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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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가족’ 뼈가 있는 말이다. 한태경의 말에 이건은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방금까지 멋진 야경을 보고 기분이 무척 좋았는데 가슴에 돌덩이가 툭 하고 올라간 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런 이건을 보며 한태경은 씁쓸하게 웃었다.

“또 쓸데없는 생각하지. 아무런 생각하지 마. 서이건.”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잠깐의 침묵이 돌고 있는 그때 레스토랑의 직원들이 들어와 음식을 하나씩 세팅하며 설명해주었다. 문제는 정말 미안하게도 그 정성스러운 설명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눈앞에 너무 예쁘게 플레이팅 된 음식을 멍하니 내려 보았다.

“얼른 먹어봐.”

지금 이 마음으론 이 음식을 먹으면 허무하게 체할 것 같았다.

“태경아.”

“그래.”

“할 말이 있어.”

이건의 진지한 말에 한태경은 한숨을 쉬며 들었던 포크를 내려놓고 직원을 호출했다.

“뒤에 나오는 코스는 나중에 다시 호출할 테니 그때부터 넣어 주세요. 호출 전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직원들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공기가 다소 무거워졌다. 목이 바짝바짝 말라 이건은 물을 한 모금 간신히 마셨다. 막상 이렇게 분위기가 잡히니 이렇게까지 안 했어도 되었는데 하고… 한태경에게 미안해졌다. 분명 기분 좋게 식사 하고 싶었을 텐데.

“할 말이 뭐야?”

가만히 기다리던 한태경이 미소 지으며 이건에게 물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다.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야. 그냥…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그 얼마 전에 본가 다녀와서 결혼 이야기했잖아.”

“그랬지.”

“허락받았다는 거, 진짜야?”

“진짜야.”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한태경이 답을 해주었다. 너무 빠른 대답에 이건은 그날처럼 멍하니 한태경을 바라보다 얼른 정신을 차렸다.

“말도 안 되잖아. 그건 말실수였고, 아니 네 아버지들이 나를 허락할 리가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일단 나는 알파고.”

“알파… 맞아. 너는 알파지.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

“왜 그게 문제가 되는 게 아니야? 알파는 오메가랑 이어져야지. 나는 알파라서 아이를 못 가져. 네 아이를 낳아 줄 수 없다고.”

이건의 말에 한태경이 눈을 깜박거리다 갑자기 웃었다. 이번에는 눈까지 웃고 있다. 뭔가 무거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뀐 기분이었다. 그가 정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왜 웃어. 남은 진지한데.”

“미안해. 하지만 네가 내 아이를 낳아줄 생각이었던 것 같아서.”

“어?”

뭔 소리냐고 말하며 눈을 깜박이던 서이건이 갑자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벌떡 일어났다.

“야! 아니라고!! 내가 못 낳으니까! 아니, 이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까. 네가 아이를 원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그….”

“상관없다면?”

“뭐?”

“서이건, 네가 알파라는 건 이미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어. 그리고 나도 알파야. 나도 아이를 못 낳아. 우리 둘 다 조건이 똑같아. 누구 하나 모자람 없이 똑같은 조건이야. 네가 알파고 아이를 못 낳아서 우리 아버지들이 허락하지 않고, 결혼을 못 한다? 그렇다면 그건 네 아버지들이 지금 살아 계신다면 똑같이 반대할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

“그, 그렇지. 그러니까 잘못되었다는 거잖아 지금.”

“알파와 알파가 결혼한다는 생리적 거부감? 본능적 거부감? 다 때려치우고 내가 지금 살짝 화가 나는 건 네가 네 존재 가치를 너무 낮게 이야기한다는 거야. 이건아. 네가 알파건 아이를 낳지 못하건 나와 우리 아버지들은 상관없어. 서이건 그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너는 왜 네가 알파고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는 걸까. 오메가에게 인기가 많아서 날 질투로 돌아 버리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말이야.”

“무슨….”

한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서이건에게 다가왔다. 서 있는 그를 의자에 다시 앉히고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앉아 무릎에 손을 올리고 그 자신은 오른쪽 다리는 바닥에, 왼쪽 다리는 무릎을 세워 서이건을 우러러보았다.

“서이건, 나는 너와 나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가 아니면 낳지 않을 거다. 필요 없어.”

“한태경….”

“나야말로 알파라서 미안해. 이왕이면 예쁜 오메가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이렇게 돌아오지도 않았을 건데.”

“태경아….”

