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쉴 줄 알았던 NI 가족들은 모두 티타임 시간을 가졌다. 1층 정원에서 바깥바람을 쐬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 사이에 한태경이 몇 번은 웃은 것 같았다. 그가 아무리 사고를 당하고, 과거보다 차갑게 변했다고 해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경호원들은 전부 바짝 긴장해 있었다. 설마 멍청하게 공격하는 놈들은 없겠지? 라고 말하곤 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하는 건 조심해야 했다. 그래도 다행히 정원이라곤 해도 완전 바깥이 아닌 방탄유리로 된 벽이 둘러싸여 있어 어디서 미사일이 날아와 꽂히지 않는 이상은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하긴 웬만한 준비 없이 밖에서 차를 마실 리가 없지.“이건아.”
이건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강유한을 바라보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방탄유리로 한태경을 보호하고 있다곤 해도 그에게서 눈을 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때와 같은 멍청한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강유한의 후배가 아닌, 한태경의 경호원이니까.
“음, 그래. 일하는 중이었지. 그럼 나 혼자 이야기할게. 그건 괜찮겠지?”
강유한은 이건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냉큼 옆에 서서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는 한태경의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방금까지 저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았던가.
“나, 많이 겉도는 것 같지 않아? 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제삼자의 눈엔 어떨지 모르겠네.”
…저녁 식사할 때 봤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을 이건에게 보여준다. 한없이 약하고 가냘프게… 이건이 알고 있던 선배의 모습으로 돌아와 말을 걸고 있어서 당황스러웠다. 대체 이 사람의 진짜 모습은 뭐지?
“아까 저녁 식사 할 때 내가 한 이야기 들었어? 아니, 들었겠지. 그 거리에서 안 들릴 리가 없지. 네가 들을 걸 하면서도 그렇게 말했어.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해. 하지만… 정말 난 간절히 부탁한 거야. 그렇게 부탁하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 NI 총수들이잖아.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야? 그래서 나, 사실은… 많이 무시당하고 힘들었어. 그래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그렇지 않으면 인정해주지 않아. 날 봐주지 않으니까. 믿어져? 태경이랑 나 말만 약혼이야. 내가 매달렸어. 각인 해제가 되지 않으니 어차피 한태경은 내가 없으면 죽는다고 협박까지 해서 매달렸어… 그 이후 날 봐주지도 않아. 날 보는 눈 봤지? 벌레 보듯이 해.”
강유한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더니 결국은 물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로 옆에서 이야기한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지금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후… 바보같이 뭐하는 건지.”
한참 훌쩍이던 강유한이 눈물을 닦으며 이건을 바라본다.
“이제 저기로 가야겠다.”
“어두우니 발밑을 조심하세요.”
이건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이었다. 그 말에 강유한이 앞으로 가고 있다가 살짝 미소 지으며 이건을 바라보았다.
“넌 정말 다정해. 너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있지 이건아. 내가 객기로 저 사람들에게 널 달라고 부탁한 건 아니야. 진심이야. 그러니까 너라도 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그럼 나 조금은 살 것 같으니까. 잘 생각해줘. 아마 한태경은 네가 말한다면 이야기를 들어 줄 거야.”
“죄송하지만 이미 거절했습니다.”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건 해야 했다. 여기서 끊어내지 않으면 아마 누군가가 힘들어질 것 같았다. 강유한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곤 이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절했… 다고?”
“네, 애초에 저는 아직 유한 님을 지킬 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물론 태경… 님도요. 그나마 태경 님은 김 사범님 등 도와주시는 선임들이 있어 간신히 월급 몫만큼은 하고 있는 정돕니다. 그런 제가 독자적으로 유한 님을 지키게 된다면 아마 더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건 아니야. 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은 나도 붙여 줄 수 있어.”
“그리고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서 불가능합니다. 저는 NI 법무팀이 무섭거든요.”
“못들은 걸로 할게. 그러니까 좀 더 생각해줘. 태경이야 말로 그를 지켜줄 사람이 많아서 네가 필요 없지만, 나는 네가 필요해.”
휙 돌아가는 강유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건은 또다시 아까와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방금까지 옆에서 훌쩍이던 선배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
한태경이 씻으러 간 사이 이건은 시계를 보며 김 사범님과 함께 무전으로 앞으로의 행동 지침이나 해야 할 일, 그리고 경계할 것과 현재 자리 배치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2층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 김 사범님과 대화를 종료하고 그쪽을 바라보니 한태경의 작은 아버지, 그를 낳은 박재경이 따뜻한 차를 가지고 올라왔고, 이건은 어쩐지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달려가 그에게서 쟁반을 받았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어디에 둘까요?”
“아, 태경이 옆방에요.”
한태경의 방도 아니고 옆방?
