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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진 사범님이 도장에서 자고 가라고 하긴 했지만, 한태경이 돌아온다고 하기도 했고, 집에 가고 싶기도 해서 저녁만 진 사범님과 먹고, 옥탑방으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24시간 내내 환했던 옥탑방이 까만 어둠에 잠겨 있는 것이 낯설어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문고리를 잡고 한참 서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괜히 허공에 외치며 문을 열었다. 혹시나 누군가 답을 해줄까 해서.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검은 침묵뿐이었다. 불을 켜고 신발을 벗고 절뚝거리며 집안에 들어가 옷을 벗고 샤워를 하고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며 소파에 앉아 멍하니 집안을 둘러보았다. 집안에 물건이 많이 늘었다. 한태경의 옷과 생활용품들은 물론이고 다리가 불편한 이건을 위해서 산 가구들이 이곳저곳 보였다. 이건은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가스레인지 위에 있는 냄비에 한태경이 끓여놓은 소고깃국이 보였다. 정말 한식이고 양식이고 못하는 게 없지.
아까 진 사범님과 저녁을 먹은지라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소고깃국을 보니 배가 고파져 밥 한 그릇과 국 한 그릇을 떠서 식탁에 올려놓고 한태경이 해놓거나 가져온 반찬을 올려 자리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금세 한 그릇 뚝딱 다 먹어 치우곤 설거지도 해놓고 방에 들어갔다. 매일 이부자리를 두 개를 깔았는데 오늘은 한 개를 깔았다.
“오늘 아무래도 안 오겠지?”
저녁 11시가 넘었다. 이 시간까지 오지 않는다는 건… 연락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많이 바쁠 것 같아서 참았다. 그리고 괜히 그냥… 기다리는 것 같아서 싫었고. 이건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불을 하나 더 깔고 누웠다. 천장을 보고 눈을 깜박이다 옆으로 누웠다. 빈자리가 보인다. 한 며칠 쭉 함께 있었다고 또 적응되었나 보다.
이러고 한태경이 떠났을 때 그 허전함에 한동안 방황했던 것이 떠올라 서이건은 몸을 웅크렸다.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상실감이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이미 한태경과 본의 아니게 몇 번 몸을 섞긴 했지만 그래도 그게 결코 옳은 일은 아니었다. 한태경도 원하지 않았던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 미안해서 이렇게 챙기는 것일 수도 있으니 너무 기대면 안 된다. 그래, 진 사범님 말대로 이제 내 인생 살 때가 되었지. 사범님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를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고 말은 했지만, 돌아보면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기엔 그렇다. 태권도 아니면 한태경이었던 것 같으니까. 정말 왜 그렇게 살았지.
“갈까. 해외.”
진 사범님이 아까 제안한 건 서이건에게 있어서 나쁜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가르치는 것도 좋아하고, 태권도도 좋아한다. 더 늦기 전에 조금 더 넓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이건 몸을 더 꽉 웅크리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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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연락 못 해서 미안.]
아침 7시, 서이건이 항상 눈을 뜨는 시간에 한태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척 피곤한 목소리였다.
“아니. 괜찮은데. 너 목소리 많이 안 좋다? 잠은 잤어?”
[조금 눈 붙이긴 했어.]
“설마 회사야?”
[그렇게 됐네.]
서이건은 한숨을 푹 쉬었다. 누굴 탓해. 그 큰 회사의 전무가 자리를 그렇게 오래 비웠는데 일거리가 안 쌓여 있다면 이상한 것이다. 게다가 어제 그렇게 급하게 불려 나갈 때 쉽게 끝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회사에서 밤을 꼴딱 지새웠나 보다.
“밥은?”
[비서가 가져다준다고 했어. 너는?]
“나 이제 일어났다. 네가 알람이었다고.”
[내가 없어도 잘 잤나 보네.]
“어, 푹 잤다. 아주 푹.”
중간에 몇 번 깨긴 했지만, 이야기하지 말아야지.
[오늘은 집에 갈게.]
“무슨 집?”
[네가 있는 집.]
“…됐어. 인마. 이제 괜찮아. 다리도 괜찮고. 그냥 네 집에 가. 좋은 집 놔두고 왜 여기서 자려고 그래. 회사에서도 먼데.”
[…가끔 보면 냉정해.]
“뭐라는 건지.”
[눈치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