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똑똑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강유한을 배웅했던 박재경이 다시 돌아왔다. 그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 재우가 그것을 알아채고 얼른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가가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그래, 괜찮아.”
재경이 재우의 손등을 토닥였다. 침대 옆 의자에 앉은 그에게 재우가 물 한잔을 가져다주었고, 박재경은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무서운 아이야.”
누구를 말하는 건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직감적으로 그가 말하는 건 강유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방금 이건형에게 들었는데 임신했다니 무슨 이야기인가요?”
“너무 확고했어. 혹시나 해서 올라오는 길에 산부인과를 가서 확인했어.”
“의사랑 간호사도 한패일 확률은요?”
“없어. 오래전부터 네 아버지와 알고 지낸 의사 선생님이고, 나 역시 도움을 많이 받은 분이라 그럴 리가 없어. 안 그래도 기쁜 소식이라 알려 주려고 했다고 하더구나.”
“그럼 정말 임신이라는 거예요?? 형이? 그런 실수를 했다고?”
완전히 기겁하며 말하는 재우가 힐끔 서이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지만, 이건은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 자신이 끼어 이 이야기를 들어도 되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애초에 자신은 한태경 가족 경계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언제쯤이라곤 이야기하지 않아요?”
“말하기로는 비가 오는 날이라고 하던데… 갑자기 찾아 왔었다고.”
비가 오는 날.
2주 전에 서이건은 입원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비가 오는 날이라면. 딱 하루 있었다. 새벽에 비를 쫄딱 맞고 와선 가만히 서서 자신을 내려보던 한태경이 생각났다. 그 날 이상한 소리를 하긴 했었다. 마치 기억이 되돌아 왔다는 식으로. 그런데 결국 그건 연극이었었다.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그때 강유한의 히트 사이클을 보내고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일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아무리 머릿속으로 날짜 계산을 해봐도 비가 온 날은 그날뿐이라는 것에 좌절감이 느껴졌다.
“김 사범님을 부르는 게 좋겠어요. 정말 임신이라면.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요.”
“그래. 나도 동감이야.”
“사범님 이쪽으로 모셔 오겠습니다. 아마 아버지도 함께 있으실 거예요.”
“그래.”
재우가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 재경은 아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 서이건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복잡하죠?”
“아…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아버님이 더 복잡하실 것 같습니다.”
“임신은 모르겠어요. 사실 전 믿지 않아요. 그 아이가 한 말을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까 재우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렇죠. 아마 우리 가족 모두 다 똑같이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태경이와 각인한 아이니까 잘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좀처럼 가지 않았죠. 독일에서 사고 나선 더더욱.”
박재경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그날의 기억을 꺼내는 것이 괴로운 듯했다. 바르르 떨리는 그의 입술을 보며 이건은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많이 무서우셨을 것 같아요.”
“그래요. 아주 무서웠죠. 태경이는 정말 소중한 아이니까. 그리고 그런 아이가 소중하게 여기는 이건 씨도 저에겐 소중해요.”
“아….”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서 이건은 손을 꼼실거렸다. 감사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또 방금까지 자신이 여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되는지 고민했던 것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준 답 같아서 가슴의 답답함이 조금은 사라졌다.
“모셔왔어요.”
재우와 함께 김 사범, 그리고 한태경의 아버지인 한태석이 함께 들어왔다. 김 사범님은 정말 생각보다 너무 멀쩡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더 크게 다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