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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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괴로워하다 결국 서이건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사실 정신을 잃고 싶지 않았다. 눈 깜박거리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그저 서이건을 바라보고 싶었다. 힘들어하며 기절한 모습이 안쓰럽고 안타까웠지만, 그 반대로 오는 만족감은 이뤄 말할 수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쓰레기라 누군가 욕해도 되고, 악마라 손가락질해도 기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약의 기운에 갑자기 끌어온 러트는 몸이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은 어쩔 수 없이 지쳐 잠에 빠져들어야 했다. 혹시나 서이건이 품에서 사라질까 두려워하며 꼭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얼마큼 어둠 속에 있었을까. 어둠 속에 봄의 내음이 느끼며 안정감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을 때 갑자기 서늘함이 느껴졌다. 설마? 서이건이 자신의 품에서 나간 걸까. 그의 페로몬도 느껴지지 않는다. 한태경은 얼른 눈을 뜨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빠져나가려고 발악했지만 어째서인지 의식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서이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지. 대체? 네가 날 두고 어디 간 거야. 찾아야 해. 찾아서 다시 안고 있어야 해. 두 번 다시 내 품에서 빠져나가지 않도록. 씹어 먹을까. 그대로 그를 삼켜 버리면 될까. 서이건. 어디에 있어. 서이건.

『말을… 못하네?』

다시 시야가 흐릿해진다. 간신히 돌아왔던 정신이 다시 어둠 속에 잠식되려는 순간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이건인가. 아니다. 이 페로몬은 서이건이 아니다. 역겹다. 대체 이 페로몬은 뭐지. 눈앞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밖에서 계속 기다렸는데, 결국 이건이랑 잤나 봐? 절뚝거리며 나가는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안타까워, 태경아. 네가 아무리 그래도 서이건은 널 봐주지 않을 거야. 너는 알파고, 그도 알파니까. 내가 말했잖아. 알파는 오메가랑 이어져야 한다고. 나 같은 오메가가 없을 거야. 너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처럼 완벽한 사람이어야 해. 너랑 이 순간을 맞이하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몰라.』

서이건이 아니다. 이 사람은 누구지? 모르는 사람이다. 아니, 알고 있는 사람인가? 목소리는 익숙해.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의 인영이 조금씩 악마로 변해간다. 입이 귀까지 걸린 그 얼굴은 자신보다 더한 괴물이었다. 그는 주사기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조금씩 잠잠해져 가던 한태경의 괴물을 꺼냈다. 하지만 괴물은 반항했다.

『시발!! 이거 놔!!! 이거 놔!!』

서이건에게 가야 한다. 얼른 그를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 소굴에서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잡아. 투약해.』

지지 않으려 애썼고, 바퀴벌레의 뜻대로 되고 싶지 않았기에 거부했다. 그런 한태경을 몇 마리의 바퀴벌레가 들러붙어 또 다른 약물을 투약하고, 붙잡고 쓰러트리고 그 위에 올라탄 바퀴벌레는 강제로 각인을 시도했다.

『각인해. 한태경. 각인하자. 우리는 좋은 반려가 될 수 있을 거야. 나는 너만 사랑할 거야. 네 아이도 듬뿍 낳을 거야. 너와 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아이가 될 거야. 모두 우러러보겠지? 생각만 해도 정말 짜릿해. 그리고 너무 기뻐. 분명 너도 그럴 거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그 이야기를 너에게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괴물에게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점점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 마지막으로 서이건을 떠올렸다.

『버리지 않을 거다. 일단 사람 불러올 테니 제발 얌전히 있어.』

잔인한 짓을 한 자신을 탓하지 않고 끝까지 다정하게 자신을 챙겨준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우욱!!”

한태경은 다시 구토를 했다. 이제 토할 위액도 없었음에도 계속해서 토기가 올라왔다. 밀려든 기억과 어지럽게 너부러졌던 퍼즐 조각이 단번에 맞춰지면서 머리에 커다란 충격을 준 덕분이었다.

“젠… 장.”

자신이 무슨 짓을 했던가. 그리고 무슨 일이 여기에서 있었던 건가. 아니,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강유한과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사람들은 그것이 강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일로 인해서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 것이니 분명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일의 중심이 강유한이 아니라 자신과 서이건이었다. 왜 기억을 저 깊숙한 곳 어딘가에 숨겨 두었던 것일까. 왜 기억하려 하지 않았을까. 무서웠던 걸까.

16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