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태경 하나만 물어보자.”
“뭐든.”
“네가 기억을 잃은 그 시간 동안 내가 결혼했다면… 어쩔 뻔했어?”
“세상이 무너졌겠지. 아마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했을 거고, 바퀴벌레들을 더 잔인하고 끔찍한 방법으로 세상에서 없애 버렸을 지도 몰라. 그리고 너를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보고 그리워하고 사랑한다고 속으로만 생각했겠지.”
아니, 그건 행복한 루트다. 아주 조금, 다른 각도로 본다면… 만약 한태경이 생각한 대로 한다면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야기하지 않는다. 서이건이 도망가면 안 되니까. 지금은 아주 가엽게 나가야 한다. 연약하게 서이건이 없으면 죽으니까. 그것을 어필해야 한다.
“매일 울었을 거야.”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서이건.
“기억을 못 한 나를 매일 자책했겠지.”
그러니까 나를 불쌍하게 생각해. 나를 위태롭게 여겨. 얼른 나를 붙잡아. 곁에 있어 준다고 해줘. 한태경은 살짝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리 가정이라지만 하지 말자. 정말 마음 아프니까. 지금 너는 결혼하지 않았고, 나에게 기회가 있다는 것이 중요해. 정말… 하늘이 도왔지. 운이 좋았어.”
이건 진심이다. 정말 하늘이 도왔다. 그가 연애나 오메가에 큰 관심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서이건은 이미 결혼을 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을 것이다. 그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니 그러네. 왜 나는 연애해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건은 찬란하게 빛이 나고 있는 달빛을 보며 이야기했다. 시원한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정말 한 번도 하지 않았네.”
접근한 오메가가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소개해준다는 사람도 많았고. 그래도 금메달리스트니 흑심을 품은 사람도 있었고, 관심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 오메가, 베타…. 그러고 보니 원나잇을 제안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전부 이건은 거절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지금은 혼자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지금까지 그냥….
“외롭지 않았어?”
한태경이 이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은 곰곰이 생각했다.
“외롭지 않았던 것 같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혼자라는 사실이 가끔은 쓸쓸하게 느껴지고, 불이 꺼진 서늘한 집을 보며 마음이 시렸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마음이 허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외로움과는 다른 것이었다. 당연히 옆에 누군가가 있고, 그 누군가는 아주 잠시 자리를 비운 것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시 자리를 채우고 돌아와 옆에 있어 줄 거라고. 시시콜콜한 하루를 보내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유치한 싸움을 하면서 같이 하루를 보낼 거라고 당연한 생각을 했다.
“기다렸나.”
그래. 기다렸던 것 같다. 그래서 외롭지 않았던 것이다. 이건은 고개를 젖혀 달이 아닌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태경을 올려다보았다. 금안을 바라보며 이건은 활짝 웃었다.
“나, 널 기다린 것 같다.”
그래서 메달에 너의 검은 띠를 걸어 두었던 거야. 메달을 보여주면서 자랑을 하고 검은 띠를 건네면서 같이 태권도 하자고. 그때로 돌아가자고.
“어서 와. 한태경.”
언제고 힘들어하고 있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어린 서이건이 생각났다. 늘 그렇듯 이 남자는 자신을 구원한다. 그리고 또 결심한다. 이 남자를 위해서 살겠다고. 이 사람을… 자신에게 보내준 하늘에 감사한다고.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한태경은 그 미소에 화답했다.
“다녀왔어.”
“그리고?”
“…미안해.”
한태경의 말에 이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척 만족한 얼굴을 했다. 정말 평온한 밤이었다.
◆
“뭐?”
진 사범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제자와 제자의 친구? 아니, 친구의 제자를 바라보았다.
“둘이 같이 호주를 가겠다고?”
“네.”
“아니, 한 전무는 회사 봐야지 어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