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왔어?”
지친 몸을 이끌고 체육관에 도착했다. 집에 갈지 체육관에 묵을지 고민하다가 집보다는 체육관이 더 한태경의 집과 가까워서 체육관을 선택했고, 언제나 그렇듯 진 사범님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이건은 도착하자마자 사범님께 인사하고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이를 닦으며 거울을 보았다. 정말 이상하게 기 빨리는 하루였다. 아니, 생각해보면 기 빨릴 만했다. 무엇보다 지금 배가 너무 불렀다. 본인이 요청한 건 아니지만, 이왕 해준 거 그래도 다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배가 그다지 고프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파스타를 싹싹 긁어서 먹었더니 속이 더부룩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맛있긴 했다. 원래 양식을 좋아하지 않고, 특히 파스타 종류는 더더욱 많이 먹어본 적이 없어서 늘 먹을 때마다 이게 뭔 맛이지? 그냥 주재료 맛이 강한데? 이 정도 생각만 했었는데 오늘은 정말 ‘맛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한태경은 요리도 잘했었다. 기숙사에서 끓여준 라면도 맛있었고, 짧은 오피스텔 생활 속에 만들어줬던 요리들도 모두 괜찮았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다. 조금이라도 과거의 한태경과 지금의 한태경이 겹치는 모습이 있긴 한 것 같아서.
“그래. 첫 출근 어땠냐.”
욕실에서 나와 방에 들어오니 진 사범님이 이불을 깔면서 기다렸다는 듯 이건에게 물었다. 이건은 앉는 것도 생략하고 바로 이불 위에 누워 한숨을 푸우- 내 쉬었다.
“사범. 김 사범님과 만났어요. 사범에게 연락 왔었어요?”
“어? 어….”
어라? 놀랄 줄 알았는데 반응이 영.
“잠깐, 사범님과는 연락하고 있었어요?”
이건이 벌떡 일어나 진 사범님에게 물으니 그가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그동안 연락 안 된다고 툴툴거리던 게 다 연기였어요??”
“아니야. 나도 몇 년간 연락 안 된 건 맞아. 한국 들어오고 나서 연락됐어. 한 2년 됐나. 그런데 그마저도 만난 건 아니고, 뭐가 그렇게 정신이 없는지 진짜 6개월에 한 번씩? 살아 있다고 연락만 오더라니까?”
“그때 한태경에 대해서 이야기 해준 건 없어요? 아니 2년 전부터 연락했다고 해도 내가 한태경 욕할 때 이야기는 해줄 수 있었을 거 아니에요.”
“이건아. 일단 진정해라. 난 한태경이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른다. 물어볼 새도 없었어. 말했잖아 김 사범도 너무 바쁘더라고. 그리고 느낌이 김 사범도 이야기 못 하는 느낌이라 그냥 모른 척했어.”
“하아….”
“그래. 김 사범도 잘 지내든?”
“네.”
이건은 오늘 김 사범님을 만난 이야기. 그리고 어떻게 지내시고 요즘 무슨 일이 하고 계시는지 상세히 진 사범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진 사범님은 이건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네가 많이 힘들겠구나.”
“네? 제가요?”
“그래. 김 사범이 한태경을 위한 경호 회사를 만들고 분명 엘리트들만 모아 두었는데도 힘들었다는 건 한태경이 생각보다 더 위험하다는 거다. 그 자리에 네가 들어간 거야. 그러니 조심해. 한태경도 당연히 지켜야 하지만 너도 너 자신을 지켜야 한다. 알겠어?”
“…네, 명심할게요.”
“김 사범에겐 내일 내가 전화해봐야겠다. 이제 전화 좀 받겠지.”
“아까 저보고 밥 먹자고 하셨는데 언제 날 잡아서 한번 곱창에 소주 마셔요.”
“그래. 그러자. 오랜만에 그놈이랑 술 마시고 싶네.”
오늘 밤도 한잔 어떠냐고 이야기하는 진 사범님에게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한다고 말하고 얼른 누워서 눈을 감았다. 보통 잠이 잘 오지 않아 못해도 30분은 뒤척거리는데 확실히 피곤했는지 지금은 절로 눈꺼풀이 감겼다. 눈을 뜨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
눈이 떠진 건 아침 5시였다. 얼른 씻고, 대충 우유라도 한 컵 마시고 지하철과 버스를 번갈아 타며 차를 사야 하나 고민할 때쯤 한태경의 집에 도착했다.
