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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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제 살 것 같네.”

“왜? 무슨 일 있었어?”

“좀… 답답한 일이 있긴 했는데 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으니. 그래서 답답한가?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어서 마셔.”

진 사범이 다시 김 사범의 빈 잔을 채워주고 두 사람은 건배하더니 소주를 열심히 마셨다. 이제야 같이 마실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서 진 사범도 고삐가 풀린 것 같아 이건은 하하 웃었다.

“그럼 태경이는 기숙사로 갔나요?”

“아니, 본가 갔어. 오늘 중으로 기숙사로 다시 돌아갈 거라고 하긴 하더라.”

“네.”

시간을 보니 밤 9시가 다 되어간다. 이건도 슬슬 일어나야 할 시간인 것 같았다. 학교랑 이곳은 제법 멀어서 버스를 타면 1시간 30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사범님 기분도 좋은 듯하니 한 30분 정도 더 있다가 일어서도 되겠지 싶어 이 건은 사범님들을 위해 고기를 열심히 구웠다. 그리고 잠시 화장실 갔다가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한태경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어? 나 아직 진 사범님이랑 있어. 넌 기숙사 왔어?”

[어, 왔더니 없어서 전화했어.]

“한 10분 뒤에 출발하려고.”

[위치 말해줘. 차 보낼게.]

“어? 그럴 필요 없어. 버스 타면 돼”

[버스 타고 오다가 통금 시간 어기면 어떻게 하려고]

“아니, 시간 많이 남았는데.”

[부탁이다. 차 보낼 테니 그냥 타고 와.]

뭐지? 한태경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는 것도 이상하고, 목소리도 깔려있다. 무슨 일이 있나? 더는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라 이건은 알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 와서 사범님들께 작별 인사를 했다.

“학교 통금 시간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랬지. 통금 있다고 했지. 어서 가봐.”

“두 분 다 다음에 봬요. 사범, 연락 자주 할게요.”

“그래그래. 잘 가고 건강해라. 훈련 열심히 하고.”

“네.”

“아, 이건아.”

이건이 나가려고 하니 김 사범이 이건을 불러 세웠다.

“네, 김 사범님.”

“태경이 잘 부탁한다.”

“네?”

“그 녀석 지금 좀 힘들 텐데… 아니다. 그냥 잘 부탁해. 잘 지내줘.”

“…네. 알겠습니다.”

김 사범이 뭔가 할 이야기가 많아 보이지만 이야기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마치 그때 병원에서 만났던 재우의 모습 같았다. 아까 태경의 목소리가 안 좋았던 것도 생각해 보면 뭔가 일이 있는 걸까. 살짝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고깃집을 나오니 마침 익숙한 차가 도착해 있었다. 그 차에 타니 기사가 전화로 차에 타셨다고 태경에게 보고하는 듯했다. 보통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데 대체 무슨 일이지? 이건은 가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달려 기숙사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온통 깜깜했다. 아까 한태경이 기숙사라고 했는데 이렇게 깜깜할 리가 없지 않은가. 불을 켜서 둘러보니 한태경이 양복을 입은 그대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야, 어둡게 하고 뭐 하고 있어.”

“어, 왔어?”

태경이 침대에서 일어나 이건을 보며 안도하듯 웃었다.

“몸에서 고기 냄새난다.”

“아, 그래?”

킁킁 옷 냄새를 맡아보니 확실히 냄새가 좀 많이 난다. 이건이 옷을 벗고 테라스 문을 열려고 하자 태경이 이건의 손목을 붙잡았다.

“문 열지 마.”

“어? 왜.”

“열지 마.”

“…알았어.”

오늘 정말 이상하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슬쩍 커튼을 열어 밖을 보곤 한태경은 다시 커튼을 꼭꼭 닫았다. 좀 갑갑하긴 했지만, 이유가 있겠지 싶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아까 고기 먹는데 김 사범님 오셨었어. 두 분 마시는 거 보고 왔는데 이쯤 되면 쓰러지신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랬어? 라든가. 무슨 이야기 했어? 라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한태경은 가만히 서서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야, 너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어 보여?”

“어, 엄청나게. 답지 않은 행동을 계속하는 거 보니 뭔가 사고라도 쳤어?”

전혀 사고를 칠 놈은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행동이 이상해 이건이 물어보았다.

“하아… 씻고 와. 이야기해 줄게.”

