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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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경이 사라졌을 때.

서이건은 괜찮았다. 당연히 괜찮아야 했다. 그가 서이건의 인생에 들어온 것은 기껏해야 1년 남짓이니까. 그전에는 이름만 익히 들었을 뿐,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타인에 가까웠다. 그런데 불쑥 서이건의 인생 바구니에 멋대로 들어와 눌러앉았고, 함께 지내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고작 1년. 그 정도면 뭐… 20년 인생에 1년 정돈데 금방 훌훌 털겠지. 19년을 함께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금방 일어섰는데, 한태경은 죽지도 않았고… 인연이 된다면 좀 지긋지긋하겠지만, 또 만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옷에 묻은 먼지 털 듯 그렇게 일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하루하루가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변함없이 운동하고, 훈련하고… 정말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보내는데 뭔가 하나 빠져버린 기분. 기숙사를 앞에 두고 벤치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한태경이 떠난 지 고작 사흘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갑작스러운 복통에 서이건은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의식을 잃어버릴 정도로 크게 아팠던 이건은 아침이 되어서야 자신이 왜 그렇게 아팠는지 의사에게 들을 수 있었다.

‘검사 결과, 서이건 씨는 장 파열이었습니다. 많이 고통스러웠을 텐데요.’

‘장 파열이요?’

‘네, 이런 말 드리기 조심스럽지만, 흔적을 보아 알파에 노팅을 당하신 것 같은데 혹시 강간이시라면 의사 소견서를 써드릴 수 있습니다.’

쿵- 하고 심장이 떨어졌다. 검사로 그런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알파인 자신이 같은 알파에게 노팅을 당한 것을 들켰다는 수치심이 컸다. 그러나 무엇보다 누군가가 한태경이 자신을 강간했다고 손가락질할까 봐 걱정이었다. 이건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뇨, 강간당한 거 아닙니다.’

그래, 그건 강간이 아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한태경도 그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녀석이 그럴 녀석이 아니라는 건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절대 아닙니다.’

단호한 이건의 말에 의사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만약 합의였다면… 상대방에게 조금은 자제하라고 하세요. 알파는 원래 노팅을 할 수 없는 몸입니다. 원래라면 노팅이 되어서도 안 되고요. 그런 몸에 노팅을 했으니 망가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건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의사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날 밤은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약을 먹었다곤 해도 계속 아픈 배를 쓰다듬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의사 선생님이 한 말이 떠올라 검색을 시작했다.

‘알파가, 알파에게 노팅’

그때 한태경은 노팅을 세 번 정도 한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은 알파의 몸엔 노팅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왜 자신은 가능했던 걸까. 검색 버튼을 눌러보니 온통 이상한 소리와 변태적인 영상들뿐이었다. 괜히 검색했나 후회하면서 아래로 쭉쭉 스크롤을 내리던 이건은 영상 하나를 발견했다.

[알파가 알파에게 노팅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어려울 뿐이죠. 알파는 러트가 오면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까운데, 그 짐승의 본능 중 하나가 독점과 집착입니다. 뱀처럼 자신의 사람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하죠. 그리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내 사람으로 만들까. 알파로선 그 최적의 방법이 노팅입니다. 어떻게든 이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최후의 수단을 선택하는 거죠. 상대가 오메가라면 단번에 노팅이 가능합니다. 오메가의 자궁 속엔 노팅을 유발하는 애액도 나오니까요. 하지만 알파에겐 그게 없죠. 정말 허공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성공할 확률은 1%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노팅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상을 보고 있는 노팅을 당한 알파님들, 당신들은 지금부터 이 영상을 끄고 도망가십시오. 그게 아니라면 그냥 나 죽었네, 라고 생각하세요. 그 알파는 당신을 언제고 산 채로 씹어 삼킬 겁니다. 당신을 증오하냐고요? 아니면 싫어하냐고요? 아닙니다. 절대. 당신을 그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 끔찍하고 잔인한 집착과 소유욕을 함께 곁들여서 말이죠. 당신은 이제 밖을 돌아다니지도 못할 겁니다. 어쩌면 당신이 정말 임신할 때까지 노팅을 할지도 모릅니다. 알파의 집착은 인류를 지금까지 많이 변화시켜왔습니다. 태초에 남성 오메가는 임신할 수 없었다고 하죠? 하지만 어느 순간 임신이 가능해졌죠. 그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알파가 그렇게 진화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알파 만능주의가 아닙니다. 이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요. 그러니 지금은 불가능해도 언제고 알파도 알파에게 노팅 당해 임신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 될 수도 있으니 저는 그저 당신에게 안녕을 고합니다.]

AI 나레이션과 함께 믿을 수 없는 예시 몇 개를 보여주며 설명을 이어가던 영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머리가 복잡해진 이건은 웬만해선 보지 않는 댓글들을 쭉 읽어 보았다.

