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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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복기하는 건… 묘한 기분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기억력에 의존한 복기가 아닌 일기라는 다른 사람의 매체를 통해 과거를 들여다보는 건 어쩐지 보면 안 되는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정작 당사자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하나하나 자신들의 만남을 되짚어 보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대화하면 할수록 한태경이 기억을 잃은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 확 와 닿았다. 그는 자신의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군가가 쓴 것처럼 이야기했다. 분명 일기를 쓴 것도 기억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것만으로도 이건은 한태경이 그 사고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알 수 있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여기까지 할까?”

“어?”

한태경의 질문에 이건은 고개를 들었다.

“너 집중 못 하고 있잖아.”

“아, 아니야. 일기 보고 있었어. 제법 꼼꼼하게 야무지게 썼네 싶어서. 보통 일기… 잘 안 쓰잖아. 특히 이렇게 손글씨로는.”

“작은아버지가 나처럼 기억을 잃은 적이 있어.”

“음?”

작은아버지? 그렇다는 건 한태경을 낳아준 그 다정한 사람을 말하는 건가.

“사고 나셨던 거야?”

“모르겠지만 나처럼 망각의 물을 드신 적이 있다고 했지. 기억이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일기장 덕분이라고 했어. 큰아버지가 일기장을 주고 갔는데 그곳에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이 잔뜩 있어서 얼른 머릿속에 집어넣었더니 하나하나 기억이 다 나더라고. 그러니 일기는 꼭 적으라고 어릴 적부터 신신당부하시더군. 저쪽 책장 아래에 있는 건 전부 일기장이야. 나뿐 아니라 아버지들, 동생들 일기장까지. 우리 가족의 역사서지. 물론 저렇게 한곳에 모아뒀지만, 서로의 일기장을 보진 않아.”

한태경이 고갯짓으로 가리킨 곳엔 정말 크기가 제각각인 노트와 다이어리가 잔뜩 있었다.

“그렇구나.”

“그래서, 오늘은 그만할까?”

“그러자. 너도 피곤할 테니. 음… 그런데 한태경, 나 네 일기장 좀 가져가서 읽어 봐도 돼? 뭐, 내가 읽으면 안 되는 게 있으면 안 가져가고.”

“그런 거 없을 테니 마음 편히 읽어.”

한태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건의 어깨를 툭툭 쳤다. 확실히 그날 이후 뭔가 바뀌었다. 좀 더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졌다. 아주 조금 십여 년 전의 한태경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

“아, 그리고 몸 다 나으면 이야기해.”

욕실로 가던 한태경이 이건을 향해 이야기했다.

“괜찮다니까.”

“파워가 100% 됐을 때 이야기하라고. 열대 맞을 테니까. 그리고 여기 있는 게 거북하면 말해. 안전한 곳 알아봐 줄 테니.”

문을 닫고 들어가는 한태경의 뒷모습을 바라보곤 한숨을 한번 쉬었다. 뭐라는 건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데? 네놈 지키려고 여기에 있는 건데. 무슨 안전한 곳이라는 거야? 주객이 전도된 거 아닌가? 애초에 내가 연약한 오메가도 아니고. 이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태경의 옆방으로 갔다. 침대에 편히 앉아 한태경의 일기를 한 장 한 장 책 읽듯 읽었다. 일기장을 보고 놀란 것은 ‘아프다.’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많은 것이었다. 그가 어릴 적에 매우 아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잘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일기를 보니 정말 그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태권도를 좋아하는 마음은 흡사 자신과 똑같아서 이건은 기분이 좋았다. 맞아. 한태경은 정말 태권도를 좋아했어. 그리고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많아지는 자신의 이름과 이야기들. 특히 자신과 만나고 나서 한태경은 글에도 흥분이 묻어났다.

‘서이건을 만났어. 그를 만났어. 드디어. 그와 이야기를 했어.’

기쁨도.

‘그는 강해 보이지만 외로움을 많이 타. 그래서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아. 계속 옆에 있어 주고 싶은데… 아니, 그의 옆에 계속 있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가 있을까? 옆에 있게 해달라고 한다면… 그는 받아 줄까?’

다정함도.

‘같은 기숙사를 배정받았다. 아주 조금 그와 같은 방을 쓰게 해달라고 스치듯 학장님께 말한 것이 도움이 된 것 같다. 나쁜 짓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16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