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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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삼킬 만큼 비가 끝도 없이 내렸다. 급기야는 천둥·번개까지 치면서 조금씩 하늘에 어둠이 물들고 어쩌면 내일이면 세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서이건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잤는데 왜 잠은 계속해서 쏟아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원치 않는 러트가 이상한 약에 의해 끌려 올라온 데다가 알파에게 페로몬이 쏟아 부어지고 노팅까지 당했으니 몸이 피곤함을 느끼는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무기력하게 누워 있기만 한 것은 전에 부상 이후 처음이라… 생각해보면 전부 한태경과 있으면서 겪은 일이었다. 서이건은 픽 웃으면서 눈을 감았다. 한태경이 어디에 있는지, 괜찮은 건지 김 사범님께 물어보았을 때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시긴 했지만 그래도 얼굴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 눈을 뜬 지 이틀이 지나도록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 때문에 많이 바쁠 수도 있지. 그래도 정말 괜찮은 건지 얼굴은 봤으면 좋겠는데….

- 쾅!!

정말 하늘이 찢어질 것 같은 엄청나게 큰 굉음에 이건은 잠속에 빠져들려다가 번쩍 눈을 떴다. 정말 그대로 지구가 두 쪽이 난다고 해도 믿을 만큼 큰 소리였다. 다행히 지구는 천둥·번개 한 번으로 쪼개지는 약한 행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이건은 정말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랐다. 천둥·번개 때문이 아닌 자신의 침대 앞에 서 있는 검은 인영 때문이었다. 숨도 못 쉬고 그 남자를 바라보다가 혹시나 자신을 죽이러 온 바퀴벌레인 줄 알고 방어할 생각을 하다 익숙한 눈동자에 눈을 깜박이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 태경?”

어두운 방 안, 그 흔한 달빛마저 없는 병실 안에서 비를 맞아 완전히 젖어 버린 남자가 가만히 서이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놀란 건 남자의 눈동자가 금색이라는 것이다. 십여 년처럼, 금색의 눈동자가 똑바로 서이건을 응시하고 있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열이 다 식어 버린 서늘한 손으로 서이건의 뺨을 쓸었다. 그 차가운 체온에 이건은 벌떡 일어났다.

“야, 너 왜 이렇게 차가워. 뭐야? 비를 얼마나 맞고 있었던 거야.”

정말 거짓말하지 않고 그가 입은 코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대로 소매를 쥐어짠다면 막 빨래한 것처럼 물이 쏟아질 것처럼. 그는 하늘에서 쏟은 비를 다 맞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아니, 경호원들은 다 뭐한 거야? 너 이렇게 비 맞도록 놔뒀어? 일단 옷 벗어.”

이건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허리고 엉덩이고 아직 아프긴 했지만 그렇다고 누워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 할 순 없으니 수건이라도 화장실에서 가져오려고 했다. 그러나 한태경이 이건의 손목을 붙잡았다. 정말 소름 돋을 정도로 차가웠다. 혹시 ‘지금 자신이 귀신을 만난 건가?’ 싶을 정도로 차가워서 한태경이 살아 있는 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이건은 자신의 손목을 잡은 한태경의 손 위에 다른 손을 올렸다. 다행이다. 잡힌다. 살아 있어.

“너, 손이 너무 차다. 아니 젖은 옷 입고 이래서 그래. 옷 벗자. 감기 걸려.”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의 체온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간신히 쥐어짜듯 단 한 문장을 뱉었다. 그러나 그 문장을 해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을 했냐니?”

“내가… 너에게….”

이건의 손목을 잡은 한태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를…. 내가 너에게 대체….”

아플 정도로 꽉 쥐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가고 한태경은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괴로운 듯 그는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무언가 답을 주고 싶은데 그 답이 뭔지 이건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하기엔 한태경이 더 고통스러워 할 것 같아서 서이건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한번 번쩍하는 번개의 빛 덕분에 서이건은 한태경의 다른 손에 걸려 있는 끈을 보게 되었다. 그 끈을 보자마자 심장이 그대로 멎는 줄 알았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덜덜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끈을 붙잡았다. 이 감촉은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다. 태권도 도복 끈….

“이게… 대체….”

설마 했다. 그런데도 외면했다. 그가 물어본 말이 설마 그때 일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젖은 끈이 인정할 수 없는 현실로 끌고 나왔다.

16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