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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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태경이 이야기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정 교수가 들어와 한태경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수안 입니다.”

그는 젠틀하게 생긴 중년이었고, 일반 알파였다. 그러나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는 것 보니 각인한 상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정중하게 한태경에게 인사를 하고 악수를 요청했고, 한태경은 당연히 악수에 응했다.

“몇 년 전에 서이건 씨를 진료했다고요.”

“네, 같은 일로… 그 이후 쭉 서이건 씨를 담당했습니다. 아무래도 서이건 씨의 위치상 이런 일을 함부로 누군가에게 진료를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서이건 씨가 정 교수님을 지목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응급실에 실려 온 것을 제가 담당했을 뿐입니다. 그때 당시는 그렇게 유명한 선수인지는 몰랐습니다. 후에 알았는데 정말 간절히 부탁하더군요. 그래서 계속 비밀을 지켜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흠, 죄송하지만 한 전무님. 서이건 선수를 제가 진료해봐도 괜찮을까요?”

“네.”

이미 진료가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간 서이건을 진료했던 사람이 보는 것과는 또 다를 테니까. 한태경은 살짝 뒤로 물러나 주었다. 정 교수는 한참을 서이건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저번과 같은 위치인 것 같은데….”

정 교수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지만, 한태경에겐 똑똑히 들렸다. 저번과 같은 위치라니?

“무슨 위치를 말하는 겁니까.”

한태경이 약간 날이 선 듯 물으니 정 교수가 살짝 놀래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번에 서이건 선수에게 노팅한 사람이 한 전무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두 분이 특별한 관계인지 제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난데없는 의사의 물음에 한태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이 무슨 뜻으로 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네가 과연 그때의 일을 알만한 관계의 사람이냐.’고 묻는 것이다. 서이건이 주치의 하나는 잘 선택한 거지. 하지만 왜인지 점점 짜증이 올라오는 한태경은 혀를 찼다. 더 짜증이 나는 건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서이건에게 한 일도 있는데 여기서 그런 관계하고 거짓말까지 해버린다면… 서이건에게 정말 못 할 짓이다. 그러나 알고 싶다. 누가 저 남자에게 그렇게 깊은 마킹을 했는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태경이 답을 못하고 있자 정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저도 알려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건 서이건 선수의 개인적인 문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일만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알파가 알파에게 노팅을 하는 건 무척 위험한 일입니다. 아마 내부가 많이 손상되었을 겁니다. 치료를 꾸준히 해야 하고… 무엇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서이건 선수는 이번이 두 번째이기 때문에 더더욱 말입니다. 그때 당시도….”

그러니까 불쾌하다. 그놈의 두 번째, 두 번째. 그래, 그 첫 번째 노팅, 굳이 자신이 알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지금 의사가 이야기하는 뉘앙스가 그렇게 밝지만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평범한 관계로, 연인으로 노팅한 것이었다면 이런 반응이 아니었을 것이다.

“김 사범님.”

“음? 왜.”

“병원장님을 좀 불러 주세요.”

“뭐? 박 교수는 왜.”

“서이건 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뭐?”

“네?”

김 사범도, 정 교수도 놀란 눈으로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담담하게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무래도 제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전무님.”

정 교수가 조금 화가 난 듯 목소리가 낮아졌다.

“교수님께서 걱정하시는 바가 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뭔가 제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서이건 씨와는 지금 아무런 관계가 아닙니다. 과거는 친구였고, 지금은 고용인 관계입니다. 이번 일은 제가 잘못한 것이 맞습니다. 서이건 씨가 의식을 차리면 사과를 할 겁니다. 그걸로 모자란다면 그가 고소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일로 인해 이번에 서이건 씨에게 무슨 영향을 끼칠지 다 이야기해주십시오. 가해자로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병원장님을 불러서 듣겠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저는 듣게 될 겁니다. 그러니 깔끔하게 여기서 정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태경의 단호함에 정 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독점욕이 번들거리는 젊은 알파의 눈은 이미 무서울 정도였다. ‘이래서 알파란 것들은….’ 자기도 알파지만 정말 질리는 짐승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스스로 이야기할 정도로. 이렇게 되면 꼼짝없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 전무에 대해서는 쉬쉬하고 있지만 이미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특이한 알파라는 것. 그리고 그가 페로몬을 푼다면 아마 병원이 휘청거리겠지. 여러 가지를 위해서라도 지금 여기서 이야기해주는 것이 나은 것 같아서 정 교수는 서이건에게 ‘미안합니다.’라고 사과하고 서이건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한도 내에서 차분히 모든 것을.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한태경은 마른세수했다.

