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딱 한 대, 딱 한 번만 발차기를 날렸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이건은 꾹 참았다. 여기서 잘못했다가 혹시나 그들의 몸에 상처라도 내서 시험 자격마저 잃으면 큰일이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다 좋게 생각하고 웃으면서 견디자. 서이건은 이를 악물며 다시 집중했다.그리고 드디어 필기시험 날이 다가왔다.
필기시험은 담당 사범을 동행하여 접수한 후, 한 교실에 단 한 명의 시험 응시자만 들어가서 시험을 치르고 나온다. 그사이 함께 온 사범은 교실 밖에서 기다린다.
서이건의 시험 시각은 오후 2시. 체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점심을 꾸역꾸역 먹고 국민체육대학교에 도착해 그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학교가 국체대…. 영상이나 사진으로는 많이 봤지만 이렇게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철저히 대한민국 국가대표를 위한 시설이었고, 자격이 없으면 교문 앞에서 출입을 거부당한다. 서이건은 그 자격을 받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고, 오늘 바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다만 태권도복을 입은 것이 아닌 그저 평범한 캐주얼 차림에, 특기인 발차기가 아니라 펜 하나에 기대야 하는 상황이지만….
“괜찮아?”
진 사범이 이건의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하지만 이건이야말로 진 사범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괜찮으냐고. 아까부터 낯빛이 점점 창백해지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긴장되던 것이 싹 사라졌다. 이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가 싶어서 500mL 생수통 하나 손에 쥐여준 뒤 천천히 시험장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음?”
시험장이 있는 건물 앞이 시끌시끌했다. 계단 앞에 웬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글우글했고, 그 사이에 머리 하나가 불쑥 솟아 있어 본의 아니게 그 머리통의 주인을 본 서이건과 진 사범은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꼬리표처럼 늘 자신을 따라다니는 인물, 그런데도 단 한 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는 남자.
“한태경 아니야?”
진짠가? 잘못 본 거 아닌가? 멍하니 생각하고 있던 이건과는 달리 한두 번 실제로 마주친 적 있는 진 사범은 빠르게 그가 누구인지 파악했다.
한태경… 한태경이라고?!
“시험 보고 나왔나 보네.”
진 사범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였지만, 한태경의 몸은 입구 쪽을 향해 있고, 계단 몇 칸 아래 길에는 검은색 세단이 서 있었다. 그 말인즉슨 한태경이 시험을 끝마치고 나왔다는 거였다.
“한태경 선수! 시험 어떠셨나요?”
“이쪽을 봐주세요! 한태경 선수!”
기자들이 점점 한태경과의 거리를 좁히며 그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있었지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입술을 꽉 다물고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있는 그는 옅은 갈색 머리에 금안을 하고 있었다. 이목구비로는 미인상으로도 보이지만 두꺼운 얼굴선과 곧은 허리와 가슴선, 다부진 체육인의 몸은 그가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단번에 보여주었다. 진짜….
“와, 저놈은 진짜 얼굴은 난 놈이다. 난 놈.”
마치 이건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진 사범이 크게 감탄하며 말했다. 살짝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분위기가 지금껏 영상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자는 아예 상대도 하지 않네.”
진 사범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런데 기자들이 왜 저렇게 와 있는 거예요? 아, 한태경이라서인가.”
“그렇지 않겠냐. 저래 봬도 유망주니.”
“흐음….”
저 녀석도 귀찮겠다. 고작 필기시험 하나에 기자들이 오다니. 으으 엮이기 전에 얼른 도망을….
“아, 그런데 저 녀석도 시험 봐요? 내신이 좋아서 프리패스 아니에요?”
이건이 그제야 의문스러운 점을 깨닫고 물었다. 그러자 진 사범이 한숨을 푹 쉬었다.
“자기도 시험 보겠다고 했다더라.”
“아니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자신 있다 이거지. 지지 마라. 서이건.”
“…네에.”
자신 없이 대답한 이건이 한태경을 다시 힐끔 보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어….”
한태경과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하게 기자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무시하고 있던 남자가 서이건을 발견하자 살짝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고갯짓으로 살짝 꾸벅하고 인사했다.
인사? 맞나? 나한테 한 거겠지?
