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음성이 정확하게 서이건의 귀에 꽂혔다. 성우 해도 되겠네. 목소리 엄청 좋은데. 그런데 저건 누구한테 하는 말이지. 설마 나한테 하는 소린가. 설마 알아본 거야? 아, 물론 알아봤겠지. 당연한 생각을 했네.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서이건은 한태경의 시선을 무시하며 주문받은 것을 정리했다.
한태경은 그런 이건을 바라보다 이내 살짝 미소를 머금고는 자신의 뒤에서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리고 커피를 받을 때까지 카운터에서 일하고 있는 서이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기,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매니저가 직접 한태경에게 아메리카노를 전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매니저님.”
“네.”
“저… 카운터에 있는 알바생… 원래 여기서 일했나요?”
“아, 저 남자애 말이죠?”
“네.”
“아마 태경 님과 동갑일 겁니다.”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아신다고요? 아는 사이십니까?”
“네. 아마 저쪽은 절 모르는 것 같지만요.”
“아… 음, 주말만 가끔 와서 도와주는 친굽니다. 성실하고 착하고 체력도 좋아서 제가 가끔 급할 때 도와 달라고 요청하죠.”
“그렇군요. 커피 감사합니다.”
“재경 님께 안부 전해 주세요.”
“네.”
한태경이 카페를 빠져나가자 서이건은 슬쩍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같은 고3인데 코트 자락 휘날리며 걸어가는 거 보니 정말 다른 세상 사람인가 싶기도 했다. 아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 그건 스스로 불행해질 뿐이었다. 어차피 경기장에서 마주하면 같은 사람이고 같은 조건이다.
“연우 너무 안 오네.”
매니저가 걱정되는 듯 이야기했다.
“저 화장실 가려던 참이라, 가는 김에 연우 상태 보고 올게요.”
“그래. 내가 카운터 보고 있을게.”
매니저에게 잠시 카운터를 맡기고 이건이 직원 휴게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오후 파트를 담당할 알바생이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연우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진호 형, 혹시 연우 못 봤어요?”
“음? 나 오니까 없던데?”
답답하다고 하더니 잠시 바람 쐬러 갔나. 이건은 그냥 화장실로 갈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영 몸이 안 좋아 보였던 게 신경 쓰여서 조금 더 찾아보려 휴게실 복도 끝에 연결된 비상문을 열었다.
“도와주세요!!! 싫어!!”
카페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와 재활용품을 버리는 큰 쓰레기통 너머로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게 도와 달라고 외치는 비명. 서이건은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검은 인영이 후다닥 몸을 피해 이건의 옆을 스쳐 지나갔고, 쓰레기통 옆에는 옷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연우가 얻어맞았는지 온통 붉어진 얼굴로 엉엉 울고 있었다.
“맙소사. 연우야!!”
“무슨 일이에요?!”
소리가 들렸는지 휴게실에 있던 다른 알바생이 뛰쳐나왔다.
“연우야! 괜찮아?”
“……이건아.”
연우는 이건을 붙잡고 울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연우는 오메가다. 게다가 지금 느껴지는 페로몬을 보아 히트 사이클이 온 것이 틀림없었고…. 이건은 다행히 지금 있는 다른 알바생이 베타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진호 형, 연우 좀 챙겨줘요. 억제제 먹이고 병원에 데려가요. 매니저 형에게도 알리고요.”
이건은 앞치마를 벗고 소매를 걷었다.
“뭐? 너는?”
“저 새끼 잡아야죠.”
“뭐?!”
진호가 말리기도 전에 서이건은 골목을 벗어나 아까 그 쓰레기가 달려간 방향으로 뛰어나갔다. 스치긴 했지만 똑똑히 그 모습을 봤다. 청바지에 검은 티셔츠, 키는 서이건보다 작았지만 체격은 꽤 있어 보였다. 짧은 머리에 수염은 깎지 않아 덥수룩했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짧게 스친 것치고는 꽤 세세하게 다 기억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골목을 벗어나자 눈 앞에 펼쳐진 엄청난 인파였다. 원래도 번화가로 유명한 지역에 있는 NI 본사 건물, 그리고 그 주위에 있는 쇼핑센터 규모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일단 커다란 교차로가 있는 쪽은 길을 건너거나 도망가기 힘들어질 테니, 그놈이 선택할 만한 방향은 저 많은 인파가 건너는 횡단보도 쪽이었다. 게다가 횡단보도만 건너면 더더욱 사람을 찾기 힘든 쇼핑센터가 있으니 그쪽으로 도망칠 게 뻔했다. 그 전에 잡아야 했다. 어디에 있지?
