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태경의 집에서 밥을 먹고, 늘 하던 대로 그의 곁을 지켰다. 어딘가 나갈 줄 알았지만, 그는 어디도 나가지 않고 집에서도 뭔가 열심히 일을 했다. 어떻게 보면 일에 미친 사람 같았다. 쉬지 않고 생각하고 손가락을 두드렸다. 잠시 쉰다 싶었지만 그것도 완연히 쉬는 게 아니라 TV 앞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었다. 정계의 뉴스, 일상적인 뉴스, 사건 뉴스 등 하나도 가리지 않고 그는 꼼꼼히 보다 다시 일을 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쉬어야겠다고 돌아가도 좋다고 이야기했을 때 이건은 ‘대체 왜 불렀어?’라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교대 멤버가 와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물론 퇴근도 쉽지 않았다. 한태경이 사준 옷 덕분에 혹여나 이건이 빼먹고 갈까 걱정 생각되었는지 자신의 기사를 불러, 짐을 다 실어서 데려다주었고 이건은 정말 기사님께 죄송하다고 백번 인사해야 했다. 다행히 기사님이 좋은 분이시라 집안까지 종이가방을 다 들어서 올려다 주었고, 이건은 기사님께 박카스 한 병 대접하고 감사하다고 다시 인사하고 보냈다. 집에 들어와 거실을 꽉 채운 가방을 보고 한숨을 푹 쉬며 정리는 다음에 하자고 생각하며 입은 옷을 벗고 그대로 이불을 깔고 바닥에 누웠다. 오늘은 여러모로 조금 다른 하루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과 달리, 똑같은 하루를 보낸 것 같아서 이건은 기분이 묘했다. 뭔가 이상한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할 일을 한 것 같고….“아, 재우.”
헐레벌떡 재우를 놔두고 나온 것이 생각났다. 밤늦은 시간이라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래도 시간을 오래 끌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이건은 조심스럽게 재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밤늦게 미안해.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모처럼 네 소중한 시간 내줬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다. 맛있는 거 먹을 수 있어서 고마웠고, 다음에 얼굴 보면 인사 제대로 할게. 잘 자.
메시지를 보내고 재우가 내일 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읽음 표시가 생겼다. 그리고 곧바로 전화가 왔다. 이건은 벌떡 일어나 바로 앉았다.
“어, 재우야.”
[이건 형, 어디에요?]
“나, 지금 집.”
[아, 집에 들어왔어요? 하긴 그러니까 메시지 보낼 수 있었겠지.]
“하하, 그래… 안 자고 있었어?”
[책 보고 있었어요. 형,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녹봉 받아먹고 사는데 어쩔 수 없죠.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야지. 특히 태경 형은 좀… 전 언제든지 태경 형이 형을 부를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전 오히려 쉬는 날 일한 형이 더 걱정돼요.]
“괜찮아. 뭔가 일이 있는가? 했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고. 쉬는 것처럼 일을 하고 왔어.”
[형은 사람이 너무 좋다. 그러면 안 돼요. 그러다 호랑이에게 잡혀가요.]
“하하, 넌 가끔 나보다 나이 많아 보여. 아, 생긴 거 말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게.”
[아, 상처받으려다가 형이 얼른 정정해줘서 살았어요.]
“미안.”
[그런 이야기 하지 말라니까요. 아, 형. 나랑 수다나 떨까요?]
“음?”
[한 5분만? 아까 형이랑 대화하면서 재미있었거든요. 그래서 조금 더 이야기 하고 싶어요.]
“그래. 너만 좋다면 난 상관없어.”
[좋았어. 음… 무슨 이야기를 할까. 아, 나 궁금했던 거 물어봐도 돼요?]
“그래.”
[형, 왜 경호원 했어요? 사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 좋은 제안 많이 왔을 텐데… 항상 그게 궁금했어요.]
“내가 이야기해준 적 없나?”
[네.]
“음… 당연하겠네. 사실 나도 왜 경호원을 하게 된 건지 잘 모르겠어. 어느 순간 네가 말했다시피 좋은 조건으로 제안 들어온 거 다 거절하고 이 일을 택했어서.”
[경호원이 꿈이었어요?]
“어릴 적부터 꿈은 태권도로 올림픽 금메달 따는 거였는데 그 꿈을 이루고 나서 뭔가 허전한 마음이 있긴 했어. 그런데 이상하게 다음에 뭐하지? 생각보다 경호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그 이후 소소하게 준비하고 있긴 했어.”
[아…. 그랬구나.]
“그런데 재우, 네가 봤으니 알겠지만 준비를 해도 나는 아마 제대로 된 경호원은 못 되었을 거야. 네가 나타나서 그제야 제대로 된 경호원을 할 수 있게 되었어. 그래서 너에게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