NI의 핸드폰을 꺼내 도어록에 갖다 대니 곧 출입하는 인물을 AI가 확인하곤 문을 열어 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모르는 앱이 하나 더 설치되어있었고 지문과 동체 인식을 하고 열린 앱은 현재 한태경이 묵고 있는 집의 도안과 비상 통로 및 비상시에 전원과 전기 등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과 그 위치 등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었다. 더 놀란 건 한태경 바로 아래층이 CCTV 통제실이었다는 것이고 거기에 출퇴근하는 사람이 5명이 있고, 보안 요원이 20명이 있었으며 전부 이 빌라에 살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 빌라 통째로 한태경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전에 잠깐 묵었던 오피스텔이 생각났다. 하긴 그게 제일 안전하긴 했다. 확실히 그땐 사건 사고도 적었고. 경호원들이 지키기 조금 편해졌다고 이야기하는 걸 들었었으니까.
‘내가 필요 없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빌라의 경호는 완벽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CCTV 하나가 따라 다니며 이건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느껴지니 갑자기 불편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자신이 익숙해지는 수밖에.
한태경의 펜트하우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가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탭을 보고 있었다. 아침마다 일어나 기사들을 확인한다고 했으니 그 작업 중인 것 같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안녕하세요.’보단 조금 더 친근감이 있는 인사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한번 힐끔 쳐다볼 뿐 여전히 탭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오늘 앱을 받았는데 도면을 보면서 집을 좀 둘러봐도 괜찮을까요?”
“그렇게 해요. 그러라고 오늘 일찍 부른 거니까. 한 30분 시간 있습니다.”
아… 그랬구나. 원래는 6시 30분이었다는 거군. 이건은 하하 웃으며 앱을 보면서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았다. 거의 대부분 방의 문들은 열려 있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숨어들거나 그 이상한 움직임을 확인하기 위해 열어둔 것 같았다.
‘침실까지 열려 있네.’
침실까지 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들어가는 건 안 될 것 같아서 살짝 문 앞에서 침실 내부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고, 깨끗했다. 아직 깨끗하다 못해 삭막했다. 그리고 가만히 침대 외에 아무것도 없는 그 방에 있는 CCTV를 보고 갑자기 한태경이 너무 안쓰러워졌다. 이러면 사생활이 없잖아. 어떻게 이런 삶을 사는 거지. 정말 불편할 텐데…. 앱을 살펴보니 침실의 CCTV는 한태경이 끄고 켜고를 조절할 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외에 집안에 설치된 카메라들은 불가능했다. 어제 이 집에 혹시 선배가 있는 거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해졌다. 이곳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감옥이다.
“다 봤습니까?”
“아, 네.”
“그럼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다.”
어느새 씻고 옷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그가 소파에 앉은 채로 서이건을 불렀다. 그에게 다가가니 그가 아까 보고 있던 탭을 이건에게 내밀었다.
기사가 하나 떠 있었다.
“8시쯤에 기사로 뜰 겁니다.”
[금메달리스트 서이건, NI 한태경 전무이사 경호 실장으로 발령]
“경호 실장?”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군요. 본인 월급이 얼만지는 알고 있습니까?”
어제 읽긴 했는데… 위치추적 부분만 보고 그냥 창을 꺼버렸던 기억을 되살리며 이건은 하하 웃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이건은 찬찬히 기사를 읽었다. 이 부분은 어차피 한재우가 이야기한 것이고 본인도 동의했던 터라 놀랍진 않았다. 그저 이렇게 먼저 보여준 게 신기할 따름이다.
“일부러 얼굴을 더 드러내는 활동을 당분간 하게 될 겁니다. 불편하더라도 양해 부탁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제가 얼굴을 드러내는 활동은 하는 건 좋은데 전무님께서 위험하지 않습니까?”
“아아…. 위험하더라도 전무로서 해야 하는 일은 해야 하지 않겠어? 이쪽도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아닌데 말이야.”
한태경이 탭을 다시 가져가며 말했다. 뭔가 서이건은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 같았다.
“미안해. 그런 뜻으로 한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네가 걱정돼서.”
“그렇겠지. 그래야만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한태경은 넥타이를 바로 매고 신발을 신었다. 이건도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한태경이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를 타고 둘이 첫 출근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이건은 왜 한태경이 자신에게 ‘불편하더라도 양해 부탁한다.’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기사가 뜨고 난 후 첫 점심시간 구내식당에 온 서이건을 알아본 사람들이 우르르 다가와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쫓겨나다시피 구내식당을 나온 서이건은 사내에 있는 편의점에서 도시락 하나를 사서 전무실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서이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건이 엘리베이터 문에서 시선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
“맞네.”
부드럽게 웃는 여전히 아름다운 얼굴. 절대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사람.
“유한 선배.”
강유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