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진짜 있었네.”
이건은 뒤늦게 메일로 온 계약서를 정독하고 어이없어서 허허 웃었다. 진짜 위치를 늘 확인하며 어떤 위치추적기를 쓸건 지 상세히 기재 되어있었다. 이건 사생활 침해 아니냐고 소송을 걸어도 ‘너 왜 제대로 계약서 안 읽어봄?’ 하고 판사가 혼내고 NI가 무고죄로 자신을 고소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이건은 다시 한번 자신의 팔에 박힌 검은 점을 보고 한숨을 쉬며 고용 계약서를 껐다. 그래도 뭐 기분 나쁘거나 찔리거나 하는 건 없었다. 어차피 집 아니면 사무실이었고, 이제는 집 아니면 NI일 테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서이건 씨.”
이건은 자신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참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남자가 어느새 움직이던 긴 손가락을 멈추고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문제없는 거 확인했습니까?”
아, 이건은 얼른 휴대폰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네, 확인했습니다.”
“이번만 봐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경호 업무 중에 핸드폰 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봐 드리죠. 대신 조금만 더 가까이 오세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가 제 뒤에 유리창으로 총알이라도 날아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일에 방해가 될까 봐 그랬지. 애초에 저 유리창은 총알로는 뚫을 수 없다는 걸 안다고. 그래도 고용인의 말이기도 하고, 한태경의 말대로 어디서 어떤 사태가 생길지 모르니까… 가까이 있는 게 오히려 이건에겐 마음 편한 일이라 얼른 그 옆에 섰다. 물론 모니터가 절대 보이지 않는 각도로 섰다. 잘못했다가 오해를 받으면 안 되니까.
그나저나 벌써 해가 진지 오래다. 이 녀석은 언제 퇴근하는 거지.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8시가 넘었다. 한태경도 서이건도 저녁을 먹지 않았다. 이미 회사의 몇 사람들을 빼고는 대부분 퇴근했을 거고, 비서들도 이미 퇴근한 지 두 시간이 넘었다. 그런데 정작 한태경은 가만히 남은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확실히 태권도를 하는 모습도 잘 어울리지만, 이렇게 사무 일을 하고 있는 모습도 어울린다. 문득 궁금했다. 어떻게 지냈어? 사고 났을 때 많이 아팠어?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 태권도는 아직 하고 있어?
정말 궁금한 것이 너무너무 많았지만, 물어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퇴근하죠.”
드디어 일이 끝났는지 한태경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건은 얼른 재킷을 가져와 그가 입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자 한태경이 빤히 이건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이렇게 드는 게 아닌가?
“이런 거 하지 마세요. 내가 서이건 씨를 고용한 건 경호원이지 비서가 아닙니다.”
“아, 알겠습니다.”
의외로 일의 경계선은 칼 같구먼.
이건에게 재킷을 받아 입은 한태경이 먼저 나서자 이건이 얼른 그의 뒤에 붙었다. 현재 두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층이지만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 한태경이 먼저 지하 주차장의 버튼을 눌렀고, 곧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하강했다. 몇 초도 되지 않아 도착한 지하에는 이미 기사가 차를 대기 하고 있었다. 저걸 타고 함께 가야겠지.
“한 전무, 이제 퇴근하니?”
고민하던 찰나에 구원자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김 사범이 기지개를 켜며 다가왔다.
“퇴근 안 하셨습니까?”
“이건이에게 덜 가르친 게 있어서. 아무래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너와 함께 해야 하는지도 아직 덜 전달했고… 이야기할 게 많아서 기다렸지. 오늘은 나도 동행할 거다.”
김 사범님의 말에 한태경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태경이 먼저 차에 타고 김 사범은 이건에게 다가갔다.
“앞으로 출퇴근을 함께 해야 할 텐데 그 전에 너는 항상 보조석에 앉아 있어야 해.”
“네. 알겠습니다.”
“밀착 경호 아니었습니까?”
이건이 보조석 문을 열려고 하니 한태경이 한마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