- 하, 내 인생 망한 듯

- 알파가 알파에게 노팅이라니 그런 짓을 왜 해?

- 와 정말 아프겠다. 오메가도 노팅 당하면 개 아픈데. 하물며 자궁이 없는 알파에게….

- 알파의 독점욕 정말 무섭지. 난 가끔 러트 온 알파 볼 때마다 소름이 돋더라니까.

- 우성 알파들은 그냥 알파나 열성들에게 노팅 쌉가능할 듯

영상보다 더 도움이 안 되는 댓글들이었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은 머리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었다. 아니, 정리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을까. 그냥 그런 거지. 그 상황엔 어쩔 수 없었어. 한태경은 바퀴벌레들에게 당했고, 러트가 왔어.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한태경은 이건에게 빨리 나가라고 했다. 그러나 어렴풋이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음에도 그 녀석이 걱정되어서, 그래도 함께 있어 줘야 할 것 같아서 곁에 머물렀던 건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그건 강간이 아니다.

이후 한태경이 자신을 찾아 왔을 때, 그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억하고 있다면 누구보다 고통스러워할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을 테니까.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태경에게 또 하나의 짐을 더하기엔 그의 인생이 너무 고달파 보였으므로…. 그러니 자신도 잊자고, 서이건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몸의 기억은 쉽게 잊힐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날부터 이따금 악몽을 꿨다. 한태경이 자신의 몸을 억지로 열고 몸 안 깊숙이 노팅을 하는 꿈을. 잠에서 깰 때마다 식은땀으로 범벅된 이건은 본능적으로 배를 만졌다. 노팅을 당한 것처럼 아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래서일까. 한태경의 존재는 쉽게 서이건에게 잊히지 않았다. 마치 각인 당한 것처럼.

‘금메달 축하한다.’

올림픽 금메달을 딴 날. 모든 사람에게 축하를 받고, 국민 영웅이 된 날. 기쁨에 젖은 상태로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술자리를 가지면서도 핸드폰을 손에 놓지 않았다. 혹시나 한태경에게 연락이 올까 봐.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에도 그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한국에 입국해 아버지들 사진에 금메달을 올려놓고 절을 올린 이건은 홀로 빈방에 앉아 금메달을 옆에 두고 맥주를 한 캔 마셨다.

‘왜 연락을 안 해.’

분명 전화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죽지 않았다면 그래도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테니 기쁘게 연락하면서 ‘너라면 할 줄 알았어.’라고 이야기해줄 줄 알았건만, 한태경은 끝끝내 연락이 없었다. 빈 캔을 구기고 바닥에 누워 금메달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금메달이지만 어쩐지 한태경에게 더 잘 어울렸겠다는 쓸데없는 생각도 하면서, 아주 조금 밀려오는 허전함을 떨쳐내려 부단히 애썼다. 이건 한태경이 없어서 찾아드는 외로움이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처음 보는 천장이었다. 그런데도 느껴지는 약품 냄새에 여긴 병원인가 생각하고 있던 찰나, 이건은 지금이 꿈이라고 느꼈다. 언제쯤일까? 금메달 딴 후인가? 급성 위염으로 병원에 한 번 실려 간 적이 있는데 그때인가? 아니면…. 이건은 과거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를 하나씩 떠올리며 지금 꾸는 꿈이 언제 적 일인지 가늠했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을 때,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알고 놀라기는커녕 손을 들어 그 눈동자가 있는 눈꺼풀을 슬쩍 만져 보았다.

“웬일로 꿈까지 행차하셨나.”

“꿈?”

와, 말도 하네. 꿈에도 한 번 안 나오던 놈이.

“그래, 꿈. 꿈에서라도 네가 나오면 한 방 패주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힘이 없네. 가위눌리는 건가.”

이건은 푸흐흐 웃다가 배가 아파서 웃음을 멈췄다. 아, 꿈인데 왜 이렇게 리얼하게 아픈 걸까. 정신도 그렇고 몸도 그렇고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안 되는데, 할 이야기가 많은데.

“왜 전화 안 했어? 기다렸는데. 내가 얼마나 네 전화를 기다렸는데. 금메달 딴 거 자랑하려고… 얼마나… 많이 기다렸는데. 아… 사고 났다고 했지. 너는 날 기억 못 하지. 그랬지. 그거,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좀 쓸쓸하다. 나만 기억하네. 나만….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한태경의 커다란 손이 이건의 눈을 덮었다.

“더 자. 아직 깨어날 때 아니야.”

“꿈인데….”

“그래, 꿈이니까. 더 자. 더 자도 돼. 깨면 이야기하자.”

주문처럼 한태경의 그 목소리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꿈일 텐데도 이상하리만치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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