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0 0 0
                                    


“한태경.”

한참을 흐르는 피와 늘어져 버린 시체를 바라보던 이건이 한태경을 조심스럽게 부르자 그가 서이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자신의 볼에 튄 피를 닦으며 뒤를 보고 고개를 까닥였고, 기다렸다는 듯 뒤에 서 있던 다른 이들이 달려 들어와 시체를 수습했다. 그는 총을 닦고 자신의 품에 넣으며 이건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아, 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오신….”

보통 위험 버튼을 눌러도 한태경이 직접 움직이진 않는다. 당연했다. 그를 지키기 위한 위험 경고인데 그가 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지금 여기에 그가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데리러 왔습니다.”

“네?”

“날 지키다 다친 사람을 그래도 잘 모셔야죠. 악덕 고용주가 되지 않으려면.”

아니, 저놈의 악덕 고용주는 언제까지 이야기할 거야. 이미 몇 달도 지난 일을.

“뒤끝, 진짜 기십니다. 한 전무님.”

서이건이 쀼루퉁하게 이야기하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놈들이 제집에 있었던 거죠?”

“그거야 답은 간단하지 않습니까? 서이건을 죽이려고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대체 왜요.”

“서이건이 다쳤다. 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누구를? NI의 장남, 후계자인 한태경을 지키기 위해서. 한태경을 그럼 왜 지켜야 했나? 그를 노리는 악당들이 있으니까. 대체 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달고,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죠. 하물며 전 금메달리스트와 한국 최고의 기업 후계자가 얽힌 일이니 더더욱 말입니다. 아마 우리 중 한 명이 오메가였다면 더 흥미로워했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니.”

아무래도 한태경이 농담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이건은 웃을 수가 없었다. 농담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앞에 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왜 한 전무님을 노리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대충. 하지만 자세한 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정부가 막더군요. 자칫하면 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그건 동감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이야기가 돌아와서 왜 저들은 절 공격을 합니까. 만약 제가 저들 손에 죽는다면 더 시끄러워질 텐데요.”

“그걸 원하는 걸지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시끄럽게 판을 벌여서라도 당신을 죽이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한 달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니까.”

“장기적으로는 그것이 좋다고 판단한 거군요.”

그들이야 자신을 죽이고 1년 정도 웅크리고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생각보다 사람들은 망각의 동물이고 지속적으로 뭔가를 주지 않으면 관심이나 흥미도가 떨어질 테니까.

“그렇습니다.”

“하….”

이건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정말… 어떻게 견딘 거야?”

서이건의 말에 한태경은 눈을 잠시 꿈틀거렸다.

“솔직히 아까 무방비한 상태에서 저 바퀴벌레들이 칼을 휘두를 땐 정말 이제 죽는구나 생각했어. 이제 끝이라고.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사람은 죽음 앞에선 모두 두려움에 떨게 되어있으니까. 그런데 너는 이런 공포를 매번 느꼈을 거잖아.”

“나를 위해서 몸을 바쳐 칼까지 맞아 놓고서는.”

“그! 거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땐 그렇게 무섭지 않았어. 내 죽음을 목적으로 공격한 게 아니라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해.”

하지만 확실히 오늘 공격은 좀 달랐다. 타깃이 자신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자신을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들의 눈을 보는 순간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견딘 건 없어. 익숙해진 것뿐이지.”

매번 똑같이 다가오는 그 공포에 익숙해졌다는 말이 더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이제 갈까?”

“아, 옷 정리하고 있었어. 조금만 기다려줘.”

이건 역시 자신이 들고 있던 총을 품에 넣고 방으로 들어가 널브러진 옷들을 정리했다. 뭐 빠진 것 없는지 고민하다가 아버지들 사진이 생각났지만, 아예 이사 하는 것도 아니고 그곳에 오래 있을 것도 아니니 가져갈 필요는 없을 것 같아 포기했다. 캐리어를 들고 방에서 나오니 거실은 어느새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있었고, 한태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밖에 먼저 나갔나 싶어 나가려던 순간 전혀 뜻밖의 장소에 그가 보였다. 아버지들 방이었던 곳에 걸어 두었던 올림픽 금메달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묘하고 이상했다. 무엇보다 한태경에게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던 올림픽 메달을 이렇게 보여주게 되다니 정말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라고 새삼 생각하며 이건은 문을 톡톡 노크했다.

“아무리 고용주라고 해도 함부로 남의 집 안방에 들어가시는 건 아니죠.”

그래도 신발은 벗었네.