이건은 문을 열어 그 방에 들어가 방안에 있는 작은 테이블 위에 차를 올려 두었다. 방안에 들어온 재경은 이불을 한번 살피고, 방 온도를 보았다.
“방 안 온도랑 다 맞춰 놨으니까 잘 때 춥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옷장에 옷 잘 개켜서 편하게 자요. 잠옷도 여기에 준비해 두었어요. 사이즈가 맞을지가 걱정인데….”
그가 옷장 문을 열자 안에는 두벌의 잠옷과 가운이 들어 있었다. 마치 준비해둔 것처럼. 재경이 옷걸이에서 잠옷을 꺼내 이건의 앞에 갖다 대었다.
“사이즈 맞을 것 같네요. 조금 기장이 짧을 것 같긴 한데.”
“아, 아닙니다. 아마 잠옷을 입을 정도로… 푹 자진 못할 것 같습니다.”
“아… 하긴 그렇죠.”
재경은 아쉬워하며 옷걸이를 다시 걸고 옷장 문을 닫았다.
“서이건 선수가 이 방에 묵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아까 태경이가 서이건 선수는 이곳에서 자야 한다고 하기에 내심 놀랐어요. 기억이 난 건가 하고.”
“기억이요…?”
“네, 사실 이 방… 태경이가 서이건 선수에게 주고 싶어 했어요.”
“네? 무슨 소리세요.”
“…이건 선수 아버님 돌아가시고 태경이가 한번 이건 선수 집에 묵은 적이 있죠?”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바로 어제처럼 생경하게 기억나는 그날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이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다음 날 집에 와서는… 혹시 집에 누가 와서 함께 살아도 되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놀랐죠. 정말 간절하게 나와 자기 아버지에게 얼마나 간절하게 부탁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그이랑 제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나 듣자 싶어서 태경이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건 선수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집에 혼자 놔두는 게 너무 싫다고… 외로울 테니 계속 있어주고 싶은데… 자신은 아직 어리니 그럴 수가 없다고, 그래서 우리 집이 넓고 방도 많으니 그를 데려와서 함께 살면 안 되냐고 하더군요. 대학교에 붙으면 어차피 같은 기숙사에 들어갈 테니까. 그때까지 이 집에서 함께 살고 싶다고.”
맙소사. 한태경… 너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부탁이죠. 막무가내라고 생각할 만큼 무모한 부탁이었어요. 태경이가 서이건 선수 정말 좋아하는 걸 알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우린 태경이를 무척 사랑하고, 태경이가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기로 했으니까. 받아들였어요. 단, 조건이 있었죠. 서이건 선수의 동의를 받을 것, 절대 네 멋대로 해선 안 된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그날 이후 태경이는 하나하나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이 방이 가구도, 침대도… 이건 선수가 불편함 없도록. 조금 리모델링도 했죠. 신혼집 장만하는 것 같았다니까.”
재경이 살짝 미소 지으며 웃었다.
“정말 신중하게 준비했어요. 그리고 몇 번이고 당신에게 어떤 말을 할지 고민했죠. 어떻게 해야 서이건 선수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을지… 실패하면 완전히 연이 끊어질 거라는 것을 알기에 태경이는 정말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리고 결심했을 때 한번 이 집에 괴한이 들어온 적이 있어요.”
“괴… 한이요?”
“네. 알고 보니 태경이를 지키던 경호원 중 한 명이었는데… 그땐 지금 현재 김 사범님이 이끄는 경호원들이 아니라 다른 사설 경호원이었죠. 다행히 태경이가 피해를 입거나 다치진 않았는데… 그날 이방에 앉아서 하루 종일 안 나오더군요. 걱정돼서 들어와 보니 멍하니 침대에 앉아서 고개를 젓더라고요. 이건 선수 여기에 데려오면 안 될 것 같다고.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아니까.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그리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도 아니까. 그러지 말고 데려오라고 말도 하지 못했어요. 그 이후 이 방은 계속 비워져 있는 상태에요. 태경이가 기억을 잃고, 이 방의 존재를 잊은 줄 알았는데… 오늘 이야기를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그렇다고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더군요. 그냥 비어있으니까. 한 말 같아서….”
재경의 목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곧 그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이건에게 웃어 주었다.
“태경이 지켜줘서 고마워요. 서이건 선수. 많이 부족한 아이지만 잘 부탁할게요.”
“아닙니다. 저야말로.”
재경이 이건의 손을 꼭 잡고 톡톡 두드려 주었다.
“그럼, 쉬어요.”
“네, 감사합니다.”
재경이 방을 나가고 이건은 방을 한번 눈으로 훑어보았다. 가만 보면 방의 배치가 이건의 방과 동일한 배치였다. 조금 마음이 울렁거리며 그때의 한태경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