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아.”한태경이 전화 통화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건강해 보이는 선배였다.
“안녕.”
“어, 선배!”
이건이 벌떡 일어나 그 앞에 섰다.
“오랜만이야. 아, 오랜만 맞나?”
“거의 이 주만이에요. 내일 뵐 날이었잖아요. 몸은 좀 어떠세요?”
“덕분에 건강하지.”
“다행이에요.”
“네 덕분이야. 네가 약 가져다줘서 살았어. 진짜.”
이렇게 말을 해주니 이건도 기분이 좋았다. 설사 그가 자신의 약 때문에 건강해진 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기쁘고 보람된 일이었다.
“다행이에요.”
“그런데 도서관까지는 무슨 일이야?”
“아 과제 때문에 찾을 자료가 있어서요.”
“그렇구나. 같이 찾을까?”
“아, 태경이 기다리고 있어요. 저기서 지금 통화 중이거든요.”
이건이 손으로 한태경이 있는 쪽을 가리키니 그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그쪽을 바라본다. 마침 전화 통화를 끝낸 한태경이 이건과 강유한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
“아프시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오, 웬일로 안부 인사를 제대로 하네. 그런데 그 똑바른 안부 인사 덕분에 선배가 무척 기쁜 얼굴을 한다. 방금 자신에게 보여준 미소보다 백배는 예쁜 미소로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응, 걱정해 준 덕분에 건강해졌어.”
선배의 발그레한 뺨, 그리고 수줍은 미소가 어쩐지 가슴이 아팠다. 자신에게 편하게 대해주는 것이 정말 좋은데 그 편한 게 정말 편해서인 것 같아서…. 조금만 더 자신을 봐줬으면 하는데 아직 많이 먼 것 같았다. 언제쯤이면 자신에게도 저런 얼굴을 해줄까.
“전 아무것도 한 거 없습니다. 한 건 저 녀석이죠. 저랑 한 약속도 잊어버리고 선배에게 약을 가져다주러 갔더라고요. 그날 얼마나 화가 났던지.”
어? 뭔가 이상한데? 한태경이 웃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서 서이건이 오히려 당황하며 그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꼬집었다. 선배는 당황한 얼굴로 한태경과 서이건을 번갈아 보았다.
“미안해. 그런 줄도 모르고. 이건아 정말 미안.”
“아니에요. 제, 제가 잘못한걸요. 이 녀석과 약속한 걸 잊어버려서.”
“그래도… 정말 미안해.”
“선배. 그러지 말아요.”
“아니야. 내일 다시 사과할게. 나 지금은 가봐야겠다. 미안.”
방금까지 같이 도서관에서 책을 보자고 한 사람이 서둘러서 자리를 떠난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태경이야 죽든지 말든지 그냥 도서관에 선배랑 같이 들어가는 건데 뒤늦게 후회가 몰려왔다.
“너 왜 그래? 선배에게 꼭 그렇게 이야기해야 해?”
“내가 말을 꾸며낸 것도 아니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 것뿐이야.”
“누가 알면 너 나랑 대판 싸운 줄 알겠다. 그냥 짧게 말다툼? 그 정도 수준이었잖아.”
솔직히 서이건은 그게 말다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약속을 어긴 자신의 잘못이 맞았고, 서이건은 정당하게 화를 낸 것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말해버리면 미안한 마음도 사라지는데.
한태경은 정말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이건을 바라보았다. 그런 얼굴로 본다고 해도 하나도 안 무섭다.
“너 선배랑 잘할 마음 없는 거지?”
서이건의 질문에 한태경이 깊게 숨을 토해냈다.
“몇 번 만났다고. 아직 그건 유효해. 그리고 나는 오늘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있는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이고, 또 어떻게 보면 너한테 유리한 이야기 아닌가? 너를 더 밀어줬다고 생각하는데 난.”
어떻게 보면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선배가 너를 더 좋아하니까. 그런 말은 선배에게 상처가 되고, 상처받은 선배를 보면 자신의 마음이 더 아프니까.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하는 순간 뭔가 더 복잡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태경도 어쩐지 뒤로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오늘 기분도 안 좋아 보이고. 괜히 건드리지 말자. 이건은 두 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