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결심한 것은 절대 망설이지 않는다.그리고 자신이 결정한 것이 설사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절대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그건 이건의 인생 철학이기도 했다.
더불어 사람은 누구나 실패와 좌절을 인생에 한 번쯤은 겪는다고 생각하기에 실패하더라도 그렇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모두 다 공평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건은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재우에게 연락했다. 아침 8시에 이건의 연락을 받은 재우는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이건이 ‘하겠다.’라고 하자마자 맑은 목소리로 당장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침 9시에 다시 이건의 사무실에서 만나게 되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날 선택해줘서 고마워. 정확히 해야 하는 일이 뭘까? 한태경 경호원? 그거면 돼?”
“네, 그거면 됩니다. 그냥 계속 형의 옆에서 형을 지켜 주시면 됩니다. 형에겐 제가 오늘 말하겠습니다.”
“기간은 언제까지야?”
“그게… 지금으로선 언제까지라고 확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저 형이 안전할 때까지만…. 이라고 말하면 너무 애매모호하고 무책임하죠?”
“음, 아니야. 괜찮아. 나도 딱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건은 최대한 한태경이 빨리 안전해지길 바라고 있다. 그러니 그 기간은 생각보다 짧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부디 짧기를 바랄 뿐이었다.
“고용 계약서 등은 이쪽에서 준비하겠습니다. 절대로 이건 형에게 불리한 조건은 넣지 않을 겁니다. 계약서는 형이 읽어보시고 수정이나 추가 가능합니다. 아, 그리고 보수는……”
“받았어.”
“네?”
“보수는 받았어. 이미.”
“…네? 전 드린 적이 없는데요.”
“한태경에 대해서 알려줬잖아. 사실 제일 답답했던 부분이었는데 어제 재우 네가 알려줘서 속이 시원해졌어.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생각보다 가지고 있기 힘들더라고. 그래서 그걸로 받은 셈 칠게.”
멍하니 이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재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보수가 될 수 없어요. 앞으로 이건 형이 겪을 일은 생각보다 더 위험하고 험난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그에 합당한 보상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상에 관련해선 계약서에 저희가 적겠습니다. 나중에 도장만 찍어 주세요. 절대 섭섭하게 해드리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이건 형은 여전하시네요.”
재우가 웃었다. 태경과 많이 닮아있지만 역시 오메가답게 어딘가 사람의 시선을 끄는 아름다운 선이 보였다. 언제고 태경이 재우를 어떤 알파가 데려갈지 모르겠지만 가족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할 거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한 가지 걱정됩니다.”
“걱정? 어떤 점이?”
“어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형이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아마 이건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많이 다를 겁니다. 그래서 당황스러울 수도 있고…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만두고 싶을 수도 있고, 선택에 후회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탁드릴게요. 그런 형을 내치지 말아 주세요.”
방금까지 기뻐하며 웃고 있던 재우가 일순 표정이 무거워져서 이야기했다. 대체 한태경이 얼마나 변했기에 이러는 걸까.
“저는 분명 예전처럼 형이 돌아올 거라고 믿습니다. 아직 회복이 덜 된 거니까.”
재우는 절박했다. 이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재우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걱정 마. 내가 먼저 그 녀석의 손을 놓는 일은 없어. 그러니까 재우야. 너야말로 한태경을 잘 설득해줘. 내가 옆에 있는 걸 허락할 수 있도록. 알았지?”
“…네! 맡겨 주세요!”
재우는 자기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날 밤 한태경과 이야기가 끝났고, 그가 내일 만나기를 원한다고 전해왔다. 이건은 생각보다 그가 순순히 받아들인 것에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한태경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기억을 하든 기억은 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씻고, 잘 다려진 검은색 슈트를 꺼내 입었다. 딱 한 벌 있는 슈트였지만, 맞춤이라 근육이 있는 이건의 몸에 잘 맞아 아끼는 옷이었다.
집을 나와 사무실로 가니 재우가 보낸 차가 도착해 있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이 그냥 알아서 회사로 가겠다고 했지만, 재우가 제발 뭐든 다 받아 달라고 요청을 하여 어쩔 수 없이 기사 딸린 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이러면 경호원의 의미가 좀 이상해지지 않나? 생각했지만 그 생각도 NI빌딩이 보이면서 점점 사라지면서 긴장감이 서서히 커졌다. 괜히 심장도 크게 뛰는 것 같아 이건은 심장 언저리를 한번 쓸고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약 10분 정도를 더 달려 도착한 NI의 빌딩은 기억 속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원래 빌딩이 하나였는데 지금은 비슷한 빌딩이 주위에 세 개가 더 있었고, 기존에 있던 빌딩과 연결하여 하나의 도시를 만들어 놓았다. 거의 10년 사이에 세계 5대 기업이 되어 엄청나게 커졌다더니 실제로 보니까 알 것 같았다. 이곳에 한태경이 있다는 거지.
