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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나른했다. 그러나 기분 나쁜 나른함이 아니었다.
모든 나쁜 기운이 빠져나가 시원한 나른함이었다. 그래서….
“서이건.”
다정하게 불러주는 이름. 그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렇게 누가 불러주더라. 작은아버지? 큰아버지? 아닌데 두 분께 죄송하지만 두 분보다 더 다정하다.
“일어나.”
주문처럼 그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깜박깜박. 점점 선명해지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서이건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눈앞에 웬 조각상이 있지? 생각했는데 아니다. 한태경이였다.
“아우~~”
이건은 마른세수하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면서 절규했다.
“왜? 어디 아파?”
“야, 가까이 오지 마. 깜짝 놀랐네. 내가 네놈을 조각상이라 생각했다니. 진짜 현타온다.”
이건의 말에 한태경이 놀라더니 슬쩍 웃으며 얼굴을 더 서이건에게 들이밀었다.
“몸 가꾼 보람이 있네. 조각상이라는 이야기도 듣고.”
가깝다. 너무 가깝다. 지금 서이건이 입을 벌린다면 그대로 한태경의 입김이 들어올 만큼. 서이건은 얼른 한태경을 향해 베개를 집어 던졌고, 한태경은 하하 웃으며 그 베개를 가볍게 받았다.
“조금 정신 차리고 있어. 옷 입고 밥 먹여 줄 테니까.”
바닥에서 일어난 한태경은 가벼운 운동복 차림에 상체는 탈의한 상태고 목에는 수건을 걸고 있었다. 방금 씻고 나온 것 같았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고 거실로 나가는 모습을 보다 서이건은 문득 위화감이 들어 눈을 깜박였다. 여기가 어디지? 천천히 눈으로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을 훑어보았다.
“집이네.”
그렇다. 집이다. 그것도 자신의 집. 왜 자기가 여기에 와있지? 그리고 한태경이 왜 여기 있지? 설마 지금 십여 년 전의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다리에 있는 깁스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구나. 어제… 그 난리를 치룬지 이제 하루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바로 어제 일이었다. 강유한도 그렇게 되고, 바퀴벌레들이 퇴치되었고. 자신은 한태경과 이곳에 왔고 이야기를 하다 잠이 와서 눈을 감았다. 그 이후 기억이 없는데….
“왜 뺨을 꼬집고 있어?”
가벼운 티셔츠와 바지로 옷을 갈아입은 한태경이 웃으며 다가왔다.
“자, 내 어깨를 잡고 일어나. 부축해줄게.”
“한태경?”
“음?”
이건을 안으려고 하던 한태경이 다정하게 웃으며 서이건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신 금안이다. 아름다울 정도로.
“왜 불러놓고 바보 같은 표정이야?”
이 목소리 높낮이도. 모두 기억하던 그대로다. 뺨을 꼬집었을 때 아팠는데 꿈이 아니란 거지.
“정말 한태경이야?”
“그럼 내가 가짜로 보여? 아니면 아니었으면 좋겠어?”
“와 그 싹수없는 말투, 너 맞구나.”
“전혀 기쁘지 않네.”
“기억… 정말 돌아온 거야?”
“음… 89% 정도?”
“수치가 구체적이네. 나머지 11%는… 돌아올 것 같아?”
“없어도 되는 기억일 것 같기도 해. 나에게 필요한 기억은 다 돌아온 것 같거든.”
“정말이야?”
“응.”
“그러면 나 진짜 궁금한데 너 재수 없었던 건 기억해?”
“예를 들면?”
“당장 한 달 전 네가 얼마나 재수가 없었는지. 싸가지없고, 말 함부로 하고, 사람 내리깔고.”
“그렇게까지 심했나.”
“어.”
단호한 서이건의 답에 한태경이 푸핫! 하고 소리 내며 웃었다. 저렇게 크게 웃는 모습도 정말 오랜만에 본다. 늘 딱딱한 얼굴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