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안 먹어도 돼? 내가 살게.”“그냥 먹고 싶은 마음이 안 들어. 넌 먹고 와.”
“한태경.”
보통 부르면 정말 0.1초도 되지 않아서 돌아보는데 지금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무시하고 엘리베이터를 다는 한태경을 보니 이건은 기분이 착잡해졌다. 물론 약속을 잊고! 말 안 듣고! 간 건 자신의 잘못이 맞아. 그래서 사과까지 했잖아. 저 녀석 요즘 왜 저렇게 좀생이같이 굴지. 정말 모르겠네. 이건은 볼을 긁적이며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들어갔다. 한태경은 이미 샤워하고 있었다. 한태경은 샤워하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바로 자기 때문에 정말 저녁 먹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이건도 입맛이 떨어져 저녁 안 먹기로 하고 바로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봤다. 그 이후 선배에게 메시지가 없었지만 아까 온 메시지만으로 충분히 며칠은 행복할 것 같았다.
바보처럼 헤헤헤 웃고 있는데 한태경이 다 씻고 나왔다. 완전 홀딱 벗은 채 큰 타월만 허리에 걸치고 나온 한태경은 진짜… 인정하기 싫지만 싫어하는 사람 없을 것이다. 아직 성장기다 보니 아마 앞으로 더 남자다워지겠지. 우성 알파라 그런가.
한태경은 이건을 힐끔 보곤 자신의 자리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잠옷이 아니라 트레이닝 복이었다. 바로 자는 거 아니었나.
“일어나.”
“어? 왜?”
“밥 먹으러 가자.”
“어?”
“너 이대로 밥 안 먹을 거잖아. 끼는 제때 먹어야 해. 안 그러면 내일 힘들 거야.”
아니. 너야말로 아까 밥 안 먹는다고 올라왔잖아.
“너는?”
“네가 먹으면 나도 먹어야지.”
“네가 배고픈 게 아니고?”
“…그래, 그렇다고 하자. 그러니까 일어나.”
한태경이 신발을 먼저 신고 나가고 이건이 그 뒤를 따랐다. 다행히 기숙사 식당은 자정까지 해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웠다. 불을 끄고 잠을 앞둔 그때 선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네가 준 약을 먹고 잠깐 잠들었는데 훨씬 몸이 가벼워졌어. 정말 고마워^^ 지금 자고 있겠지? 메시지 때문에 안 깨길 바랄게. 좋은 꿈 꿔.
미치겠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이건은 핸드폰을 끌어안고 침대 위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했다.
“그렇게 좋아?”
방금까지 꽃밭이었는데 한태경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서 얼른 헛기침하며 차분한 척을 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게 좋은 기분이라면, 그래, 좋은 것 같아.”
“…옛날에 운명의 상대라는 게 있었다더라.”
“운명의 상대?”
“서로가 첫눈에 이 사람은 내 사람이구나 하고 안다는 거지. 그러면 다른 연인 관계의 사람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이 운명의 상대에게 빠지고 만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그 운명의 상대만 각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어.”
“음? 각인… 잘 하지 않는 추세긴 하지만 운명의 상대랑은 관계없지 않아?”
“맞아. 한마디로 그냥 흘러 내려오는 설화 중 하나긴 해. 신경 쓸 거 하나 없는.”
“흐음… 만약 그게 진짜라면 난 선배를 만났을 때 첫눈에 반한 것 같거든. 그렇다면 선배가 운명의 상대일 수도 있는 건가.”
“선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 아니야? 그 이야기의 중점은 쌍방이 운명의 상대라고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는 건데?”
“야….”
이건이 화가 나서 여분의 베개를 한태경을 향해 집어 던졌고 그는 하하 웃으면서 이건이 던진 베개를 자신의 베개 아래에 넣으며 눈을 감았다.
“한태경.”
“왜?”
“너는 그럼 그런 느낌을 받은 적 없어? 첫사랑이라든가.”
“…노코멘트.”
없다던가, 있다던가 그렇게 이야기했으면 차라리 덜 궁금했을 것 같다. 애매모호한 ‘노코멘트’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곧 들리는 고른 숨소리에 이건은 다음에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운명의 상대라. 조금은 로맨틱하긴 한데 어떻게 보면 슬픈 이야기다. 같은 땅에 같은 하늘에서 알파 오메가로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평생 만나지 못할 확률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구전설화라 다행인 듯도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