“그러니까… 서이건이 강간당한 것 같다고요?”

“본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정황상 맞습니다. 어쩐지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존중하고 하고 저도 덮었습니다만.”

“아, 아니-.”

이야기를 듣다 벌떡 일어난 사람은 김 사범이었다. 김 사범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건이는 태권도 국가대표 유망주였습니다. 힘도, 체력도 우성 알파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그런 애를 누가 억지로 눕혀서 강간을-”

“그건 어쩌면 편견 아닐까요? 저는 가능하리라 봅니다. 사실 서이건 씨가 이야기한 적은 없어서 저도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강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태경이 아까와는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처참했거든요. 바깥쪽, 안쪽 할 것 없이. 시일이 좀 지난 처라 외상은 많이 줄어들었었지만 그래도 원래 어느 정도의 상처였는지는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려 강간이라 확신이 든 것은 방금 서이건 씨의 상처를 보고 확신했습니다.”

“아까 저번과 같은 위치라고 말한 것 말입니까?”

“네, 그때 노팅으로 인해 내상을 입은 곳과 같은 위치가 똑같이 상처가 났습니다. 한 전무님께서 강제로 서이건 씨에게 노팅했다고 하셨으니 그때 그 알파도 그렇게 했겠죠. 서이건 씨에게 강제로 노팅한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머릿속엔 한가지 질문만 떠오른다. ‘대체 누가?’ 서이건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정 교수 말로는 몇 년을 설득해도 서이건은 그 알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 알파가 알파에게 노팅하는 건 웬만한 집착과 독점욕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오메가는 노팅을 유도하지만, 알파는 그런 기능이 전혀 없으니까요. 아마 그 알파는 서이건 씨를 끔찍하게 괴롭혔을 겁니다. 그래서 그 이후 서이건 씨에게 경찰에게 보호 요청이라도 하는 것이 어떠냐고 했습니다. 그 정도 집착이라면 또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서이건 씨는 단호하게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행인지 아닌지 그 이후 정말 서이건 씨에게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요.”

서이건에게 그토록 집착하던 알파가 있었다고? 노팅이 되지 않는 알파의 몸에 자신의 흔적을 박아 넣을 정도로? 그런 알파가 서이건의 주위에 있었던가? 한태경은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기억이 없으니까 더더욱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답답했다. 당장에라도 알고 싶었다.

“서이건 씨가 의식이 돌아오면 한 번 더 검사하겠습니다. 조금 걸리는 것도 있고.”

“알겠습니다.”

정 교수를 보내고 한태경은 서이건이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었는데도 그는 의식이 없었다. 정말 튼튼한 남자가 이렇게 누워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차라리 깨어나 자신을 때리고 발로 차고 욕을 하고 경찰서 가자고 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도대체 너는 그 알파에 대해서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거지? 강간은 당했지만, 사랑했던 건가. 너도 마음이 있던 알파였나? 생각해보면 그나마 있는 기억에서 단 한 번도 서이건이 연애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마음이 있어 티를 내며 다가왔던 오메가도 모를 만큼 둔하기 그지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건 알파가 취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렇다기엔-.

“윽-.”

“태경아?”

한태경이 머리를 짚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찌르르 뇌를 두드리며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던 것이 있었다. 찬찬히 그 기억을 잡아 보려 노력하자 곧 뿌옇던 것이 선명하게 돌아왔다. 강유한과 서이건이 있었다. 그때 서이건은 강유한을 보며 다시 없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자신을 보며 이름을 크게 불렀다.

‘야! 한태경! 여기야!’

횡단보도 건너편에 서 있는 자신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 활기차서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오직 그 순간에 많은 사람이 서 있었고, 강유한도 있었지만 서이건만이 보였다. 원래 세상에 그 한사람인 것처럼.

“너, 괜찮아?”

김 사범이 걱정되어 한태경을 바라보았다. 한태경이 괜찮다며 푹 숙인 고개를 들어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김 사범은 깜짝 놀랐다.

“태경아, 너 눈이….”

눈?

한태경은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금안이 반짝이고 있었다.

16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