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태경은 이틀 정도 입원한 후 퇴원했다. 퇴원 후 ‘어디로 갈래?’ 하고 묻는 서이건을 보고 한태경은 당연하게도 서이건의 집에 간다고 이야기했다. 그 날 이후 한태경은 무척 불안해 보였다. 서이건과 한시도 떨어져 있으려고 하지 않았고, 그런 한태경이 서이건은 너무 안쓰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국회에 찾아가서 장관이고 뭐고 다 뒤엎어 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그를 데리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은 쉽게 한국을 뜰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 자신의 것이라고는 옥탑방 하나뿐이니까. 하지만 한태경은 아니다. 그에겐 좋은 가족도 있고, 무엇보다 책임져야 할 회사가 있었다. 그런 그에게 그것을 다 버리고 해외로 도망가 버리자고 할 수도 없다. 그는 책임감 많은 사람이니까.
“그래서 어느 나라부터 갈까?”
“어?”
집에 도착해서 씻고, 뭐 먹을까 고민하던 중에 한태경이 치킨 먹고 싶다고 해서 치킨을 시켜 먹고 있었다. 어느새 눈앞에 닭다리가 두 개 놓여 있었고, 그걸 집어 한입 베어 먹었을 때 들은 한태경의 말에 이건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뭘?”
“해외에 가서 태권도 가르치자고 했잖아. 어디부터 가는 게 좋겠어?”
“어….”
“왜?”
“아니, 정말 가려고?”
이건의 조심스러운 반문에 한태경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럼 그때 한 말은 거짓말이었어? 날 안심시키기 위한?”
“아….”
“…그것도 모르고 난.”
한태경은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급기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건은 얼른 그를 붙잡았다.
“거짓말 아니야. 그러니까 다시 앉아.”
이건의 답을 들은 한태경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말 거짓말 아니야?”
“아니야. 진심이야. 그런데… 너는 나보다 챙겨야 할 게 많으니까. 지금 회사도 다니고. 쉽게 떠날 수 없잖아. 그래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거 아닌가 생각했지.”
“난 지금 당장에라도 떠날 수 있어. 아니, 솔직히 이야기하면 일주일. 일주일이면 돼. 그 이후는 한국을 떠날 수 있어.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으니까.”
“어떻게?”
“재우에게 전무 자리를 줄 거야. 그 아이가 아버지 뒤를 이어 NI 총수가 될 테지. 다만 수많은 난관이 있겠지만, 그 녀석이라면 문제없어.”
“어… 재우는 알아?”
“알고 있어. 이야기도 했고. 받아들였어. 그러니까 NI쪽 일은 해결. 나머지는 집 처분이나 여러 가지인데… 그건 반 정도 정리해서 여행 자금… 아니, 사단 법인 같은 거 설립해도 좋고, 후원금으로 써도 좋겠어. 자금 운용에 대해서는 차차 생각해보고 같이 고민하자. 그럼 이것도 해결. 하나는… 아버지들에게 이야기하는 건데.”
한태경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당연했다. 그는 아버지들을 무척 아끼고 사랑한다. 물론 그 아버지들도 한태경에 대한 기대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불쑥 그것을 다 포기하고 떠난다고 한다며 그분들이 받을 상처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건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건 직접 이야기를 나눠야지.”
“그래야지.”
“안 그래도 아버지들과 내일 식사하는 날이었잖아. 이야기하자.”
“어….”
“서이건.”
“어?”
“아무런 문제 없어. 1주일 뒤면 떠나는 거야. 여길. 네가 말한 대로 우리가 좋아하는 태권도 실컷 하자.”
우리가 좋아하는 태권도. 생각해보면 한태경과 대련하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그 날이 다시 온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하지만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미래를 만들어 내면 되겠지.
치킨을 다 먹고, 이부자리에 누워, 잠든 한태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역시 사람 온기가 도니까. 이 집이 그제야 집 같았다. 이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려 그렇게 부단히 노력했는데 결국은 제자리다. 하지만 다시 한태경의 손을 잡고 이 집에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항상 한태경은 자신의 집에서도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집에 왔을 땐 조금이나마 어깨에 힘이 빠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을 자신이 만들어 줬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쁜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