마침 신호가 바뀌자 서이건은 더 초조해졌다. 진짜 무슨 인간들이 이렇게 많은 건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사람 중엔 없었다. 건너야 할까? 아니면 근처를 더 살펴야 할까. 이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반쯤 지나고 있었다. 순간 검은 모자를 쓰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모자? 그놈은 모자를 쓰고 있지 않았다. 그럼 아닌가? 하지만 어쩐지 체격과 옷차림이 그 남자 같았다. 이건은 그 남자가 조금이라도 옆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 바로 그때였다. 남자가 주변을 살피듯 슬쩍 뒤를 돌아본 것이다.
“저 새끼가!!”
서이건은 있는 힘껏 횡단보도를 향해 뛰었다. 그러자 남자도 뭔가 눈치를 챘는지 빠른 걸음으로 달리듯 걷기 시작했다. 따라잡을 수 있을까? 걱정되던 그때, 이건의 시야에 누군가 들어왔다. 그놈이 스쳐 가는 한 남자. 올곧은 자세. 그리고 여유 있는 발걸음.
“한태경!!!”
정말 있는 힘껏 그를 불렀다. 도로를 가득 메운 차와 빽빽하리만큼 많은 사람, 귀를 어지럽히는 도시의 소음 속에서 어쩌면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기적처럼 바로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이건과 눈이 마주쳤다.
“앞에!! 앞에 가는 검은색 모자 쓴 남자 잡아!!! 청바지 입은 남자!! 그 새끼 강간 미수범이야!!”
이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태경이 들고 있던 커피를 옆을 지나던 이에게 정중히 부탁하듯 건네고는 있는 힘껏 도망치고 있던 검은색 모자를 쓴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넌 그 남자는 이건의 예상대로 쇼핑센터로 가려고 했지만,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한태경에게 뒷덜미가 붙잡혔고 한태경은 그를 인정사정없이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씨발!! 넌 뭐야?!”
검은색 모자의 사내는 한태경을 보고 억울한 듯 외쳤다. 한태경은 그의 팔을 꺾어 꽉 붙잡았고, 한쪽 손으론 핸드폰을 꺼내 112를 눌러 신고했다. 그사이 도착한 서이건은 숨을 몰아쉬며 검은색 모자를 쓴 쓰레기를 한심한 듯 내려다보았다.
“미친 새끼가 대낮에 무슨-!”
“이이!!!”
억울한 듯 이를 까득 갈며 목을 뒤틀어 서이건을 노려보던 그놈은 순간 몸을 꿈틀거렸다. 그리곤 제 몸에 깔린 팔을 아득바득 움직여 바지춤 어디선가 아미 나이프를 꺼내 휘둘렀고, 그 칼날이 한태경의 팔을 스쳤다.
“한태경!”
“쯧.”
한태경이 어쩔 수 없이 남자를 잡고 있던 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자 역시 벌떡 일어나 칼을 휘둘렀다. 와 진짜 가지가지 한다. 잘 보니까 남자는 오른쪽 발목에 전자발찌도 차고 있었다. 저런 새끼는 거리에 풀면 안 되는데! 이 나라 법은 왜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이야.
“가까이 오지 마!! 죽일 거다!!”
와 저런 진부한 대사까지. 서이건은 정말 한숨이 나왔다. 그렇다고 그대로 둘 순 없다.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만약 누군가를 붙잡고 인질극을 벌인다든가, 혹여 다치는 사람이라도 생긴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어떻게 해야 하지.
“서이건.”
한태경이 슬쩍 서이건에게 다가왔다. 서이건은 그가 불쑥 다가온 것보단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에 훨씬 더 놀랐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걷어 막기를 할 테니 네 특기인 안차기를 해서 넘어 트려.”
언제 봤다고 반말이지.
“뭐? 그럼 네가 위험하지 않아?”
그럼 나도 반말을 해줘야지.
“전혀.”
그렇게 말하며 한태경이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남자가 칼을 휘두르며 다가오지 말라고 소리 지르다가 점점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자 예상한 것처럼 한태경에게 덤벼들었고, 한태경은 가볍게 걷어 막기로 남자를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남자가 휘청하자 서이건은 기다렸다는 듯 달려가 안차기로 남자를 넘어뜨렸고 동시에 한태경이 그의 손목을 쳐서 칼을 떨어트린 뒤 그를 제압했다. 곧이어 경찰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태경과 서이건은 서로를 힐끔 바라보고는 경찰이 오자마자 남자를 인계했다. 그렇다고 거기서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증언을 해야 했으므로 두 사람 모두 경찰서로 가야 했고, 모든 절차를 끝내고 나오자 이미 오후 9시가 넘어있었다.
막상 나오고 나니 어색한 분위기가 두 사람 주위를 맴돌았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미친 쓰레기를 잡은 것보다 한태경과 함께했다는 게 더 얼떨떨했다. 둘 다 아무 말 없이 경찰서 건물을 빠져나와 걸었다. 그러다 문득 한태경을 살핀 서이건은 그의 코트 팔 부분이 너덜너덜해진 것을 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새끼가 한태경한테 칼을 휘둘렀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