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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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더는 충격 받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심장이 멎는 일도, 고통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치 신이 ‘이게 끝인 줄 알았지?’하고 농락하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아, 맞아. 강유한.”

“체육심리학과에서 유명하잖아요. 여러모로 팔방미인이라.”

“아니, 그런데 어쩌다.”

이미 이들은 강유한이라고 확정 짓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건은 믿을 수가 없었다. 직접 눈으로 봐야만 했다. 그래서 뛰었다. 몸이 아픈 것도 모두 잊고 아까 자신이 문을 열고 나왔던 그곳으로. 자신이 알기로는 강유한을 마주치긴 했지만 돌아가라고 했고, 나올 때까지 그의 페로몬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하아… 하아…. 흐읍!”

이건은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강하게 느껴지는 한태경과 또 한 명의 페로몬… 그것도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풋사과의 페로몬에 코와 입을 막았다. 부정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다고 어딘가에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 페로몬은 회피할 수 없는 증거였다.

이미 그 안은 다 수습이 된 건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터덜터덜 문을 열고 들어간 서이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은 아직 엉망이었다. 거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정사의 흔적이 있었다. 자신의 페로몬은 사라지고 온통 한태경과 강유한의 페로몬만이 가득했다.

“말도 안 돼.”

대체 그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건은 털썩 주저앉아 정액이 말라 비틀어져 붙어 있는 바닥을 보았다. 그리고 시선 끝에 보이는 한태경의 핸드폰이 보여 손을 뻗어 그 핸드폰을 들었다. 액정이 깨져서 엉망이었다. 혹시나 해서 버튼을 눌러보니 배터리가 다 되어서 켜지지도 않았다. 차갑게 식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이건은 허망하게 그곳에 앉아 있었다.



한태경과 강유한의 소문은 빠르게 학교에 퍼졌다. 며칠 동안 국체대 내부는 술렁였고, 많은 이들의 입방아에 그들의 이름이 올라갔지만 서이건은 그곳에 속하지 않았다. 기숙사에 틀어박혀 며칠을 끙끙 앓던 이건이 정신을 차린 것은 1주일이 지나서였고, 그 날은 공교롭게도 개강 날이었다.

아침을 맞이하고 가만히 침대에 앉아 1주일째 기숙사에 들어오지도 않고, 연락도 없는 한태경의 침대를 보았다. 시발 얼굴이라도 봐야 무슨 이야기라도 할 것 같은데 막상 얼굴을 보기가 겁이 나서 차라리 영원히 들어오지 말고 이대로 영영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이건은 마른세수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몇몇 군데 타박상이 있는 것을 제외하곤 걷는 것도 괜찮아졌고, 배도 이제 아프지 않았다.

“하아….”

오늘 훈련이 가능할 것 같았다. 실컷 몸을 움직이고 땀을 빼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잡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건은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고 일단 몸을 씻고 다시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가 수건을 집어 던지고 바닥에 있는 한태경의 슬리퍼를 그의 침대에 집어 던졌다.

“개새끼야.”

시발… 지금 어디에 있는 건데 대체?! 왜 안 나타나는 건데?

사실 1주일간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한태경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핸드폰이 자신에게 있으니 그래도 핸드폰은 찾으러 오겠지. 만약 오면 죽여 놔야지. 하지만 그 녀석이라면 분명 사과를 할 테니 반만 죽여 놓고 생각해봐야지. 한태경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바퀴벌레들 때문에 그렇게 되었으니… 분명 그 녀석에게도 큰 상처가 되었을 테니까. 딱 반만 죽여 놓고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없던 일로 하고 서로 잊고 지금까지처럼 잘 지내자고 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하지만 녀석은 오지 않았다. 오피스텔로 찾아갈까 했지만 자신이 찾아가는 것도 웃겨서 그냥 기다렸다. 하지만 한태경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핸드폰도 찾으러 오지 않았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져 모든 기억과 몸의 고통을 고스란히 혼자 감당해야 했다.

실컷 화를 내고 다시 화를 삭이기를 몇 번… 이건은 간신히 기숙사를 나와 씩씩하게 혼자 밥을 먹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가방에 보이는 한태경의 핸드폰을 사물함에 밀어 넣고 도복으로 갈아입었다.

“어? 서이건, 나왔네?”

선배들이 이건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요 며칠 안 보이더니.”

