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고, 마워.”
정말 목구멍에서 간신히, 정말 간신히 그 말이 튀어나왔다. 소설을 보면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질 않았다.’라는 문장을 간혹 봤는데 왜 그런 문장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숨이 턱턱 막히는 줄 알았다. 이건에게 답을 듣자 한태경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뗐다.
“재우야.”
“응, 형.”
“오랜만에 만난 서이건 씨와 이야기 좀 나누고 싶은데 자리 비켜 줄래? 우리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정말인가? 지금 태도를 보면 한태경은 자신과 할 이야기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한재우는 그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한 건지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지! 응, 그래. 내가 눈치가 없었네. 그럼 이야기 나누세요.”
마음 같아선 ‘어디가! 가지마! 날 데려가!’라고 한재우를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한태경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건 어딘가 마지막 선을 부숴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한재우는 방을 나섰고 둘만 남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먼저 움직인 건 한태경이었다. 그는 소파 쪽으로 움직이며 손짓했다.
“앉으세요.”
갑자기 존댓말. 이러면 답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이건은 생각보다 많은 생각을 해야 해서 피곤해졌지만 그래도 정신 바짝 차리려 애썼다.
“네.”
존댓말에는 존댓말로 맞받아쳐 줘야 K-예의지. 이건이 소파에 앉자 한태경도 그 맞은편에 앉아 놓여있는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커피 두 잔 부탁해요.”
뭐 마실지 물어보지도 않나. 만약 예전의 한태경이었으면 뭐 마실 건지 물어봤을 거고, 커피라고 하면 아메리카노인지 시럽을 넣을 건지 우유를 넣을 건지 바닐라 라떼를 마실 건지 캐러멜 라떼를 마실 건지 정말 하나하나 세세하게 다 물어봤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묻지 않았을 수도 있다. 완벽하게 이건이 마시는 취향을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비서가 커피를 가져올 때까지 침묵이 흘렀다. 곧 비서가 커피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내가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아니, 뭐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폼을 잡는 거지. 비서가 나가고 다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마셔요.”
“네, 감사합니다.”
한태경이 먼저 커피잔을 들고 마셨다. 커피는 그냥 평범한 아메리카노였다. 무척 쓰고 진했다. 한입 마시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여서 이건은 살짝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저랑 룸메이트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먼저 치고 들어온 사람은 한태경이었다.
“네.”
“아마 한 실장에게 이야기 들었겠지만, 사고를 당해서 기억이 뒤죽박죽입니다. 그래서 제 머릿속에 서이건 씨에 대한 건… 거의 없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뒤죽박죽인데 저에 관련한 건 왜 없다고 하는지. 기억나지 않으시는 분께 이런 말 웃기지만 그래도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요.”
“섭섭합니까?”
“네?”
“그렇게 들려서요.”
“섭섭하다… 고, 그 한 단어로 표현이 안 될 만큼 저는 지금 좀 복잡합니다.”
“저에게 서이건 씨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나 보죠.”
왜일까.
“한 실장에게 이야기를 듣고 정말 며칠을 서이건 씨에 대해서 떠올리려 노력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 창고를 뒤졌으나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직 못 맞춘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다 뒤집어 봤지만 없더군요. 그래서 대학교 시절을 찾았습니다. 같은 대학교, 룸메이트, 입학을 함께 했고, 좋은 라이벌이었다. 이건 기사를 찾아도 나오더군요. 함께 찍힌 사진도 여러 장 있었습니다. 그 사진들을 보니 어렴풋하게 훈련했던 모습은 떠올랐지만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한 실장이 고등학교 때 사고가 있었고, 그때 함께 왔던 이야기도 해주더군요. 어릴 적부터 절 경호 해주던 분이 서이건 씨가 저를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싸워준 것도 이야기해줬습니다. 하지만 글쎄요. 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