“이제 그만 눈치 좀 채줘. 네가 얼마나 나에게 중요한 존재인지.”

한태경이 이건의 손을 잡고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서이건, 사랑해. 널 정말 사랑하고 있어.”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아니, 아니야.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쿵쿵쿵 너무 시끄럽게 뛰어서…. 한태경의 페로몬이 조심스럽게 서이건을 감싼다. 부디 밀어내지 말라고 간절히 부탁하는 것 같은 페로몬의 움직임을 이건은 느끼며 자신을 바라보는 한태경의 금안을 보았다.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눈. 이건은 이 눈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봐왔으니까.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한태경은 이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다만 그 시선이 절대 그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한태경은 그때부터 쭉 동일한 감정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거짓이 아니다.

“네가 나를 지옥으로부터 데리고 나가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를 거야.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 어릴 적에 그렇게 아팠던 것이 고마울 정도로 정말 기뻤어.”

진심을 담아 한태경은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하고 있다.

“다시 말할게. 나도 알파야. 나도 네 아이를 낳아 줄 수 없어. 서이건. 하지만 너의 가족은 되어줄 수 있고, 평생 너만을 바라보는 반려도 되는 건 가능해. 그러니 이제부터 너도 친구로서가 아닌 반려의 후보로서 나를 한번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알파와 알파는 일단 떼어내. 한태경으로서 나를 봐. 부탁이야.”

“나는….”

“지금 당장 답을 달라는 건 아니야. 기다릴 수 있어.”

다정하게 그는 이건이 겁을 먹지 않도록 한 발짝 물러났다. 다시 사람을 불러 식은 음식을 다시 조리해달라고 부탁하는 한태경을 바라보며 이건은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고자 애썼다.

어떻게 식사가 끝났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차 안이었고, 눈을 깜박거리니 어느새 집이었다. 집엔 혼자였다. 한태경이 같이 오길 바랐으나 서이건이 생각할 것이 있다고 혼자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그는 그런 서이건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서이건은 멍하니 현관에 서 있다가 비틀거리며 집에 들어갔다. 냉장고를 열어 맥주 캔 세 개를 꺼내 옥상으로 가서 평상에 앉았다.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생각했다. 한태경을. 한태경만을.

그가 지금까지 자신에게 보여준 호의. 그리고 자신에게만 안겨 주었던 다정함이 모두 다 그런 뜻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많은 것이 보였다. 그렇겠지. 친구에게 보통 그렇게까지 하지 않겠지.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을 ‘오메가화’한 것도 아니었다. 최대한 자신을 존중해주고, 믿어주고, 응원해주었다. 동등한 위치. 동일한 조건선 상에서 자신의 옆에 있어 주었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한태경과 있으면서 불편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편했기에 그가 없던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감기 걸려.”

등 뒤에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이건은 다 마신 맥주 캔을 손에 꽉 쥐었다. 바닥에는 이미 두 개의 빈 맥주 캔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혼자 있게 해달라고 했잖아.”

“그러려고 했는데… 널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한태경.”

“서이건, 그거 알아? 나는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정말 좋아. 네가 날 온전히 받아준 것 같아.”

서이건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를 한태경은 더 세게 끌어안았다. 덩치가 좋아 오메가처럼 폭 안기진 않았지만 이 적당한 무게감이 좋았다. 그래 동등했다. 서이건이 자신을 안아도 아마 이런 무게감을 느낄 것이다.

“여기 앉아서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네가 한 말을 생각했어.”

그래, 너는 그렇겠지. 누군가의 한 마디 한 마디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진지하게 생각해주는. 그래서 나는 그 틈을 더 파고들고 싶은 거야. 한태경은 서이건을 더 꽉 끌어안았다. 서이건의 페로몬이 코끝을 간질인다. 세상에 이보다 더 달콤한 페로몬은 없을 것이다. 유일하게 한태경의 알파의 본능을 깨우는 페로몬이다.

“내가 한 말? 오늘?”

“아니, 지금까지 우리가 나눴던 모든 대화들을 생각했지. 이상하지.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더라고. 너의 어설픔까지도.”

“내가 어설프게 너에게 접근하고 너의 관심을 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 모두 생각이 났나 보네.”

“방향을 조금 틀어 보면 그렇더라고. 그러다 보니 아 네가 왜 연애를 못 했는지 알 것 같더라. 그래서 어떻게 연애를 해? 혼자만 연애를 하고 있었어. 아주.”

서이건의 엉뚱하지만, 뼈 있는 말에 한태경은 한방 얻어맞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16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