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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들어온 헬스장은 생각보다 크고 넓었다. 어느 정도 크냐면 중간에 권투 링이 있을 정도였다. 간혹 경호원들이 사용한다고 하긴 했지만, 본사 훈련장에도 없는 복싱링이 있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태경이 준비하는 동안 이건은 복싱링에 매트를 하나 더 깔았다. 그대로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으나 그래도 좀 딱딱 해보여 까닥하면 한태경이 크게 다칠 것을 염려해 매트를 하나 더 깔고 한태경을 기다렸다.
“흠….”
이건은 땀에 젖은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뭘까? 지금 자신은 긴장하고 있는 걸까? 오랜만에 한태경과 대련을 하게 되어서?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것은 기대되고 기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정작 당사자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대련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옛 기억을 더 떠올려 줬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태경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역시 최고의 옷걸이는 완벽한 비율과 몸이었다. 검은색 트레이닝복이 저렇게 고급스럽게 보일 줄이야. 한태경이 이건을 보곤 링 위로 올라왔다.
“한 전무님은 권투도 하십니까?”
“가끔 경호원들과 스파링합니다. 서이건 씨는요?”
“전 권투는…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이렇게 여기 서 있으니까.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은 합니다.”
“김 사범님께 이야기하세요. 아마 좋은 스승을 붙여 줄 겁니다.”
“네.”
뭐, 오늘 주제는 권투가 아니니 권투의 이야기는 일단 뒤로 넘기고, 이건은 정 가운데 서 있는 한태경의 앞에 섰다.
“오늘 저와 대련할 종목은 무엇을 하실까요? 유도? 태권도? 아니면 다른 것도 괜찮습니다.”
“서이건 씨, 봐준다는 듯 이야기하지 말아요. 당신과 대련을 하려면 태권도만큼 좋은 건 없죠.”
“…봐 드리지 않을 겁니다.”
“기대하죠.”
서이건이 한발 물러나 자세를 잡았다. 한태경 역시 한발 물러나 준비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에 이건은 당황했다. 완벽한 준비 자세였다. 십 년 전과 다름없는…. 이건은 마른 침을 넘겼다. 너는 태권도에 대해선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그래도 정말 사랑했던 것이니만큼 나보다는 많이 기억하고 있겠지?
“태권도… 기억나십니까?”
“어렴풋하게. 거기에 더해 나름대로 태권도도 열심히 배웠으니 걱정 마세요. 서이건 씨의 공격을 피하지 않을 테니.”
어중간한 대답. 그건 서이건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능글스러울 정도로 스무스하게 넘어간 그 질문은 더는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대련으로 대답을 받을 수밖에.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한태경을 향해 달려나간 사람은 서이건이었다. 그는 시원하게 발차기를 날렸고, 한태경은 그 발차기를 피했다. 그러자 서이건이 반대편 다리를 날렸고, 한태경은 오른쪽 팔로 그 발차기를 막았다. 서이건은 얼른 후퇴하여 자세를 다시 바로잡았다. 그다음에 먼저 공격한 사람은 한태경이었다. 그는 팔로 서이건을 공격했고, 밀어내기 등을 쓰다 다리를 걸었지만, 서이건은 한태경의 모든 움직임을 간파해 하나하나 꼼꼼하게 피하는 것 없이 모두 막았다. 허점이 보이지 않아 오히려 당황한 것은 서이건이었다. 그래도 은퇴하고 나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훈련했는데 반성이 될 정도로 한태경은 서슴없이 서이건을 향해 승부를 걸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즐거운 걸까. 분명 자신이 밀리는 것에 슬퍼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왜인지 너무 즐거워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쉬지 않고 계속 대련하다 한태경의 오른팔이 서이건을 향해 오다 빗겨나가자 서이건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오른팔을 잡아 꺾어 다리를 걸고 그대로 바닥으로 눕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한태경이 바닥으로 엎어지고 서이건은 그의 팔을 꺾은채 숨을 몰아쉬며 한태경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제가 졌습니다.”
한태경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자 이건은 꺽은 그의 팔을 놓아 주고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자유로워진 한태경이 바로 앉자 서이건이 일으켜주기 위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태경이 웃으며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역시 금메달리스트에겐 못 이기겠군요.”
“아닙니다. 전무님이야말로 예전… 아니, 대단하셔서 놀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