“이 방에 침입자는 없는지 살피려고 한 겁니다. 그나저나 이게 그 금메달이군요.”

“아… 네. 그렇습니다.”

“가져가지 않는 겁니까?”

“네? 아… 동네방네 자랑할 것도 아니고… 아버지들 곁에 놔두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서요.”

“흠.”

한태경의 눈이 금메달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이건은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싶지 않았다.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그럼 이만 가시죠. 고용주님.”

이건의 말에 한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을 나섰다. 한태경의 등을 보자 이건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집에 한태경이 왔다. 예전과 전혀 다른 느낌과 방법으로. 오랜만에 이 집에 왔는데 아무런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걸까. 옥상을 봐도? 저기에 앉아서 이야기했던 것 전부 기억나지 않아?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돌아올까 봐 선뜻 물어보지 못했다.

“음, 여긴가.”

한태경이 닫힌 문 앞에 서서 난데없는 이야기를 했다.

“네?”

“과거의 내가 일기장을 쓴 것 같던데 거기에 적혀 있었어. 이 집 문 앞에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고. 서이건을 위해 이 문을 열어야 할지. 그냥 돌아가야 할지 고민했다고. 그런데 답은 없었어. 그 문을 열었는지. 돌아갔는지.”

“…열었어.”

“음?”

“너는 항상 문을 열고 들어왔어.”

기쁠 때든 슬플 때든 너는 어떻게 알았는지 항상 문을 열고 들어와 위로해주고 함께 있어 주었다. 그래서 아버지들이 돌아갔을 때도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었지. 이건은 한태경의 이야기를 듣고 피식 웃었다. 그래 한태경이 기억을 하든 못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가 살아 있고 여기 있는 것이 중요하지. 그리고 스스로도 결심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자신이 문을 열고 들어가겠다고.

“얼른 가자.”

그래서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 도착하고 나니 서이건은 자신의 생각과 아주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배정된 방은 다른 곳이 아닌 한태경의 집안이었다. 아니, 아직 이렇게 판단하기엔 이를 수도 있다. 잠시 잠깐 이곳에 들린 것일 수도 있지.

“뭐해요?”

이건이 현관에 서서 멀뚱히 서 있으니 한태경이 들어가다가 돌아본다.

“아, 캐리어를 들고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그 말은 ‘이 캐리어는 다른 곳에 놔두라고 해줘.’ 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한태경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들고 들어오세요. 서이건 씨는 앞으로 이 집에서 묵을 겁니다.”

“네? 어… 경호원들은 모두 별도로 지급되는 원룸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바로 아래층에.”

“네, 맞습니다. 하지만 서이건 씨는 제 밀착 경호원 아닙니까? 그들과는 달라요.”

“그건 맞습니다만, 현재 제 상태가 그렇게 좋진 않아 전무님을 지켜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아까처럼 폐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옆에 있으라는 겁니다.”

“죄송하지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서이건 씨는 나를 지키고 나는 서이건 씨를 지키고.”

“한 전무님이 저를 지킬 이유는 없습니다.”

“누가 몸 받쳐 지킨다고 했습니까? 이 집의 보안이 다른 층보다 더 뛰어나니 하는 말입니다. 여기가 훨씬 안전합니다. 안전하게 서이건 씨가 있어야 나도 신경 덜 쓸 거 아닙니까.”

한마디로 절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거다. 게다가 묘하게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애초에 한태경을 이겨 먹으려고 하는 자신이 잘못된 거지. 이건은 어쩔 수 없이 캐리어를 안으로 들고 들어갔다. 일하던 아주머니가 이건을 발견하고 웃으며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방으로 안내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의 안내에 따라 크고 복잡한 한태경의 집을 휘젓고 나서 도착한 방은 다행히 복층이 아닌 아래층이었고 정말 큰 방이었다. 옥탑방의 전체 크기보다 약간 작은 정도. 당연히 필요한 것들은 다 구비되어있었다. 침대, 옷장, 그리고 간편하게 업무를 볼 수 있는 데스크와 노트북까지. 화장실과 욕실은 내부에는 없었지만 바로 방 옆에 있었다.

그런데 왜 맞은편에 있는 방문이 신경이 쓰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은 설마 하는 마음에 아주머니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 맞은편 방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것도 제 건가요? 아니면 아무도 안 계시죠? 혹시 창고? 그렇다고 해주세요.

“아, 여긴.”

아주머니가 답을 해주려 입을 열었다. 서이건은 침을 꼴딱 삼켰다. 그때 타이밍 좋게 그 방문이 열리며 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 전무님 침실이세요.”

하, 젠장.

16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