“이건 형.”
로비에 들어오자 한재우가 손을 들어 이건을 불렀다. 재우를 알아본 이들이 재우를 향해 인사를 했고, 재우는 그 인사를 받아 주며 이건에게 다가왔다.
“와, 형 엄청 멋지다.”
“아, 고마워.”
“빈말 절대 아니에요. 나 진짜 엄청 놀랐어요. 태권도 경기하던 선수 서이건도 정말 멋졌는데… 경호원 서이건도 멋지네요.”
재우의 칭찬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이 자리에 어울리게는 입고 왔다는 증거기도 하니까. 재우의 뒤를 따라 정문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조금 안쪽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버튼은 없었고 대신 한재우가 휴대폰을 들어 터치하니 문이 닫혔다. 일반 다른 층과는 다른 곳을 향해 한 번에 올라가는 전용 엘리베이터 같았다. 몇십 초도 되지 않아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그 앞에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서서 한재우에게 인사했다.
“형님은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감사합니다.”
“전무님, 한 실장님 오셨습니다.”
전무? 실장? 비서로 보이는 사람이 노크하며 직위를 말했다. 저 방에 있는 사람이 전무이고, 지금 자신과 함께 여기에 서 있는 한재우가 실장인가.
안에서 답은 들리지 않았지만,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전면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서울의 하늘과 한강 풍경이었다. 정말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서울의 풍경에 이건은 놀랐다. 그다음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밝은 빛. 그리고… 9년 동안의 공백을 잊어버리게 할 만큼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한태경이 보였다.
큰 사고를 당해 수술까지 했고, 1년을 식물인간처럼 살았다고 하더니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나이도 먹지 않은 것 같았다. 심지어 근육도 없어져 말라 비틀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몸은 20살 그때보다 더 좋아 보였다. 대리석으로 된 엄청 크고 넓은 책상이 작아 보일 만큼 한태경의 존재는 그때보다 더 크고 빛나 보였다.
“형.”
문이 닫히자마자 재우는 한 발짝 앞으로 가서 한태경 앞에 섰다. 한태경은 보고 있던 탭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이건은 왜 재우가 ‘형이 달라졌다.’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눈이 달랐다. 다정하고 포근했던… 이건이 무슨 짓을 해도 웃어 줄 것 같았던 그 금안이 붉게 변해 있었다. 분명 금안이었다. 자신을 낳아준 작은 아버지의 눈을 똑 닮아서 좋아했었는데…. 그리고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여전히 잘생긴 얼굴이지만 예전에는 호감상의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무서웠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 그 얼굴이 9년 만에 이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눈 때문일까. 이건은 생각보다 더 한태경이 낯설었다.
“태경 형, 데려왔어.”
재우가 이건을 데려와 한태경 앞에 세웠다. 예전 같았다면… 물론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도 않았겠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예전의 한태경이라면 벌떡 일어나 이건이 다가오기도 전에 끌어안거나 손을 내밀며 어서 오라고 반갑게 인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눈앞에 남자는 서이건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만나면 얼굴이라도 한방 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물 건너간 것 같다.
“오랜… 만이다. 나 기억해?”
먼저 인사해주길 기다렸다간 숨넘어갈 것 같아서 이건이 웃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랜만이네.”
의외의 인사였지만, ‘기억하고 있다.’고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눈은 차가웠다.
한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빙 둘러 나와 서이건의 앞에 섰다. 키도 조금 더 큰 듯 했다. 그땐 비슷했는데. 한태경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그의 제스처에 이건 역시 악수를 했다. 역시… 한태경은 자신을 기억 못 하고 있어.
“늦었지만, 올림픽 금메달. 축하해.”
뭔가 파삭- 하고 깨지는 것이 느껴졌다. 누구보다도 한태경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정말 그 한마디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9년 만에 축하의 말을 듣고 싶었던 당사자에게 그 말을 들었지만 지나가는 개에게 하는 인사처럼 가벼웠고, 예의상 하는… 그냥 아무런 뜻이 내포되지 않는, 그저 그렇게 건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