“어… 어….”
이건도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때 한태경의 변화를 눈치챈 기자 한 명이 고개를 돌려 서이건을 보았다.
“어? 서이건 선수 아니야?”
“네에? 정말요??”
“서이건 선수!”
그 한마디에 다른 기자들도 일제히 서이건을 보더니 새로운 사냥감을 발견한 눈으로 일제히 몸을 돌려 다가오려고 했다.
아, 잠시만.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난감했다. 기자들은 가능하면 만나고 싶지도,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
기자들이 줄곧 자신들을 무시하던 한태경을 포기하고 갑자기 나타난 차선책 서이건에게 다가가려던 순간, 한태경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기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다시 몸을 돌려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시험은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좋은 결과 있을 것 같아서 기대하고 있습니다.”
진짜 낮은 저음이다. 어떻게 보면 얼굴과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진짜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계속 듣고 싶을 정도로. 갑자기 김경수의 말이 생각났다. ‘진짜 재수 없다.’
“이건아, 이때다. 가자.”
기자들이 한태경한테 혼을 빼고 있을 때 얼른 가자고 채근하는 진 사범에 말에 서이건 역시 서둘러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정말 타이밍도 좋게 입을 열었다. 덕분에 기자들이 자신에게 오지 않아서 살긴 했지만… 갑자기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냥 인터뷰하고 싶어서? 아니면 관심을 뺏기니까 일부러? 에이 설마…. 서이건은 머리를 긁적이며, 기자들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고 있는 한태경의 뒷모습을 한 번 더 보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문이 열리며 불쑥 커다란 덩치가 옆에 앉자 책을 보던 남자는 책을 덮으며 슬쩍 옆자리로 비켜 주었다. 자리에 앉은 남자는 살짝 힘들었는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데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차 문이 닫혔음에도 불구하고 문을 두드리며 주인공의 이름을 부른다.
“태경 군! 한마디만 더요!”
이대로 그들을 무시하고 차를 출발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가 누구 한 명이라도 다치면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생길 테니 한태경은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창문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기자님들과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아버지와 약속이 있어서… 다음엔 꼭 기자님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한태경이 정말 사람 혼을 쏙 빼놓을 만큼 예쁜 미소로 이야기하자 기자들의 흥분이 한층 누그러졌다. 게다가 그의 입에서 나온 ‘아버지’라는 단어는 기자들이 한 발짝 물러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한태경은 끝까지 예의를 지키며 기자들에게 인사하고 얼른 창문을 닫았다.
“천천히 출발해 주세요.”
“네.”
기사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태경의 주문대로 차는 여유롭게 천천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기자들의 모습이 손가락 하나 크기 정도로 작게 보일 때쯤에야 편안하게 의자에 몸을 기댈 수 있었다.
“한 대표님과의 약속은 거짓말이지?”
지친 듯 한숨을 쉬는 제자의 얼굴을 보던 김태운이 물었다.
“네, 아버지껜 죄송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긴 국내 기자들이 제일 눈치 보는 사람이 한태경의 아버지이자 현 NI 대표인 한태석이었다. 참고로 두 번째로 눈치 보는 사람은 그 한태석의 반려인 박재경 대표였고. 그런 두 사람의 아이이자 자신의 제자인 한태경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마 성격 같아서는 기자들이고 뭐고 다 내던져 버리고 싶었겠지만,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무척 사랑하고 아끼기에 그들에게 흠이 될 만한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아까 갑자기 왜 기자들 인터뷰에 응해준 거야?”
“음….”
한태경이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살짝 웃었다. 정말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였다. 아마 눈앞에 지금 한태경의 속내까지 모르는 사람들이 저 미소를 본다면 단번에 빠져 버릴 정도로.
“그냥요.”
“그냥? 네가?”
기자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마음도 없다. 그게 한태경이 어릴 적부터 한결같이 취해온 스탠스였는데, 오늘 처음으로 그걸 깬 것이다. 그러니 차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태운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러다 아주 잠깐이지만 한태경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발견했고, 그 시선을 따라가자 놀랍게도 진철운과 그의 제자 서이건이 있었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자신들에게 들이닥치려는 기자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한태경이 입을 열었던 것이고.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