 만들었지.’
슬픔이 가득한 아버지의 눈을 보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서이건은 국내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고 웃는 사진 속 아빠를 바라보았다. 보고 싶어도… 단 한 번도 보고 싶다고 말하지 못한 사람. 아버지는 가끔 너는 네 아빠의 눈을 똑 닮았다고 말했다. 그건 맞았다. 서이건은 외모로만 봐서는 전혀 혼혈임을 짐작할 수 없는 새카만 머리에 한국인 얼굴이었지만, 눈동자 색만은 옅은 스카이 블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