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볼게.”“어?”
“아, 전화.”
한태경이 핸드폰을 꺼내 이건에게 내밀었다.
“전화번호 알려줄 수 있을까?”
이미 이렇게 핸드폰을 내민 상태에서 거절하긴 힘들잖아. 이건은 한숨을 쉬며 한태경의 핸드폰을 받아서 번호를 입력했다.
“가끔… 연락해도 될까?”
“선발전 연습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당연하지.”
한태경은 약속할 수 있다고 말하며 옥상 계단을 내려갔다. 문득 그가 이 복잡한 골목길을 어떻게 내려갈지 걱정되어 옥상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건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이 동네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보였다. 설마…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한태경은 그 차에 탔다. 어느 틈에 연락했고, 또 언제 데리러 온 건지. 역시 부잣집 아들인가. 부럽다기보단 저런 녀석이 왜 자꾸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의문만 더 커질 뿐이었다.
“하아….”
다시 평상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둘이 있다가 한 명으로 줄어드니 이상스레 온도가 더 낮게 느껴졌다. 추웠다. 하지만 지금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더 하늘을 보며 아빠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
살아가기로 했다. 혼자서 씩씩하게 살아서 부모님이 그렇게 원하셨던 꿈을 손에 거머쥐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모든 것이 편해졌고, 생각할 것도 줄었다. 그냥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하면 되었다. 그렇지만 아르바이트는 그만두었다. 다행히 보상금도 나왔고, 아버지가 들어놓으신 보험도 있어서 당장 아르바이트하지 않아도 먹고살 정도의 돈은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옥탑방은 혼자 있기엔 너무 커서 이사를 할까 생각했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만큼 우선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아직 월세가 부담되는 상황은 아니니 말이다.
학교는 선생님과 상담하여 선발전에 더 힘쓰기 위해 우선 출석만 하는 방향으로 정했다. 어차피 주니어 국가대표이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흔쾌히 허락했다. 허가받은 뒤부터 서이건은 진 사범의 체육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진 사범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이건을 애지중지 아끼면서도 더욱더 엄하게 가르쳤다. 그리고 그건 서이건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다른 생각이 안 들게 해 주니까.
그리고 그날 이후 뜨문뜨문 한태경에게서 안부 문자가 왔다. 요즘 세상에 메신저를 쓰면 되지 않나 싶었지만, 그는 변함없이 문자를 보내왔다.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는 건가 싶기도 했다.
- 내일 드디어 선발전이네.
밤에 문자가 왔다. 안 그래도 선발전 때문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한태경에게 문자가 온 걸 보니 그도 긴장하고 있나 싶었다.
- 그러게. 긴장되네. 너는?
- 나도 긴장하지.
- 천하의 한태경이 긴장이라니. 역시… 선발전은 선발전인가 봐.
- 내일 잘 부탁해.
- 나도.
- 내일 보자.
- 그래.
간단한 대화가 끝난 뒤 이건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내일은 부디 원하는 것을 꼭 손에 거머쥘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
“네?”
하지만 선발전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제일 큰 문제는 올해부터 바뀐 선발 방식이었다. 1차 선발전인 페로몬 제어 테스트는 난이도가 몇 배나 상향되어, 선발전에 응시한 모든 이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손에 쥐어진 하얀색 알약. 그건 페로몬 조절제의 기능을 중화시키는 약이었다. 한마디로 페로몬에 무방비해지는 것이다. 응시생 중에는 베타도 있지만, 당연히 알파나 오메가도 존재한다. 모든 이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이런 약을 주는 의도가 대체 뭐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연히 사범들이나 보호자들의 반발이 거세게 몰아쳤다.
그러나 체육협회는 단호했다. 그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얼마 전 해외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해외에서 얼마 전 유도 경기를 하다가 오메가가 히트 사이클이 와버린 것이다. 덕분에 상대인 알파의 러트가 함께 왔고, 그 경기를 관전하던 오메가와 알파들이 모두 난리가 난 것이었다. 조사 결과 그 오메가는 경기 바로 1주일 전에 페로몬 조절제 주사를 맞았고, 그 약물에는 이상이 없었다. 관련된 테스트도 정밀히 거듭하였으나 정상적으로 운용되는 주사를 맞았다는 판정이 나왔다. 그런데 어째서 히트 사이클이 와버린 것인가. 결국 몇 번을 반복한 검사에서도 원인을 판명하지 못한 채 뚜렷한 결과 없이 조사는 마무리되었다. 그 이후 전 세계 체육협회들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그 오메가 선수가 그저 재수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