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경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혹시나 해서 날짜를 확인했다. 설마 하는 마음에 확인한 날짜는 자신이 독일에서 사고당했을 때의 날짜와 같았다. 엄청난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너무 가깝다. 너무.
“왜 그래?”
태경이 심각한 표정이 되자 김 사범이 이건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서 태경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 뭐 잘못됐어?”
“서이건이 병원에 온 날이 제가 사고를 당한 날입니다. 독일에서.”
“정말? 무슨 그런 우연이 있어? 신기하네.”
“그런데 여기 의사의 소견에 보면 노팅 당한 기간을 얼추 적어 두었는데… 제가 한국에 있을 때입니다.”
태경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보고 김 사범은 턱을 쓸었다.
“그렇네. 네가 한국에 있을 때구나.”
“김 사범님이 그러셨죠. 제가 사고가 나기 전에는 서이건에게서 떨어진 적이 없다고. 그렇다는 건 제가 그 강간범을 봤을 가능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말이다. 네가 있는데도 알파를 만난 거라면… 정말 이건이 말대로 강간이 아닌 거 아니냐? 솔직히 저 녀석 성격상 강간이라면 숨길 것 같진 않거든. 자기가 반 죽였으면 반 죽였지. 정의감이 좀 넘치는 아이라 진 사범이 매번 걱정했단 말이야. 그런 애가 자기 쪽팔림 때문에 강간범을 숨길 것 같진 않다. 네가 모르는 사이에 알파와 잤거나 사귀었을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가능성으로는 계속 생각이 거부한다. 절대로 용납 못 한다는 듯 머리가 그쪽으로는 도통 굴러갈 생각을 하지 않아 한태경은 한숨 쉬었다.
“아무래도 학교를 한번 가봐야겠어요.”
“뭐?”
김 사범은 깜짝 놀랐다. 단 한 번도 한태경이 학교를 가보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한번 기억을 찾으러 가보는 것이 어떠냐고 김 사범도, 한태경의 가족들도 권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거부했다. 가봤자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단호하게 잘랐다. 그런 그가 학교로 가겠다니. 그런데 그것도 벌써 몇 년 전이다. 이제 와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가봤자. 뭐 있겠어?”
“없겠죠. 많이 변했을 테고. 그래도 뭔가 생각나는 게 있지 않겠어요? 아, 그때 당시에 같이 학교에서 훈련받았던 선배나 후배를 좀 수소문해주세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알았다.”
한태경이 탭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킷을 입으며 나가려는 움직임이 보여 김 사범은 얼른 한태경의 뒤를 따랐다.
“어디 가게?”
“생각난 김에 지금 가보려고요. 나오지 마세요. 알아서 경호원들 데려갈 테니 사범님은 서이건을 지켜봐 주세요. 깨어나면 알려 주시고요.”
“그래도 당분간은 더 몸을 사리는 게 낫지 않겠어?”
“한동안은 아마 조용할 겁니다. 지금껏 나오지 않는다는 건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니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아, 기자들 좀 불러 주세요. 몇몇 기자들이 절 따라오게 해주시고, 경찰들도 충분히 보란 듯이 배치해주세요. 학교에는 가능하면 학생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해주시고요.”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아마 말려도 소용없을 것이다. 한 고집 하는 녀석인 데다가 한번 결정한 건 밀어붙이는 성격이니…. 김 사범은 얼른 경호원을 준비시켰다.
“알았다. 실장을 붙일 테니 조심해서 다녀와라. 뭔가 네가 떠오르는 게 있으면 좋겠구나.”
“네.”
한태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완전히 문이 닫힐 때까지 눈을 감고 있는 서이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한태경이 도착한 곳은 바로 국체대 신입 기숙사 앞이었다. 어렴풋하게 남아 있던 기억 속의 건물과는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내부는 거의 그대로라는 이야기를 들어 미리 학교에 양해를 구하고 기숙사로 들어가 보았다. 확실히… 1층 로비부터 많이 바뀌었지만, 외관보다는 그때의 모습이 남아 있긴 했다. 흐릿한 머릿속 필름을 꺼내 천천히 대조해보았다. 그리고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며 그때의 기억을 되새김질했지만, 점점 흐릿해질 뿐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