“아, 감기몸살이 너무 심하게 걸려서.”

“여름감기 독하지. 그래서 지금은 괜찮고?”

“네.”

솔직히 그들이 이건의 안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고 있지만, 정작 궁금한 건 따로 있는 얼굴들이었다. 이럴 때는 선수 치는 게 우선이다.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크흠. 그게-”

“아니, 네가 모르는 게 말이 돼? 너랑 한태경이 얼마나 한 몸처럼 붙어 있었는데.”

이건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더니 기다렸다는 듯 선배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을 피하려고 했지만 문 앞까지 막아선 그들은 진짜 너무 궁금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한 몸처럼 붙어 있었던 건 맞지만 저도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할 때 이미 상황이 종료되어있어서 몰라요. 그날 이후 연락 하나도 없고요. 기숙사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이건은 자신의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1주일 전부터 톡 연락이 끊겼고, 전화도 온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자 선배들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아, 그럼 너도 답답하겠네.”

이게 ‘답답하다.’로 설명할 수 있는 기분인가. 하루하루가 기분이 점점 더러워지고 어두워지고 있는데.

“뭔가 많이 쉬쉬하는 분위기긴 하더라. 거기 목격자도 제법 있었던 걸로 아는데 전부 입을 싹 닫더라고. NI에서 돈을 먹였나 싶더라니까?”

“그러고 보니 기사도 없지? 한태경이 소문처럼 강유한을 강간했다면 생각해봐. 그게 뉴스가 안 되겠냐? 무려 NI의 후계자 중 한 명인데. 기자들이 신나서 덤벼들지. 그런데 기사가 하나도 없더라니까.”

이건 역시 아플 때 기사를 검색했기 때문에 알고 있다. 정말 놀랍게도 관련 기사가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어떤 기사가 나든 한태경도 강유한도 상처가 될 것이고 평생 모르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한태경 그 녀석 그렇게 안 봤는데.”

“우리도 미리미리 러트 해소 조금이라도 해줘야 해. 안 그러면 그런 일 안 터질 거란 보장이 없어.”

“그 왜 있잖아. 전에 그런 일도 있었잖아.”

선배들이 이상한 이야기로 흐르려고 하기에 이건은 무시하고 대기실을 나왔다. 운동하고 땀을 빼고 잡생각을 잠시라도 없애 버리고 싶었는데 물 건너갔다 싶었다. 그럴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모처럼 도복을 입었으니까.

가만히 체육관에 들어가 이건은 당장 1주일 전에 저기에서 함께 훈련하던 한태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친 새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너랑 난데. 갑자기 왜 선배가 끼어든 거냐고. 이 새끼야. 설명해. 설명하라고!!

“이건아.”

막 체육관에 들어온 감독이 이건을 보고 주위를 살피더니 슬쩍 불렀다.

“이리 와봐.”

“네.”

감독님이 이건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문을 닫고 잠그기까지 한 그는 무척 조심스러운 느낌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분명 한태경에 관련되어서겠지.

“앉아.”

“네.”

하지만 감독도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는 연락했을 가능성이 클 테니까.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여름 감기 제대로 들었나 보네. 그래도 여름에 크게 아프고 나면 겨울은 잘 날거라니까. 너에겐 겨울이 더 중요한 거 알고 있지? 우리가 너에게 거는 기대가 커.”

“네,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됐다. 가서 훈련해. 1주일간 쉰만큼 움직여야지.”

이게 끝인가. 어떻게 하지. 물어봐야 할까. 이건은 살짝 망설이다가 물어볼 결심을 했다. 감독님 아니면 정말 물어볼 사람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감독님. 혹시 태경이. 연락받으신 거 없나요? 1주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어서요. 기숙사에도 들어오지 않고요.”

“흠…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소문을 너무 믿지는 말고. 기다려. 너한테는 그래도 그 녀석이 연락하지 않겠어?”

감독이 이건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이건이 원하는 답이 아니다. 하나도 원하는 것을 꺼내지 못했다. 이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와 혼자 연습을 했다. 아니, 선배들과 함께 대련을 했지만 생각만큼 머릿속의 잡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수업까지 들으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평범하게 보내려고 했지만, 어딘가 막혀 앞으로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억지로 저녁까지 배부르게 먹고 기숙사 앞 공원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내일은 오피스텔에 한번 가볼까. 고민하던 차에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이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느낌이 들어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16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