“어?”

순순히 이야기해 준다니 얼떨떨 하긴 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가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겠지. 아니면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어서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을 테니. 이건은 알았다고 말하고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하고 나왔다. 그사이에 옷을 갈아입은 건지 편한 옷을 입은 태경은 커피를 내려서 몇 주 전에 산 티 테이블 위에 커피 잔을 올려놓고 이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앉아.”

“그래.”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툭툭 털고 그 자리에 앉았다.

“조금 복잡한 이야기야.”

“어.”

“그런데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만약을 대비해서….”

“만약을 대비해서?”

“나만 위험하면 다행인데 어쩌면 내 주위 사람들… 그러니까 너까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위험해.”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야기할게.”

태경은 이건이 오기 전까지 많이 고민했다. 이건에게 이야기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이건에게 가능하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길 바랐다. 그저 아무런 고민 없이 오직 선발전만을 위해 달려가길 바랐다. 그래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런데 만약 이야기하지 않을 거라면 자신은 이건을 떠나야 했다. 기숙사로 그들이 온 이상 이건도 그 레이더망에 넣었을 것이 뻔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들이 태경을 감시하고 있었다면 거의 24시간 붙어 있는 것을 확인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다 만약 이건이 납치를 당하거나 험한 일을 당한다면? 가능성이 큰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니 떠나야 했다. 이건이 더 위험해지기 전에.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태경은 이건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좀 더 함께 있고 싶었고, 함께 올림픽에 가고 싶었고, 언제고 옛날에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약속이더라도 말하면서 같이 이 괴물을 없애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그리고 계속… 함께 있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태경이 원하는 형태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라든 이건이 행복한 길로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여기서 아무 말 하지 않고 떠나버리면… 꿈도 박살 나고, 지금까지 쌓아온 성도 무너져 내린다. 이건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고 태권도도 할 수 없고 괴물도 무찌를 수 없다. 평생 도망자 신세가 되겠지. 이건을 떠나온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면서.

그건 싫었다. 그래서 다른 방향의 결론을 내렸다. 이 건에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순 없어도 상황을 이야기해서 함께 싸워 달라고 요청하기로 그리고 만약을 대비할 수 있도록.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꺼내며 너무 복잡하기에 그냥 처음에는 거의 반죽은 상태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우성 알파성을 이식받았고, 그 이식 받은 것이 부작용이 나타나 지금 자신의 알파성과 충돌해서 완전히 억제한 상태이다. 그리고 그 부작용이라는 것이 조금 특별한 성질이라 현재 자신의 유전자를 노리는 이들이 많고, 그들이 태경이 어릴 적부터 괴롭혀왔고, 그게 제대로 되지 않자 재우까지 납치한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이건은 커피를 마시지도 못하고 멍하니 태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숙사 앞에 수상한 인물들이 이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일,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자 이건의 얼굴색이 급격히 좋지 않았다. 한동안 방안에 침묵만이 맴돌았다. 그리고 이건은 여러 번 마른세수하고 급기야는 커피를 원샷 하곤 깊은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바퀴벌레 같은 것들이… 널 노리기 위해서 학교에도 잠입했다 이 말이야?”

“그래.”

“쫓아낼 수는 없어? 학교 총장이랑 네 아버지랑 아는 사이라며.”

“이미 그러고 있어. 하지만 점점 수법이 교묘해지고 있어서. 동기들 사이에 있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하더라.”

“뭐?”

“그건 아닐 거야. 동기들의 신원은 이미 다 파악했거든. 아니, 동기들뿐 아니라 이 학교에 다니는 이들의 신원은 이미 파악한 상태야. 위험인물이 있으면 절대 안 되니까. 하지만 학교에 오고 가는 이들을 전부 일일이 볼 순 없지. 그건 불가능해.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선 안면 인식 신원 확인은 개인정보 침해로 불법이잖아? 그래도 최대한의 모든 조치는 다 하고 있어.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나 몰래 몇 사람 처리했을 가능성도 있고.”

“…아니 그 정도란 말이야?”

농담이지? 라는 이건의 말에 한태경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정말 이건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현재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저 하하 호호하고 훈련하고 연습하고 시험을 치고 그것만으로 바쁘고 정신없어서… 그리고 함께 있으면서 함께 웃고 즐기니까 이런 문제가 있는지 몰랐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16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